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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담론, 인천정담/리토피아신서 15/이현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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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은이
이현식李賢植은1966년 외가인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조부 때부터 살았던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인천에서 초, 중, 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같은 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한국근대문학비평을 연구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의 주요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간) 평론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재)인천발전연구원에서 문화정책 담당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2005년부터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을 거쳐 기획경영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추계예대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겸임교수로 일했으며 현재는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저서로 문화도시로 가는 길(다인아트, 2004), 왜 지역문화인가(로크미디어, 2007),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소명출판, 2006),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근대문학비평(소명출판, 2006), 곤혹한 비평(작가들, 2007)이 있다.
리토피아신서․15
인천담론▪인천정담
仁川談論▪仁川情談
초판1쇄 인쇄 2012. 4. 15.|발행 2012. 4. 20.
지은이 이현식|펴낸이 정기옥|펴낸곳 리토피아|
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호
주 소 402-013 인천 남구 숭의3동 120-1|전화 032-883-5356|전송032-891-5356
홈페이지 www.litopia21.com|전자우편 litopia@hanmail.net
ISBN-978-89-6412-025-5 03810
값 14,000원
2. 목차
제1부
인천이 기획하는 문화도시 9
제2부
지난 100년 인천의 문화, 어떻게 변해왔나 23
검여 유희강 특별전을 보며 44
인천의 교문 만들기 사업 47
부평아트센터 개관이 갖는 의미 50
부평사람들의 삶과 열망―부평풍물대축제의 과거와 현재 54
왜 시립미술관이 필요한가 86
인천아트플랫폼과 구도심의 문화적 재생 94
인천에서 AALA문학포럼을 개최하는 뜻101
인천 남구 문화지표 조사의 의미107
근대 개항도시 인천이 꿈꾸는 문학관114
제3부
잡지 ≪강화江華≫의 문화사적 의의121
백발 청년의 뒷모습―시인 김윤식132
내용과 형식의 빛나는 어울림―박상희 개인전140
신소설 월미도를 읽다143
이광환 일기와 인천의 일상 문화148
고발과 온정주의를 넘어서―이세기의 신작시176
대중문화에 나타난 인천의 이미지183
별자리에 누워 편히 흘러가시라―시인 박영근206
제국주의자의 관점과 인천의 관점―인천향토자료 조사사항 210
제4부
인천의 골목길을 걸으며215
만국공원을 위하여218
소설, 인천을 읽다220
인천항 단상223
인천에서 영화 찍기227
역사와 추억이 어린 섬, 월미230
제과점의 아이들234
기억을 되살리는 음식238
칼국수 열전242
칼국수, 다른 이야기246
3. 책머리에
5년 만에 다시 책을 낸다. 이번에는 인천에 관해 새로 쓴 글로만 책을 한 권 묶었다. 이런 저런 기회에 썼던 글들이라 조금 산만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인천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인천을 주제로 에세이로부터 논문에 이르기까지 모아본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이런 성격의 책이 그 나름의 의미도 있을 것이라고 자위해본다.
가벼운 수필로부터 다소 심각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내가 인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기억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런데 나는 인천에 대한 애정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인천만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책 첫머리의 글은 인천의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최근의 생각들을 정리해 본 것이다. 일종의 총론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인천 문화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글들, 인천과 인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살아가는 인천에 대한 기억과 느낌을 다룬 글들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크게 구별은 했어도 각 분류 안에서 무거운 주제로부터 편하게 읽히는 글들을 일부러 뒤섞어 배열했다. 글을 읽는 분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인천에 관한 만화경萬華鏡을 본다는 생각으로 대해주셨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문제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헤아려 주시리라 믿는다.
책을 낼지 많이 주저하였다. 인천이라는 국한된 고장만을 놓고 쓴 글이 상품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책을 내는 출판사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장종권 선생의 적극적 격려가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인천에 관한 책을 내는 데에 의기가 투합하여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4. 본문 중에서
칼국수 열전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2학년 선배들 몇몇이 새로 뽑힌 1학년 학생회 간부들을 학교가 파하고 난 뒤 불러냈다. 그들은 별말 없이 우리를 자유공원 넘어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길 안쪽의 칼국수 집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우리가 간 곳이 칼국수 집이었는지도 잘 몰랐다. 일반 가정집 같은 곳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남녀들이 방방의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고픈 배를 쥐고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아직 어렸던 때라 여기저기 식당을 다닌 적도 없었고 가족끼리 이따금 외식하는 일이 집 밖에서 먹는 음식의 전부였던 때였다. 중학교 때는 기껏해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는 우무나 라면을 최고의 음식으로 알던 때여서 칼국수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릴 때 집에서 만들어 주던 칼국수는 비위가 약했던 내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멸치 국물의 비린 맛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 안에 있는 칼국수는 그 맛의 차원이 달랐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게 손칼국수는 아니었다. 기계로 뽑은 밀가루 국수를 육수와 함께 삶고 고명을 얹은 것이었는데 육수 맛이나 그 육수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튀김 고명(이 튀김 고명은 아마 신포시장의 튀김집에서 나온 것인 듯했다)과 다진 양념(일본어투로 말해서 다대기)이 국수의 맛을 내는 비결인 듯 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어른들이 드나드는 식당에 선배들과 함께라지만 우리끼리 간 것도 드문 경험이었고 신포시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화려한 쇼핑가는 우리를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엄마 손 잡고 가는 신포시장이 아닌 우리끼리의 신포시장이 비로소 고등학생이 된 우리들에게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요컨대 신포동의 시장과 유흥가가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전화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신포동의 그 칼국수집을 원조로 구석진 골목에 칼국수집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곳은 칼국수 골목이 되었다. 값도 쌌고(보통 300원 곱빼기 500원, 당시 분식집 라면 값과 같았다) 맛이 있었던 그 집을 모방한 곳들이 늘어났는데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늘어난 그 칼국수집들도 모두 성업을 이루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시절, 300원짜리 칼국수를 먹고 400원짜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냈다. 신포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신포동 칼국수 골목(때로는 칼레스토랑이라고도 불렸다)은 비디오 재생기가 귀하던 때, 칼국수를 먹으며 비디오 시청도 가능했던 공간이었다. 한참 히트하던 블록버스터 급 헐리우드 영화를 그곳에 가면 틀어주곤 했다. 음성적으로 비디오를 복사해서 손님을 끌기 위해 틀어주었던 것이라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칼국수를 기다리며 눈요기까지 덤으로 얻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이따금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어김없이 나는 친구들을 그 칼국수 골목으로 데려갔다. 푸짐한 양과 좋은 맛, 싼 값은 친구들을 부담 없이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신포동에는 게다가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나눌 커피숍이 정말 많았다. 칼국수를 먹고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어스름이면 애관극장 뒤편 이모집이나 고모집, 누나집 등에서 빈대떡과 삼치를 앞에 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들이켰다. 신포동은 젊은 우리들의 욕망과 지향 없는 열정을 풀어주던 곳이었다. 젊었을 때 신포동을 배회하다 가끔씩, 밤새 걸어도 이런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만이 계속되는 곳은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차피 도시의 아들과 딸들이었던 우리에게 밤은 너무 짧고 신포동은 너무 작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머리가 커지고 음식 맛도 볼 줄 알면서 신포동 칼국수의 얕은맛에 조금씩 싫증이 날 무렵 내 눈에 띄었던 곳이 신포동 횟집 골목에 있던 ‘부영식당’이다. 멸치국물에 다진 양념을 얹고 계란을 풀어내던 칼국수와 수제비는 어렸을 때 추억을 간직했으면서도 맛은 더 좋았다. 대학원 다닐 때 연애시절 아내와 처음 간 그곳을 지금도 가끔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들이 일부러 외식하러 가곤 한다. 칼국수 골목은 신포시장의 퇴락과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하시던 부영식당 주인 할머니는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따라 맛도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럴 때면 부영식당 맞은편의 ‘엄마분식’을 간다. 그곳은 칼국수에 질려 이따금 잔치국수를 먹으러 간 곳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주인아주머니가 변함없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요즘 새로 생긴 잔치국수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푸짐한 양에, 내게는 연애시절의 추억도 간직한 곳이라 더욱 반갑다. 20년 전의 맛을 간직한 그곳에 이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손을 잡고 그곳에 가서 우리 내외는 잔치국수를 먹는 것이다.
칼국수 맛있는 집은 이곳 말고도 많다. 부평 용갈비 옆 ‘시골손칼국수’는 늙은 호박을 육수에 섞어 국물 맛이 부드럽고, 경인교대 정문에서 계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사골 칼국수 집도 맛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골국물이 구수하다. 시티은행 인천 본부 빌딩에서 동양장 사거리로 내려오는 대로변의 ‘손칼국수’ 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점심때만 영업을 하는데 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갈 때면 항상 식당 문 닫을 때인 두 시 쯤 혼자 몰래 가서 먹고 오곤 한다. 구월동 로데오 거리 롯데 백화점 뒤편의 ‘가리비 칼국수’ 집도 시원한 조개국물이 일품이다. 연수구 영남스포렉스 문화공원 앞에 있는 ‘최고집’ 칼국수 역시 해물 칼국수와 바지락칼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국물도 시원하고 면도 쫄깃하다. 바지락 칼국수에 들어가는 바지락 양이 엄청나다. 중구청 근처 해안동의 ‘해안 칼국수’는 정말 집에서 만든 칼국수 맛 그대로이다. 담백한 멸치 국물의 맛이 어린 시절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12년 봄, 이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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