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계간지작품상
2024년 제11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자 최서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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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 출생.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물은 맨살로 흐른다』,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
수상작
농아학교
봉사활동 차 농아학교에 들르는 날 비가 내립니다.
대화 중에도 창밖으로 동글동글 동그랗게 내립니다.
한 아이가 도화지에 줄기차게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동그라미 속에 엄마 강아지 나무 풀꽃들이 있습니다.
이름 부를 수 있는 것들이 가득 담긴 동그라미입니다.
어떤 이름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동그라미입니다.
입을 닮은 동그라미이고 말 같이 생긴 동그라미입니다.
동그라미마다 따스한 빗방울 촉촉하게 머금고 있습니다.
-2023 시와사상 여름호
똥잔치
반려견이 풀에 똥을 눈다.
풀은 너울너울 풀잎을 넓혀가며 똥을 받는다.
멀리서 지켜보던 바람이 킁킁하더니 냄새를 퍼나른다.
햇살은 더 익혀야 구수하고 바싹하다며 쭈그리고 앉는다.
돌틈 민들레는 고개를 비스듬히 얹어놓고 시치미를 뗀다.
파리는 고명처럼 떡 하니 앉아 잔칫상을 벌인다.
개미들은 구경나온 독수리팔랑나비, 보라금풍뎅이, 무당벌레를 맞느라 땀투성이다.
햇살이 흩어질 즈음 남사당 하루살이 떼 상모 돌리며 개똥벌레를 불러온다.
-2023 시에 겨울호
(심사평)
체험에서 우러나와 체험으로 이어지는 연민의 시, 공생의 삶
2024년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리토피아》 수상자로 최서연 시인을 선정하였다. 최서연 시인은 2014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물은 맨살로 흐른다』와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명예퇴직을 해도/30여 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아침이면 시간에 맞춰 헬스를 나간다.”는 최서연 시인은 “폭염에” “꽃을 내밀지 않는” “코스모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폭염에 서 있기만 해도 넘치는 일인데/당신은 시인이라며/시 한 편 썼냐고” 되레 “묻는” 질문 앞에 “이때만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귀가 순해지는 나이”(이상 시집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에서 인용)의 시인으로 늦깎이 시인이자 인생 2막의 삶으로 시업을 선택한 시인이다. 이 앞선 시집의 많은 시들에서도 시인은 뭇 생명들을 벗 삼아 살아가는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쌓인 연륜과 경험에 매여서인가 시선이 너무 여유롭거나 관조적이었다면, 시인이 최근 보여주는 시선들은 되려 삶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 있는 듯하다. “비가 내리는” 날 “봉사활동 차” 들른 “농아학교에”서 “한 아이가 도화지에 줄기차게” 그리는 “동그라미”를 보고 “입을 닮은” “말 같이 생긴” “동그라미”로, “이름 부를 수 있는 것들이 가득 담긴” “어떤 이름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동그라미”로 상상하는 것은 체험에 바탕을 둔 연민의 시선 없이 관찰의 결과로서만 단순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선정된 시 「똥잔치」에서도 시인의 시선은 역시 관조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지 않다. “반려견이 풀에” 눈 “똥을” 두고 벌이는 잔치를 보자. 이 시선에는 시인이 소망하는 공생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한 생을 다 살고 새롭게 시작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시작에서의 성찰이 다시 새로운 체험으로 순환되는 과정은 아름답다. 시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소감)
첫 문장을 기다리며
학창시절에 문예지를 보고 내 시가 페이지 한쪽에 나올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하고 막연한 꿈을 꾸었습니다. 촉촉하고 여리고 말랑말랑한 그 꿈이 피지 못하고 마른 냄새가 나던 어느 날 폐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오진)을 받았습니다. 그때 죽음은 두렵지 않았으나 시인이란 말을 못 듣고 죽는다는 것이 더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함이 닿았는지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 시를 배웠고 시인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시인들이 받는 상 중에 전국계간지작품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국계간지작품상에 올라온 시를 읽으면서 나도 저런 상을 받을 날이 올까? 했는데 10년 만에 받게 되었습니다.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시 쓰는 일이 무덤이라 한 시인을 만나고 쓰다가 죽으라던 시인도 만났습니다. 백지만 보면 벌벌 떨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을 두드리며 첫 문장을 기다릴 때 저는 가장 설렜습니다. 좋은 시는 나오는 순간 움직인다고 합니다. 반면 자족하는 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메니에르 귓병 후유증으로 잘 듣지 못합니다. 허나 어쩜 잘 듣지 못하는 것이 시를 쓰는데 오히려 큰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물과 사람의 소리에 더 간절히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족이부족이 아닌 부족지족한 소통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고 자연과 합일하며 시로 숨 쉬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상을 받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리토피아 회원들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 시의 첫 독자인 남편에게 이 상을 받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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