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도서
지평선시동인지 제8집 '그냥 가만히, 가만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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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포에지․146
그냥 가만히, 가만히 그렇게
인쇄 2023. 6. 15 발행 2023. 6. 20
지은이 김유석 펴낸이 정기옥
펴낸곳 리토피아
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호
주소 21513 인천 부평구 평천로255번길 13, 903호(부평테크노파크M2)
전화 032-883-5356 전송032-891-5356
홈페이지 www.litopia21.com 전자우편 litopia@hanmail.net
ISBN-978-89-6412-182-5 03810
값 12,000원
1. 저자
2010년 결성된 지평선시동인은 저 너른 지평선 끝에 혼돈이 가져올 혼곤한 자유를 짓고자 한다.
2. 서문
8집을 묶으면서
또 한 획 밑줄을 긋고
거기 무엇을 적을까 망설인다.
질문을 던질 만큼 멀지 않고
답을 지을 만큼 가까이 끌리지도 않는다.
오래 서 있거나 아득히 걸어가는,
허공이면서 바닥인 생의 배후에
나풀거리는 풀잎의 점자들이
저마다 소슬하다.
2023년 5월
지평선시동인 일동
3. 목차
지 연
소룡골 시편‧5 12
소룡골 시편‧38 13
소룡골 시편‧52 15
소룡골 시편‧53 17
통로 19
전창옥
죽음에 이르는 병 26
심우도송尋牛圖頌 27
임백령
일용할 양식 32
순간 체험 34
박각시를 기다리다‧5 36
한계령 37
다시 열차를 타고 38
이영종
연두 연두 봄 산 42
니체 친구 양미리 44
다짐이 곱슬곱슬 몰려왔어 46
이승훈
시월의 부용화 50
여름날-친구 부음 52
스냅 사진‧1 53
스냅 사진‧2 54
설악초 55
이세영
즐문 58
쓸쓸한 골목 59
필사와 표절 사이 60
고양이 전煎 62
수화 64
이강길
하얀 목마 68
어떤 골목 69
그날·3 71
길 위의 세 가족 72
12월이 되면 73
박윤근
줄, 줄이 76
빵 위에 쓰는 편지 78
문 80
문상붕
금강에서 84
저 굴뚝새 작은 눈망울 87
내 마음 88
맷돌 90
공화국에서 94
도혜숙
부르주아 그녀 98
헛헛 100
슈바빙-Schwabing 102
춘장대 청년 104
아무 106
김인숙
외줄 110
입동 112
정와靜窩 114
크레바스 116
기명숙
타라 120
오래된 책 121
섬 122
도서관 123
식은 커피 124
김유석
넙치 128
그리운 옛집 130
4. 작품
지연
소룡골 시편‧5
—거울 속의 강물
할머니는 얼굴보다 먼저 고무신을 닦았지 지푸라기에 양잿물을 묻혀서 뽀득뽀득 때를 벗겼지
꿈결에 먼 길을 다녀온 것 같았지 맑은 얼굴을 하고 있던 고무신
할머니는 베개를 안고 건넛방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가시곤 했어
국화구름무늬가 그려진 검은 거울을 보면서 쪽 찐 머리를 다듬었지
마당에 달빛을 지나서 두엄자리를 지나서 돼지 막을 지나서 허청 옆에 있는 할아버지의 외딴방
할머니는 그렇게 할아버지를 따라가셨지 댓돌 위에 고무신을 신고 오늘 나에게 오셨나 거울 속에 강물이 반짝이네
소룡골 시편‧38
—오월
곗돈을 두 차례 떼인 엄마는 서른한 살에 오두먹덕 집에서 도자기 접시를 떼어와 팔았습니다
등에 아기를 들쳐메고 갈담이고 금동이고 할 것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물건이 어찌나 잘 팔리는지 그 재미에 빠져서 저녁이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어떤 이는 음식을 내놓으며 자고 가라 하고 어떤 이는 씨아시를 내놓으며 물건을 갈아준다고 옷깃을 잡았습니다
모랫재를 포도시 걸어서 신작로 시계방에 물건을 맡겨놓고 마당에 들어서는데
할아버지는 저 오살년이 집안 망신시킨다며 저년을 두들겨 패 죽여라 곰방대를 두드리고 아버지는 몽둥이를 찾아 훌떡이고 밤은 깊어가는데 이년이 내 등 뒤에 숨었다 광에 숨었다 할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빠끔거리며 일러 주었습니다
아기를 안방에 던져놓듯 뉘어 놓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도망 다닌 엄마는 밤새 목이 길어졌습니다 삐비 새순 같은 아기 울음이 뒷산을 울렸습니다
젖이 불어서 앞섶이 흠뻑 젖은 엄마는 가슴을 풀어헤치며 납작한 걸음으로 안방을 들어갔습니다 아기가 젖을 꿀떡꿀떡 삼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둠이 파랗게 기지개를 켜는 밤이었습니다
소룡골 시편‧52
—건널목
얘야 닭목을 먹으면 노래를 잘한단다
언제나 닭목은 내 차지였는데
닭의 목뼈 같은 건널목을 건너면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닭이 된 것 같았는데
건너야 하는 세계는 왜 이리 많은지
패랭이 같은 할머니는 닭목을 한 번에 확 비틀었는데 말이야 팔팔 끓는 물에 닭을 넣었는데 말이야 기절했던 닭이 살아나서 헐레벌떡 뛰어가고 날아가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하면서 털 뽑힌 채로 그리고 나무야 그리고 학교야 그리고 정육점아 그리고 지붕아 아 그리고 하늘아 딩동댕동 꼬끼오 사람들은 검은 건반이 많은 밤을 건너는데 말이야
파 한 단에 오천 워언 확성기를 틀고 천천히 멈춘 트럭이 있는데 말이야 영혼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한 묶음에서 빠져나온 전단지 한 장 받았는데 말이야 짐승의 표
눈썹 위로 반듯하게 자른 머리카락이 흔들리는데 말이야 나는 봉지에 찍힌 바코드, 바코드 찍힌 평화
건널목을 연결해도 깃털 빠진 안녕
닭장 위로
사방에 신호등이 눈을 부라리는데 말이야
소룡골 시편‧53
—미만彌滿
사람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지나갈 때 알았지
웅덩이에 고인 빗물은 신의 눈동자라는 것을
오랜만에 바닥에 누워 떠나온 하늘을 바라보면
바람은 당신 체취를 만지고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가지
걸음마를 시작한 아랫집 희철이가
당신 눈을 철벙 밟다가 넘어진다
번데기 같은 고추를 흔들며 벌떡 일어난다
오구 오구 하면서 가실댁이 뛰어오고
당신도 오랜만에 눈빛이 자지러진다
골목마다 크거나 작게 째지거나 둥글게 고인
당신의 눈동자는 흔하디흔해
완전하다는 것은 온전히 모자란 것이기도 해서
햇볕에 웅덩이가 사그라질 때
누가 당신의 눈을 덜어냈지
당신도 핑계 삼아 눈을 감고 싶을 때가 있다
통로
1.
숫자들이 늘어납니다
오르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들
서로를 밀며
밀지 마, 밀지 마를 외치며
한쪽에서는 음악이 울리고 춤을 추고
한쪽에서는 비명이 울리고 숨이 막히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는 각자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어요
뭐야 관종이야
벽을 잡고 빠져나온 사람들
기둥을 잡고 기어오른 사람들
이대로 가다가는 죽어요
제 아이를 받아주세요
통로를 찾을 수 없어요
심폐소생술이 필요해요
경험 있는 분 어서 와주세요
가슴을 눌러도 눌러도
깨어나지 않는 목숨, 목숨
제발 눈 떠 눈 떠
사는 게 축제였으면 했어요
괴물 얼굴이든
호박 얼굴이든
마귀 얼굴이든
배트맨 얼굴이든
토끼든 지팡이든
함께 축제였으면 했어요
죄인가요 웃음이 죄인가요
사는 게 무기력해서
귀신으로 둔갑한 게 죄인가요
가슴을 흔들며 심폐소생술을 할 때
옥상 테라스에서 누군가는 계속 술을 마셔요
누군가는 길가에 누운 차가운 숨을
폰으로 인증해요
이곳에서 우린 다시 죄인이에요
통로 없이 흩어지는 변명을 들으며
통로 없이 흩어지는 새들의 비명을 들으며
얘야 우린 새에 가까운, 공공의 영웅이자 비밀이란다*
지하철에서 쏟아져나오는 목숨이
전류를 털면서 반동으로 헤맵니다
이태원 지하철 1번 출구
쌓여가는 국화와 색색의 젤리 앞에서
2.
통로만 남겨놓고 첩첩이 쌓인 짐들
그 속에서 너는 웅크리고
임신했다고 말했어
분명 빈궁마마라고 웃었었는데
볼록한 너의 배
죽은 아들을 품었구나
집을 나가야 해 먹구름 같은 얼굴에서
비가 오는구나
깨어나
꿈을 흔들어도
빗방울이 난간에 매달려 있어
아까워서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다고 했는데
하루아침에 그렇게
투명해서 위태롭다 너는
억울해
세월의 난간에 매달려
이제 하루를 어떻게 낳아야 하나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가자 해도 갈 곳이 없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시 「멕시코의 고지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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