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도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여정/박양호
페이지 정보

본문
박양호 編著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여정
초판1쇄 인쇄 2013. 11. 25.|발행 2013. 11. 30.
지은이 박양호|펴낸이 정기옥|펴낸곳 리토피아
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호
주 소 402-013 인천 남구 경인로 77|전화 032-883-5356|팩스,032-891-5356
홈페이지 www.litopia21.com|전자우편 litopia@hanmail.net
ISBN-978-89-6412-037-8 03910
값 15,000원
1. 저자
박양호朴陽豪 Park Yang Ho
1950년 해병대 입대
1956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연세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1961년 심계원(감사원) 공채시험 합격
1974년 대통령비서실 특명 암행감사관
1985년 감사원 공보관?심의실장?제3국장?제2국장
1989년 제33회 행정고등고시위원
1991년 감사원 사무차장
1995년 (사)한국경영기술컨설턴트협회 4?5?6대 회장 역임
2003년 자전수기『뽕나무숲에 지금도 바람이 부는지』발간
2007년 자전에세이『마지막 암행어사』 발간
2009년 『한국전쟁의 실상과 학도병 이야기』 발간
2010년 『한국전쟁과 시, 군가, 삐라』 발간
2011년 『유엔군 전적비를 찾아서』 발간
2. 자서
책을 펴내면서
필자가 미군을 처음 본 것은 아호비령阿虎飛嶺에서였다.
6.25전쟁 발발 이후 나는 고향(평남 양덕군)에서 치안대원으로 활동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 패잔병들이 대거 북쪽으로 올라왔다. 치안대원들은 밀려드는 패잔병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원산으로 가기로 했다. 그즈음 국군 제3사단이 원산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소총 몇 자루를 휴대하고 길을 떠났다. 험준하고 구불구불한 아호비령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자 10여 대의 파괴된 군용차량과 불에 타고 있는 미군 시신이 보였다.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미군 보급 차량을 습격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군수품을 탈취해 가고 차에다 미군들을 묶어놓고 불을 지른 것이다.
나는 원산에서 학도병으로 자원하여 해병 제3대대의 수색대원이 되었다. 해병 제3대대는 원산에서 아호비령을 넘어가 양덕군 동양면의 약암산성에다 대대본부를 설치했다. 나는 해병대원들과 함께 수시로 정찰을 나갔고 북한군 패잔병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대규모 공산군이 해병 제3대대 본부를 공격해 왔다. 그 와중에 미 해병고문 장교(대위)가 포탄 파편을 맞고 전사했다. 미 해병고문 장교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미군은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연인원 178만여 명이 참전했다. 그들은 왜 머나먼 한국에 와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지만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온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 또한 미군 철수문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과 마찰을 빚음으로써 한미 관계가 소원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혈맹 국가로서 한미 양국은 그때그때마다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우리나라는 21세기에 들어서서 GDP(국민총생산량)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미국으로부터 원조로 제공된 잉여농산물을 팔아서 나라 살림을 꾸려가던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진입함으로써 한미 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날에 이르러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맹국이 되었다. 앞으로도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에 흔들리지 않고 두 나라가 발전되어가기를 기원한다.
2013년 늦가을 박양호
3. 목차
차례
책을 펴내면서/박양호․7
혈맹의 나라 미국과 함께/이상훈(전 국방부장관, 현 애국단체총협의회의장)․ 9
주한미군은 한국과 동북아시아 방위의 보루/河然淳(金谷學術文化財團 理事長)․11
제1장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 미 군정청․20
2. 조선 과도정부․22
3.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활동․24
4. 남조선 단독선거․33
제2장 미국의 원조
1. 미국의 원조기관․50
2. 경제원조․54
가. 무상원조
나. 유상원조
3. 군사원조․61
가. 1차시기(1945년~1950년)
나. 2차시기(1950년~1961년)
다. 3차시기(1961년~1970년)
라. 4차시기(1971년~1986년)
제3장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역할
1. 한국군 창군․70
가. 국방사령부
나. 조선경비대
다. 조선해안경비대
라. 국방경비사관학교
마.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2. 6․25전쟁과 한국군 증강․80
가. 전쟁 중 한국군 증강
나. 휴전 이후 한국군
3. 베트남전 파병과 한․미 관계․85
가. 베트남전쟁 개요
나. 한국의 파병 의지
다. 1차 파병
라. 2차 파병
마. 3차 파병
바. 4차 파병
사. 5차 파병
아. 베트남전 참전의 의미
제4장 한국전쟁과 미국
1. 북한의 불법 남침․102
가. 소련군과 김일성
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약속
다. 소련의 고문단과 군수 지원
라. 선제타격작전계획
2. 미국의 파병 결정․120
3. 미군 참전 현황․123
가. 지상군
나. 공군
다. 해군
제5장 미군의 주요 5대 전투
1. 미 지상군의 최초 전투․140
2. 대전을 사수하라․145
3. 마지막 방어선 워커라인․151
가. 창녕지구 전투
나. 영산지구
4. 세기의 인천상륙작전․178
5. 장진호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다․185
제6장 한국전쟁의 영웅들
1. 파병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194
가.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연보
나. 트루먼 대통령의 파병 결정 과정
다. 트루먼 대통령의 평가
2. 한국전쟁을 반전시킨 맥아더 장군․202
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연보
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다. 중국 원폭 주장과 퇴임
라. 한국전 초기의 역할
3. 낙동강의 불도그 워커 장군․209
가. 미 제8군 2대 사령관
나. 미 제8군의 참전
다. 미 제8군의 지연작전
라. 최후의 방어선 워커라인
마. 비운에 쓰러진 영웅
바. 워커힐 호텔
4. 적지에서 생환한 딘 장군․219
가. 미 제24사단장 취임
나. 제34연대의 평택․천안 전투
다. 대전전투
라. 미로에 빠진 딘 소장
마. 적지에서 생환하다
바. 에필로그
5. 양화진에 잠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231
가. 윌리엄 얼 쇼 선교사
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다. 에필로그
6. 한국 공군과 전쟁고아의 대부 헤스 대령․237
가. 미 공군 조종사가 되기까지
나. 한국 공군의 대부
다. 전쟁고아의 아버지
라. 에필로그
7. 전설적인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246
8. 기적을 일구어 낸 라루 선장․251
제7장 명예로운 미군 장성의 자제들
1. 제2대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과 샘 워커 대위․258
2. 제4대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 2세 공군 중위․262
3. 미 제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존 아이젠하워 소령․266
4. 제3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빌 클라크 대위․271
5.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과 윌리엄 해리스 중령․275
제8장 21세기의 한미동맹
1.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기까지․282
가. 제너럴셔먼 호 사건
나. 신미양요辛未洋擾
다.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라. 한일을사조약과 미국
마. 일본의 팽창과 미국
바. 미군정기와 6.25전쟁
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 한미동맹의 현재와 미래․299
가. 주한미군
나. 한미연합군사령부
다. 인계철선과 미 제2사단
라. 작계 5027
3. 한미동맹을 위한 공동 비전․315
4. 평가
추천의 말
혈맹의 나라 미국과 함께
2013년 10월 24일자 조선일보에 김일성이 ‘더 늙기 전에 한 번 더 남쪽과 겨뤄보고 싶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중국의 외교문서를 통해서 밝혀진 내용이다. 김일성은 1965년도에 재침할 계획을 세우고 마오쩌둥毛澤東과 중국의 파병 등에 관해서 심도 있게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법 남침으로 한반도 산하를 초토화시키고 수백만 명의 동족을 살상殺傷케 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도 국방부의 ‘국방백서’에 의하면 북한은 1954년부터 2012년까지 무장간첩 남파와 같은 침투행위를 1959회에 걸쳐서 저질렀고,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국지전 도발을 994차례나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김일성은 특히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31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켰고, 미 해군 푸에블로 호를 나포했으며, 울진과 삼척지구에 124부대 무장공비 120명을 내려 보내는 등 1960년대에만 1011건에 이르는 침투와 329건의 국지도발을 감행했다.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된 것은 김일성뿐만이 아니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온 북한의 주체사상 독재정권은 장거리 탄도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끊임없이 전쟁 공포를 조성하고 있다.
북한은 2013년 8월 노동당 유일사상 10원칙(강령)을 개정했다. 그때 1조 4항인 ‘…조국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야 한다’는 내용은 바꾸지 않았다. 이 조항은 바로 적화통일을 의미한다. 1990년도에 동유럽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등 국제 정세가 바뀌었지만 북한은 오늘날까지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미국은 우리에게 은인의 나라이다. 일본을 패망시켜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우리가 기근에 시달릴 때 무상으로 원조를 해 주었다. 또한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분 하나로 보잘 것 없이 가난한 대한민국을 피로써 지켜준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주한미군 병력 2만8천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특히 서부전선 일대에 주둔한 미 제2사단은 전쟁 억지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 구성하고 있는 안보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 점에 대해서 한없이 고마움을 느끼며 동맹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 책은 한미 간의 역사를 비롯해서 미군의 역할과 영웅담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박양호 회장님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 드리며 앞으로도 건필健筆하시길 빈다.
2013년 늦가을 이상훈(전 국방부장관, 현 애국단체총협의회 의장)
5. 본문
1. 미 군정청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우리나라는 비로소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북위 38도선 북쪽을 소련이 점령하여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았다.
1945년 9월 8일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제24군단 제7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했다. 9월 9일 경성에 입성한 제24군단장 하지 중장은 16시경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과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을 가졌다. 이후 곧바로 조선총독부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태평양방면미육군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방면미육군최고지휘자의 권한을 가지고 이로부터 조선 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과 이 지역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한다”라는 포고령 제1호를 선포했다. 맥아더 장군은 포고령 제1조에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라고 밝힘으로써 한반도 남쪽을 직접 통치한다는 것을 알렸다.
하지 중장은 9월 12일 일본의 아베 노부유키 총독을 해임하고 ‘아치볼드 빈센트 아놀드’ 소장을 미 군정장관에 임명했다. 이후 9월 14일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을 인수했고 19일에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하 미군정)’을 설치했다. 이로써 주한 미군 총사령관이자 군정청장이 된 하지 중장은 정무총감에 해리스 준장, 재무국장에 고든 중령, 농상국장에 마틴 중령, 법무국장에 우달 소령 등을 비롯하여 11명의 장교를 총감 및 국?과장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초기에 행정 공백을 우려해서 일본인 직원을 행정고문으로 남게 하여 미 장교들의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5년 10월 5일 김성수 등 한국인 11명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미군정 운영의 도움을 받았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한국인을 국?과장에 임명했다. 이로써 미 장교와 한국인이 함께 근무하는 양국제가 실시되었고 고문관 제도는 폐지됐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중앙집행부서 조직을 국局에서 부部로 개편하고 부서를 신설하여 문교부, 사법부, 운수부, 국방부, 경무부, 농무부, 상무부, 재무부, 체신부, 보건후생부, 토목부, 노동부 등 13부를 구성했다. 또한 인사행정처, 식량행정처, 서무처, 물가행정처, 관재처, 외무처, 지방행정처 등을 개편했다. 지방행정처는 나중에 폐지되었다.
1947년 5월 17일 미군정 법령 제141호가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6월 3일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되었다. 과도정부 민정장관에 안재홍이 임명되었고 행정권이 미군정에서 과도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이 과도정부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어서 과도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었다.
과도정부는 행정 조직을 13부 1특별국으로 조정하고 인사위원회와 중앙경제위원회를 신설한 후 물량·식량을 담당하는 2개의 행정처를 두었다. 이후 과도정부 행정 기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2. 조선 과도정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있었다. 회의 결과 3국 외상회의결정서를 28일에 발표했다. 그 내용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 건설>,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를 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대해서 우익단체와 중도 정당, 그리고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등은 반탁운동을 펼쳤다. 특히 전국 파업을 주도한 임시정부는 1946년 1월 1일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포고령 국자國字 1호, 2호를 발표하고 미군정에 정권 이양을 요구하여 마찰을 빚었다.
조선공산당(이때까지 미군정은 이남에 있는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등 좌익계열 정당을 제재하지 않고 있었다)은 처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박헌영 당수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조선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는 등 소련의 지침을 전달받고 돌아온 이후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3일부터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1946년 2월 1일 임시정부 주도로 서울시 천주교 대강당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우익인사, 각 단체 대표, 지방대표 등 195명이 참석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등 민족지도자 38명을 민주의원으로 개편하고 군정사령관 자문기관으로 위촉했다. 이후 8월 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위한 군정법령 제118호를 공포했다.
입법의원 정원은 총 90명이다. 그 중 45명은 미군정에 의해 선임되었고 45명은 10월 하순에 선거를 통해 민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관선의원으로 선임된 중도좌파 여운형이 민선의원 선거의 부정을 지적하며 탈퇴했다. 뒤이어 홍명희, 조완구, 장건상, 엄항섭도 의원 임명을 거부했다.
또한 미군정으로부터 일본 협력자로 지목된 김성수, 장덕수, 김도연 등 6명이 당선 무효가 되었는데 그에 반발하여 등원을 거부한 민선의원들도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입법의원은 정원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
1946년 12월 12일 군정청에서 입법의원 57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이 열렸다. 행정수반에 안재홍, 의장 김규식, 부의장 신익희, 윤기섭, 최동오가 임명되고 대법원장에 김용무, 검찰총장 이인, 감찰위원장에 정인보가 선임되었다.
- 이전글낙타의 눈/김용균 시집 14.03.27
- 다음글도시의 원숭이/천선자시집 13.12.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