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계간지작품상
2021년 제8회 전국계간지 작품상 수상자 허문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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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허문태 시인
수상작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작년 봄 벚나무가 유행에 맞춰 신상을 출시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아 큰 손해를 봤다. 심플한 겨울 디자인에서 벗어나 화사하게 꽃무늬를 놓으면 천리 먼 길도 달려와 한 아름씩 구매해 갔는데, 올봄 월세도 못 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세상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 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것을 통해 슬픔과 기쁨이 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도통할 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환하게 보았으니 심미안이다.
매화도 산수
유도 올봄 온라인으로 판매방법을 바꾸었다. 벚꽃도 목련도 조회 수를 늘리느라 생가지를 뚝뚝 부러뜨린다. 비대면 세상에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데 뒷산 진달래는 올봄도 천하태평이다. 작년에도 견뎠는데 올 한해 못 버틸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2021년 봄 미네르바
수상작
노을
노을은 사랑을 정산하라고 내미는 청구서다.
바닷가를 걸으며 그녀가 한 말이다.
다짜고짜 사랑을 정산하라고 하면
늘 하던 대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다짜고짜 노을이 되라고 하면
멍하니 바다만 쳐다볼 수밖에
가을날 들녘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는 빈 지게에 노을만 가득 지고 오셨다.
한가득 지고 온 노을을 부엌에 쏟아 놓으면 저녁 밥상에도 노을만 그릇마다 가득했다.
아버지의 노을 한 방울이 뚝 코끝에 떨어진다.
이제 그만 일몰이 아닌 노을이 되라 하면
감사하다고 할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할까.
바닷가에 앉아 노을을 보고 있다.
이름 모를 검은 새 한 마리 노을 속을 날아간다.
노을에서 진한 지폐 냄새가 난다.
-2020년 가을 시와정신
당선소감
부족하다. 2%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몇 배 더 부족하다. 생긴 것도 부족하고, 가진 것도 부족하고, 생각도 부족하다. 노력도 부족하고, 열정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하다. 슬픔도 부족하고. 아픔도 부족하고. 고뇌도 부족하다.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술 마시는 것과 노는 거다. 그마저도 술로 병을 얻어 술을 마시지 못하니 그 또한 부족하다.
시도 부족하다. 부족해서 고치고 또 고친다. 문예지에 발표한 시도 부족해서 시집 낼 때 다시 고친다. 시집에 시도 부족해서 다시 고친다. 분명코 부족한 사람이다.
부족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부족함을 채우라고 상을 준다. 부족함을 채우고 나면 또 얼마나 부족할까? 감사하다. 부족해서 감사하고 부족해서 살맛이 난다.
심사평
시의 위의(威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
시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것은 항상 소여(所與)인 그 자체로 ‘언어’일 뿐이다. 언어를 둘러싼 외곽, 특히 언어 대중이 직접 겪는 현실 상황은 시작(詩作)에서는 언제나 언어라는 매개를 통과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함축할 수 있는 언어적 정비가 끝난 이후에 본격적인 시작의 장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 방향을 주장할 수도 있다. 시가 압도적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구멍, 혹은 흔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어느 쪽이든 시작은 결국 현실의 충실한 자기 반영이라는 측면을 인정한다.
허문태 시인은 「노을」을 통해 유년의 경험을 반추케 하는 자연 작용을 자신의 현재로 끌어와 “다짜고짜 사랑을 정산하라고 하면/늘 하던 대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다짜고짜 노을이 되라고 하면/멍하니 바다만 쳐다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어떤 독자는 “노을에서 진한 지폐 냄새가 난다”를 공감하기 힘든 개별 상황에 묶어두고 싶겠지만, 아름다운 현상 앞에서 결핍을 상기하는 것은 오래 훈련된 존재에겐 인지상정과 같다. 시인은 다른 작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에서는 전염병이 만연해서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현상과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기법들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시인이 알레고리를 통해 이 사태를 객관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즉 언어의 힘을 통해 사태에 대한 인식의 폭을 스스로 확장하고자 기도한다.
상은 왜 주는가? ‘전국계간지작품상’의 전체 취지까지 확장하지 않더라도 《리토피아》는 창간의 방향에 맞춰 시의 진정성과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작품성’의 중요 요소로 본다. 이 원칙적인 기준에 비춰볼 때 허문태 시인의 이번 수상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을 뿐이다./장종권, 백인덕, 남태식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계간 아라문학 부주간.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시집 '달을 끌고 가는 사내'. '배롱나무꽃이 까르르'
신작시
길바닥에 버려진 종이상자 보거든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유전자가 네 몸에 흐른다.
하기 좋은 말이라고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고,
발로 팍팍 차시오. 그냥 구둣발로 팍팍 차보시요.
운동화를 신고 차도 좋고, 축구화는 더욱 좋지요.
팍팍 차는 것도 좋지만 뻥뻥 차는 것이 더 좋아요.
대문까지 차고 가서 대문 앞에 그냥 내버려 둬요.
아무나 골목길에서 뻥뻥 차고 다니게 내버려 둬요.
축구공이 되겠다던 내 꿈을 당신이 꼭 이뤄 줘요.
소아마비로 왼발을 심하게 절던 초등학교 때 짝궁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하는 게 소원이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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