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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조선일보 (그와 나 사이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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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9-10-14
[수도권] 근·현대 문인들의 마지막 안식처
박인환·한용운·이중섭·방정환…
중랑구 망우리공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공동묘지'로만 알고 있다. 묘소가 모여 있는 곳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그 음습한 공동묘지는 아니다. 산자락을 돌아가는 약 5.2㎞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멀리 북한산 아래 펼쳐진 서울의 모습부터 팔당댐 부근까지 굽어볼 수 있다.
산책로에는 '사색의 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 시간 남짓 나무 그늘 사이를 걸으며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발길을 옮기면서 우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을 비명(碑銘)으로 만날 수도 있다. 1만7000여명의 혼(魂)이 세상 근심을 영영 잊고 잠들어 있는 곳, 중랑구 망우리공원 이야기다.
◆5.2㎞ 산책로와 '문인들의 마지막 안식처'
- ▲ 박인환 시인의 비석. '목마와 숙녀'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채민기 기자 chaepline@chosun.com
지난 9일 오전 11시쯤 망우리공원 관리소에서 용마산 방면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20여명이 산책로 옆 비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근처에 시인 박인환의 묘소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중랑구에서 세운 비석이다.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인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서울문화재단에서 매월 둘째주 금요일 진행하는 '문학 탐방'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다. 문학 탐방 강사인 시인 김경식씨는 올해 마지막 답사인 이날 코스로 망우리공원을 택했다. 그는 "20여년간 전국으로 문학 답사를 다녔는데, 지방의 문인 생가에서 '묘소는 망우리에 있다'는 설명을 볼 때가 많았다"며 "묘지라는 선입견 때문에 망설였지만 역사적·문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어서 코스에 포함시켰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 주제는 '문인들의 마지막 안식처'다.
박인환 시인의 묘소는 비석 아래로 오솔길을 따라 50m쯤 내려간 곳에 북한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야트막한 봉분 앞에는 '시인박인환지묘'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역시 시인의 대표작인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글씨는 흐릿했다. 한 참가자는 "'세월이 가면' 노래는 잘 알아도 묘소가 여기 있는지는 몰랐네"라고 말했다.
답사는 화가 이중섭, '백치 아다다'를 쓴 소설가 계용묵, '님의 침묵'을 남긴 한용운,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의 묘소로 이어졌다. 묘소에 먼저 묵념을 하고 김 시인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중섭은 화가지만 구상 시인 등과 어울렸고, 문인들이 낸 시집의 표지화를 많이 그렸다"는 설명이다.
오후 2시30분쯤 '어린이의 동무'라고 적힌 방정환 묘소의 비석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답사는 마무리됐다. 답사에 참가한 이영숙(45·부천시 상동)씨는 "친절한 해설 덕에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고,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천천히 걷기에도 좋았다"며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많이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이중섭 그림은 화랑에서 수억원에 팔리지만 그의 묘소에는 찾아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다"며 "이제는 눈에 보이는 작품은 물론이고 작가의 삶과 죽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공동묘지가 아니라 역사공원
- ▲ 지난 9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서 김경식 시인(맨 오른쪽)이 화가 이중섭 묘비 앞 에서 이중섭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채민기 기자 chaepline@chosun.com
망우리공원에는 이날 답사 코스에 포함된 5명 외에도 우리 근·현대사에 발자취를 남긴 이들의 무덤과 비석이 곳곳에 숨어 있다. 시인 김상용, 소설가 최서해, 가수 차중락,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가곡 '그리워'의 작곡가 채동선, 서화가 오세창, 독립운동가 오재영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묘지는 산책로를 중심으로 산비탈에 흩어져 있다. 참배객이 두고 간 꽃이 놓인 방정환의 묘소부터 봉분의 맨흙이 드러나고 군데군데 잡초가 박힌 계용묵 묘소까지 관리 상태도 제각각이다.
지난 4월 '망우리공원 종합 안내도'라 할 만한 책이 나왔다.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지음)란 책은 망우리공원에 묻힌 40여명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묘소의 위치를 표기한 지도도 실려 있다. 책을 펴낸 출판사 '골든에이지'의 박종평 대표도 이날 답사에 참가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혐오시설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역사 공원"이라며 "좀더 많은 사람들이 망우리공원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답사에 참가한 이희원(55·상도동)씨도 "묘지로 문학 탐방을 간다기에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와서 보니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며 "책으로 읽던 위인들의 묘소가 많이 남아 있어 잘 보존하면 좋은 문학·역사 공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망우리공원은
중랑구 망우산 일대가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다. 2만8500기의 묘소가 들어설 때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묘지였으나 1973년 매장이 금지된 이후 이장이 꾸준히 진행돼 현재 1만7000여기가 남아 있다. 도산 안창호, 고하 송진우, 명창 임방울 등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가 국립묘지 등으로 이장됐다. 면적은 83만2800㎡으로 산 중턱에 조성된 산책로가 인근 용마산·아차산의 등산로와 연결돼 있어 등산,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자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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