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계간지작품상
2017년 제4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자/리토피아 이외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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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전국계간지우수작품상 수상작_ 리토피아
그녀의 시간은 어제입니다 외 1편
이 외 현
시간을 건너다 뒤집혀 허공에 빠진다.
헤엄을 쳐서 구름 위로 기어오른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사이
모르는 시간들이 다녀가고
결핍缺乏과 부족不足이 따라온다.
결핍은 분分 같고
부족은 초秒 같다.
결핍은 한자 같고
부족은 한글 같다.
결핍은 아물지 않은 상처 같고
부족은 여물지 못한 열매 같다.
결핍은 많이 모자라 불쌍한 생각이 절로 들고
부족은 조금 모자라 줘도 그만 안줘도 그만인
- 《리토피아》(2017, 봄호) 발표
속셈
씨돼지가 있는 집으로 물 길러간다.
우물가 양동이 입이 바짝 타들어간다.
찌그러진 두레박이 잠자는 씨돼지를 깨운다.
터엉, 메아리가 샘을 휘돌아 물보라가 핀다.
씨돼지 누런 침 흘리며 꽐꽐거린다.
두레박 째 먹이통에 콸콸 부어준다.
이따 암퇘지가 올 거야, 잘 부탁해.
도돌이표로 마른 동이마저 채운다.
우물물 퍼서 양동이 입 채우고
양동이물 퍼서 항아리 입 채우고
항아리물 퍼서 먹이통 입 채우고
먹이통물 퍼서 암퇘지 입 채우고
씨돼지가 있는 집으로 탁, 탁, 궁둥이 몰아간다.
- 《시와문화》(2016, 겨울호) 발표
▶《리토피아》 선정평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대시는 ‘부정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슬프지만 일상에 함몰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같은 차원으로 인식하고 이 모순된 인식의 기반위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삶은 애초부터 죽음을 발명함으로써 시작된다. 모든 비극의 기원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비극성은 현대성의 다른 말이 된다. 이외현 시인은 이런 사실을 단단한 시적 인식의 기초로 삼아 수월한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녀의 시간은 어제입니다」를 보자. “시간을 건너다 뒤집혀 허공에 빠진다./헤엄을 쳐서 구름 위로 기어오른다./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사이/모르는 시간들이 다녀가고/결핍缺乏과 부족不足이 따라온다.” 뒤집혀 빠진 ‘허공’이 바로 우리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오직 ‘결핍缺乏과 부족不足’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시인이 사는 시대는 언제나 바로 황혼 무렵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위험이 있는 그곳에 구원도 함께 자란다.’ 이외현 시인의 앞으로 더 큰 위험과 시련에 직면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래야만 더욱 더 빛나는 작품들이 쏟아질 것이다.
-장종권, 백인덕(글)
2017 <리토피아> 계간지문학상 수상자 신작
배꽃웃음
겨우내, 앙상한 손가락으로
구름을 애무하던 잔가지들
아지랑이 꼬물꼬물 아, 지렁이 꿈틀대는 산비탈에서
구름 부스러기 뒤집어쓰고 희희낙락하는 허수아비다.
봄비에 미끄러져 꽃비 될세라 편 팔 오므리지 못한다.
가지마다 휘영청 꽃등 켠 배나무
뒷덜미 껴안는 달 보기 부끄러워
왼 고개 틀고 먼발치만 바라본다.
우르르, 꽃구름 떠밀리며 배 밭에 쏟아지고
뭉게뭉게 포개지며 한바탕 배꽃웃음 웃는다.
▶ 소감
지구 한쪽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다른 쪽에서는 건조한 날씨로 몇날며칠 산불이 계속되어 수 백 년 된 산림이 잿더미로 변했다. 인간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자연 앞에서는 무기력할 때가 많다. 사람을 비롯하여 자연의 본질이나 내면을 시로 표현한다한들 얼마나 잘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내 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주 한계에 부딪힌다.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시를 쓰거나 퇴고하는 순간만큼은 세상 시름 다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무얼 하면서 이렇게 순도 100%로 몰두했던 적이 있던가? 단어 하나, 조사 하나, 문장 하나를 수십 번씩 뒤집고 바꾸어 본다. 그 시간이 참 행복하다. 또한, 부족한 내 시를 지지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몇 명의 친구들이 있어 더욱 행복하다. 이것이면 됐다.
나는 자동차를 출퇴근용으로 한정하여 운행한다. 스스로 초보딱지를 매기고 몇 년 째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초행길이면 퇴근 후 차를 집에 두고 가거나, 전철역 근처 공용주차장에 두거나 한다. 며칠 전, 지인이 직접 만든 걱정인형을 선물로 주었다. 이제 근심, 걱정을 그녀에게 맡기고 좀 더 용감해져야겠다. 많이 모자란 내가 과분한 계간지 작품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계간지 작품상이 내면 및 외연 확장의 물꼬가 되었으면 한다. ‘시’라는 만만찮은 자갈길에 고물차의 펑크를 때워주고 밀어 줄 동행이 있어 고맙고 든든하다. 막비시동인과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외현 |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시집 『안심하고 절망하기』/계간 《아라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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