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 시인의 세계
遲刻(지각)합시다/이명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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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읽는 김구용 시인
遲刻(지각)합시다 이명구
어느 때인가 모시고 술을 들 때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손을 꼭 잡으시더니, “우리 되도록 遲刻하십시다. 꼭 그렇게 하십시다.” 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나는 무슨 말씀이신지 얼핏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하여, 그저 “네, 네” 하고 우물거리고 말았다. 애매하게 “네, 네” 라고 대답하는 것을 이내 알아차리셨는지, 선생은 이제 좀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누구나 다 한 번은 저승에 가게 마련인데, 우리는 되도록 천천히 가십시다. 좀 지각해서 가자는 말씀이요. 남보다 앞질러 먼저 갈 필요는 없지 않아요” 라고 풀어 이야기를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지각하자는 뜻을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바 세계를 살아간다는 일이 반드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佛家에서 말한 대로 生·老·病·死라는 말을 생각하면, 이 사바 세계는 老며 病이며 하여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괴롭기조차한 곳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生이란 단 한 번만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 귀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누구나 死라는 사실에 부딪히게는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힘없고 가날픈 生이라 하여, 그리고 어느 때이건 死에 도달해야만 하는 生이라고 해서 生을 소홀히 하거나 단축시킨다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다. 아니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끼고 보람있게 지내야 할 生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용선생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佛敎徒라고 했다. 선생은 그 초연한 입장에서 生과 死를 담담히 바라보고 계신 것으로 느껴진다. 어차피 死에 이르며 永生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승의 生이기는 하지만, 또 말하기를 人間苦海라고도 하지만, 한번 얻은 生은 누릴 수 있을 때까지는 조용히 담담하게 누려야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선생은 鶴과 같은 분이라고 하였고, 또 愛酒, 愛煙 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흔히 술이나 담배가 결코 몸에 이롭지 않다고는 하지만, 선생의 경우 무척 건강하시고 강단이 있으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악수를 해보면, 선생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센 힘이 솟아날까 하고 의심이 날 지경으로 힘이 강하시다. 타고나신 건강이요, 강단이겠지만, 선생은 오래오래 壽를 누리실 것이다. 그래서 선생 말씀마따나 틀림없이 지각하실 분이시다. 그래서 더 많은, 더욱 주옥같은 詩를 이 땅에 남겨주실 분임에 틀림이 없다.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이 延命을 빌다가 일이 그릇되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悠悠蒼天아 曷其有極가.”(푸르른 하늘이여, 그 어찌 끝이 있으리오)라고 외치는 구절이 있다. 정말 창천에 비해 인생은 有限의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유한이 최대한으로 길어질 수는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선생은 壽를 한껏 누리시다 지각하실 분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선생의 詩作은 그 유한을 넘어서 무한으로 이어질 것이다.◑
구용 서체쭗 최진원
어느날 金琇成氏가 연구실에 들렀는데, 구용의 두 폭 글씨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화제는 「丘庸 書體의 변화」에 두어졌다. 왈, “지금의 丘庸 글씨는 너무나도 특이하여, 그 眞趣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든다. 그런데 20년 전의 글씨(只有山房詩)를 보면 선비글씨의 단아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서체가 변하였을까” 라고, 대략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나는 “20년 전의 구용 글씨를 알려면 이것을 볼 필요가 있다” 라고 하면서, 표구하지 않고 보관해 두었던 敬亭山詩의 글씨를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김수성씨는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이것은 자기가 표구해 오겠노라 하면서 가지고 갔었다.
얼마 후에 표구가 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인사동에서 만났다. 어느 한옥 음식점에 들러 그 족자를 대청 벽에 걸어 놓고서, 그것을 감상하면서 술을 마셨다. 이때 姜洪基氏가 동석하였다. 밤 11시가 지나도록 3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중심은 구용의 글씨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저 拙한 듯한 점은 추사체에서 시사 받은 것이 아닐까. 崎챍하다고 할 정도의 저 運體(屈曲)은 西山(휴정)體를 본딴 것이 아닐까. 하여튼 선비글씨의 안아함과는 다르다. 枯槁한 듯하면서도 분방한 듯, 愚한 듯하면서도 達한 듯한 서체는 문외한으로서는 감상하기 어렵다. 그럴수록 저 족자의 서체가 더더욱 주목된다. 구용의 20년 전 서체를 향수적인 느낌으로 過眼하게 되어 기쁘다” 라고. 이럭저럭 술이 大醉되어, 나는 술김에 망언을 내놓았던 것이다. 왈, “구용 서체는 중국의 陳鴻壽體를 點化한 것이 아닐까. 하여튼 그 특이한 필법을 ‘구용체’라 부르고 싶다” 라고.◑
白華室日記쭗 강신항
우리 같은 문외한은, 詩를 잘 모른다. 만일에 내가 소설을 썼다면 주인공의 손자까지 어떻게 되었다고 써야만 직성이 풀릴 터인데, 시는 잘 모르는 데다가, 선생의 시처럼 심오한 뜻이 압축되어 담겨져 있는 시의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선생의 일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은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문학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이 일기지.”
그렇다면 시도 모른다면서 ‘가장 훌륭한 문학’인 시를 알 만하다고 말한 것이 좀 지나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내가 선생의 일기를 처음 읽어본 것은, 역시 제1차 안동문화권 학술답사 기행문을 일기 형식으로 쓰셔서 「성대신문」에 연재한 글이었다. 처음 대해본 선생의 일기문은, 시 같기도 하고 산문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증도 나오고 대화도 나오며, 옛사람의 행적도 나와서 비록 일기 형식이지만 훌륭한 기행문이기도 했다.
나같은 俗人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일기를 쓸 겨를도 없거니와 모처럼 일기를 쓴다는 것이 아침에 학교에 갔다, 열 시에 회의에 참석했다, 하오에 복통이 났다, 등등 겨우 몇 줄 쓰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고작인데, 선생의 일기체 문장은,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갈고 다듬고, 줄이고 덜고 하여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글들이었다. 이런 글은, 그 뒤 몇 차례, 이곳 저곳에 발표된 일기를 통하여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과연 선생은 시보다도 더 일기를 중시하고 계신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 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선생의 일기문 속에 등장했는지 헤아릴 길은 없으나, 만일 단 한번이라도 등장했다면 늘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同時代人’으로서의 자격이나마 있는 것인지, 너무나도 부족한 나 자신을 잘 알기에 오직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跋文은 써 놓고…쭗 최남백
결국 수술을 잘하는 M박사가 있는 신영병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하는 날 선생께서는 기진 상태로 들것에 누우셔서 앰블런스로 옮겨타셨는데 이웃부인들이며 아이들이 여럿 나와서 지켜봤었다. 스산한 느낌이 들었었다.
드디어 수술이라…. 몸에 칼 대는 걸 몹시 싫어하시는 성격인데 이제는 체념을 한 듯 쓰다달다 아무 말씀이 없고 내가 의자에 앉은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연신 “가 보라”고 재촉만 하셨다.
재촉에 못이겨 내가 일어서자 선생께서 具女史를 향해 손짓을 하며 말씀하셨다.
“원고 가져 가시오.”
“네?”
“식민지 발문 써 놨어요.”
―설마….
동아일보 창간 50년 기념 소설 모집에 내가 「식민지」를 응모해서 당선이 되었고 연재가 끝나서 휘문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을 하는데 先生께 발문을 써 줍시사 청을 드려 놓았던 것이다. 미처 글이 되기 전에 병이 나셨기 때문에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발문이고 뭐고 그런 걸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냥 갈 수 있소. 발문은 써주고 가야지….”
“….”
나는 가슴이 울컥했다. 구여사가 건네주고 원고를 흘낏 보니 선생의 글씨가 아니다. 어젯밤 오늘 수술한다는 의사의 통고를 받고서 아침에 선생께서 구술하시고 구여사께서 받아쓰셨다는 것이다.
“내 유서요….”
선생께서는 짐짓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 별 말씀을….”
나는 기껏 그런 소외를 했다. 기왕에 몇 번 되풀이한 말이긴 했다. 입원전에도 대략의 낌새는 눈치채신 듯 나를 혼자 불러 “내가 죽거든…” 운을 떼시곤 했던 것이다.
발문 원고를 받아 품에 품고서 병실 문을 나선 나는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웬수야쭗 강계순
그분이 “이 웬수야(원수야)”를 부르짖으시며(?) 옆에 앉은 제자나 후배의 손을 아프게 잡고 비틀면서 그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하면 우리는 대책없이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미 오랜 세월 그분을 지켜보면서 ‘이 웬수야’ 라는 말씀 속에 담긴 그분의 애정이나 한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넓게는 시를 쓰고 있는 모든 젊은 후배에게 그분이 갖고 계시는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끈끈한 눈물이 “웬수야” 속에 함축되어 있는 줄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아마도 그 대책 없는 사랑의 고백을 들으면서 더욱 깊이 그분과 밀착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일의 고달픔, 갈등과 분노, 소외와 절망, 그리고 걸맞지 않는 이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아픔과 쓸쓸함이 어찌 그분 혼자만의 문제일 수 있을까, 우리가 모여서 술을 마실 때 어쩌다 그분의 사정으로 함께 자리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한편 홀가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운하게 생각이 된다. 왠지 약주가 올라 좀 흐트러진 채로 비틀거리면서 이 자리 저 자리로 건너다니는 그분의 가늘고 긴 다리에서 헐렁거리는 바지를 보거나, 간간히 “웬수야”를 독백하시면서 이를 맞물고 흔드는 모습을 보아야만 그 좌석이 어울릴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이런 것들이 소위 서로 길들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성균관 대학교 동문이나 시단의 몇몇 후배들) 모임에는 언제나 그분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결코 그분은 문단의 어느 곳에서도 대표자이거나 중심적 역할을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 택하신 길이므로 굳이 그런 자리에 모시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은연 중의 묵계같은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그분이 문인협회의 이사장이나 어떤 문단단체의 회장 감투를 쓰고 계시다면 좋든싫든 자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무슨 무슨 회의에 참석해야 되고 또 무슨무슨 스피치를 해야 되고, 더구나 약주가 취해서 아무나 붙들고 ‘웬수야’ 소리도 못하실 것이 아닌가.
좋아하는 몇몇 문인들과 앉아서 잘 들리지 않는 귀로 그래도 들으실 것은 다 들으시면서, 취하신 체 하시면서 하실 말씀은 다 하시고 반쯤 눈을 감고 계시면서 보실 것은 다 보시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은 아마도 우리 단골모임만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또 그런 그분의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결국은 우리들에 한정되어 있을 텐데, 만일 그분의 비틀거리고 꼬집고 흔드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그분이 나서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말려야 할 일 중의 하나일 것 같다. 그러나 그분은 시단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곧잘 발휘하신다.세상을 피하는 듯하면서 살고 계시는 그분의 시와 말씀은 동료나 후배들에게 상당히 큰 비중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 비중은 순순한 시인의 영역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그분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난 것이라 믿어진다.◑
돈암동과 명륜동, 두 팔 사이의 세계쭗 배재균
3∼4년 전 쯤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늦가을 저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옅은 회색 바바리코우트 차림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주점에서 마신 술로 엔간히는 얼큰했습니다만 선생님은 제 손을 꼬옥 잡고 “배재균 씨 우리 한 잔만 더 합시다.”며 끌고 들어간 데가 바로 그 ‘돈암동 골목 포장수레’였습니다. 대화는 무척 길었습니다.
“…알고서는 모르느니/ 모르는 믿음을 아는 일이다./ 아아 한 몸(身)이신/ 千手千眼…”을 비롯하여 “자네가 아는 것만 아는 한/ 그 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승이 전부가 아니듯이/ 저승도 전부가 아니듯이/ 合掌하여/ 두 팔 사이의 세계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림자는 물이 흘러…” 등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되도록 모르는 일을 생각하며/되도록 아는 일을 차별말며/ 천한 이름을 천하게 마소서./ 쓸쓸한 이름을 쓸쓸하게 마소서.”도 있었습니다.
“…아무 할 말도 없을 때/ 귀에 들리는 對話는/ 네가 바로 나,/ 없는 것이 있는 것….”(이상 「頌 百八」에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알꺼나/ 내 마음 아느니, 나뿐이로세/ 아직도 두려운가/ 한 번 마음하면 부처님도 되느니, // 아들아, 보람을 찾아라/ 넘어서 못넘을 산은 없느니.”(「내 마음」)
또 “폐허의 해바라기를 보게나./ 내 마음에/ 復活하신 어머님은/ 관세음보살./ 그 圓光을 받아/ 무성한 그림자는 어머님을 감돈다./ 꽃술의 금빛 反射는/ 내 前生,/ 밤의 종소리.”(「해바라기」)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진지하게 열을 올리셨습니다.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나의 눈물은/ <그대의 고운 마음이 어째서 나를 울리는지>/ 그 이유처럼 알 수가 없다. // 나의 사랑은/ <등불이 어째서 어두움을 녹여 버리는지>/ 그 이유처럼 알 수가 없다. // 나의 기쁨은/ <침묵의 잎 사이에서 어째서 꽃이 웃는지>/ 그 이유처럼 알 수가 없다.”(「理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구름 위에 해는 있었읍니다./ <아무 생각을 마십시요>/ 과연 버릴 수 있을까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때/ 돌(石)일 수 있을까요…”(「不協和音의 꽃 1」)
“관세음보살, 별로 소원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하고 입속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 정도로 심심하지 않다./ 비극에 몽그라진 연필만한 승리를 세우지 마십시오. 때가 오거든, 이 몸도 가을잎처럼 별(星)이게 하십시오……”(「9월 9일」)쯤으로 끝내고 한바탕 웃은 것 같습니다. 물론 月灘 선생님의 후덕하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요.
선생님의 작품에 나온 것이 바로 대화 아니었겠습니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고선 선생님의 詩구절만 인용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런 정도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소주 한 병이 끝나가자 선생님은 냄비국수 둘을 또 청했습니다. 한사코 계산은 선생님이 하셨어요. 그리고 포장 수레를 등지며 걸어나오다가 선생님은 제게 버스 토큰 한 개를 한사코 쥐어 주셨습니다. 정릉동 제 집까지 돌아가는 길을 걱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자상하신 心德을 저희들이 언제 모두 배우게 될까요?
“귀마저 멀어서 이제부터야 들리어 온다.”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제부터 선생님께로 들려오는 것으로 저희들을 다시 일깨워 주시기 바라옵니다.◑
호수같은 선생님쭗 배인환
첫 강의 시간 첫 번째 뵌 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인상이 깊었다. 선생님은 들어오시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나가셨다. 그 시간이 아주 짧아서 1분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같은 과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 소개를 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선생님과의 첫대면은 이렇게 좀 어설프게 끝났다.
선생님은 그 다음주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자세히 본 선생님의 첫인상은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는 분 같았다. 좀 검은 얼굴이지만 골격이 섬세하고 살이 없으며 눈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나이보다 젊어보였다. 이 시간부터 선생님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어디서 그렇게 해박한 지식과 기지와 유우머가 쏟아져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마디로 명강의였다. 그후 나는 영문과 학생이지만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면 4학년이 배우는 강좌든 뭐든 염치불구하고 강의를 신청해서 들었고 신청하지 못할 경우에는 도둑 강의를 들었다.
중고등학교 때 막연히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소월의 시 정도와 소설만 읽던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아뽈리네르, 막스 작꼬프, 발레리, 릴케, 엘리어트, 오든 등과 다다, 큐우비즘, 쉬르레알리즘 등을 배웠고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시인들과 이상, 낭만주의 시인들, 또 한용운과 김광균에서 전봉건까지 알게 되었다. 어쨌든 선생님께 배우면서 이 세상에 문학밖에 할 것이 없구나 하는 여간해서 완치 안 되는 문학병이 들고 말았다.
(중략)
그후 서울에 올라갈 때면 선생님댁을 방문하고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소설가가 되도록 사사할 대가를 소개해 주셨고 또 바쁘신 중에도 그 집까지 인도해 주셨다. 내딴에는 열심히 공부했으나 워낙 재주가 없는 데다 교직의 고된 업무량에 밀려 마음뿐이고 항상 미루어졌다. 나이는 자꾸 먹어갔다. 나는 절망했고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문학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선생님을 찾는 일도 없었다. 그때 선생님이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금산을 방문해 주셨다. 눈물이 날 정도로 모두 고마왔다. 선생님은 대전에 오셨다가 모두 뿌리치고 금산까지 시골길을 오셨다는 것이다. 순전히 불쌍한 제자인 나를 생각해서였다. 이 방문이 바로 나를 소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날밤 시장 근처 허름한 막걸리집 목로에서 선생님과 술을 들고 거리를 거닐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 별들의 반짝거림이 시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시공부를 시작했고 퇴색한 원고뭉치를 뒤적이며 노트를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의 몇 안 되는 추천 시인이 되었다. 아무 재능도 없는 내가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생님의 은덕이다.◑
진정한 예술가의 마음가락쭗 현길언
제주는 관광지로서 누구나 드나드는 곳이어서 선생이 찾아오신 일이 별로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선생의 새로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지금도 그것은 가슴에 꿈틀거리면서 남아 있는 것이다.
선생과 동행한 K형의 말에 의하면, 선생께서는 제주 공항에서 내리시면서, 여장도 풀지 않고 곧장 秋史가 7여년 동안 적거생활을 하였던 제주 서쪽 大靜고을로 달리셨다니, 그분의 추사에 대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제주에 살면서도 추사에 대하여서는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 귀양 와서까지 붓글씨를 쓰고 제자를 가르칠 수 있었던 여유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초가지붕과 노송이 배치된 歲寒圖의 복제품을 보면서 “그 바람이 거센 대정 벌판을 지나면서, 이곳에서 바람과 수선화 향기에 묻혀 고독하게 살았던 한 예술가의 숨결을 생각하였지.”
선생은 막걸리잔을 드시면서 가슴 깊숙이서 토해내듯이 추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그래도 추사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갖고 있지만 그걸 내세우지 않아.”
추사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이따금씩 그의 가짜 작품을 자랑삼아 감정해 달라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곤혹스러운 경우가 없다고 웃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추사에 미쳐 많은 돈을 주고 가짜 작품을 샀을 때의 그 심정도 털어놓으시곤,
“그래도 그 가짜 덕분에 내가 추사에 대한 눈이 밝아졌으니….”
다시 웃으시기도 했다.
그런 말씀을 듣는 동안 나는 문득 한 시인이 한 예술가에 쏟는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선생께서 大靜 秋史 적거지를 돌아보신 다음에, 그 반대쪽에 있는 朝天이란 마을에 와서 추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B씨를 찾아가서, 그 작품을 잠깐 구경하자고 한 시간 넘어 사정을 하였어도 끝내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들었을 때 더했다. 그 딱 한번 보고 싶었던 추사의 작품에 대한 애정에서,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의 가락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렇게 사정을 해도 보여주지 않는 그 사람의 추사 작품을 그렇게까지 아끼는 데 오히려 흐뭇하더라는 말을 하였을 때는, 소유욕을 떠난 예술가의 작품을 진정 사랑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詩人 丘庸氏의 일일쭗 조건상
신문을 밀쳐놓고 丘庸氏는 연적에 물을 따른다. 시집을 출판한다고 題字를 부탁한 R시인과 K시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요즘 따라 제자를 부탁하는 문단의 젊은 시인들이 부쩍 늘어나서 일일이 응해주자니 그 뒤치다꺼리가 조련치 않고, 거절하자니 박정한 듯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구용씨인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쓴 제자들이 마치 자신의 소중한 분신처럼 수많은 책자의 표지 위에서 각양각색의 포즈로 자리를 잡고 있을 생각을 하면 一劃一字에 온갖 신경이 다 씌이는 구용씨였다.
이윽고 먹이 갈리고 화선지가 펼쳐지자 힘줄 솟은 구용씨의 손에는 월척을 낚아채려는 순간의 釣士처럼 찌르르 전류같은 힘이 흐른다. 그리하여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한참을 뒤척인 붓 끝에 묻어 古拙한 丘庸體로 <以文得朋>이 나오고 <寶光自在>가 태어난다.
잠시 붓을 놓고 은하수 한 개비를 감로수처럼 빨고 있는 구용씨의 귓가에 귀뚜라미 울음소리처럼 전화벨이 울린다.
“네에―”
‘여보세요’ 대신 ‘네에―’를 쓰는 것은 구용씨의 전화 받는 습관이다.
“오후 5시경이면 좋지요. ……옳지요, ……옳지요, 네에―, 옳지요, 그런데 ‘초정’은 이사갔지요, 현대빌딩 뒤쪽으로요, ‘청노루’는 젊은이들한테 자리를 뺏겼어요. ‘대호집’이 어떨까요, ……옳지요, 옳지요, 그럼 그 시간에 나가지요, 이따 뵙지요.”
‘옳지요’가 태반인 구용씨의 통화 내용을 옆에서 들으면 마치 무슨 암호같기만 하다. 그런데 구용씨의 손에 들린 꽁초 끝에서 아까부터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길쭉한 담뱃재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에 드디어 힘없이 허리를 꺾으며 방바닥에 허물어져 떨어진다. 구용씨는 오른손 인지 끝에 침을 발라 담뱃재를 조심스럽게 낚아 올려 재떨이에 담는다.
마무리된 詩 두 편을 각각 봉투에 따로 넣고, 題字 두 장도 봉투에 각각 넣어서 ××문학사 귀중이니 ×××詞伯이니를 역시 구용체의 구불구불한 자획으로 겉봉에 써서 책상머리에 가지런히 얹어놓고 구용씨는 은하수 담배갑에 또 다시 손을 뻗는다.
그때 마루에 매달린 벽시계가 12시를 친다. 구용씨는 조건반사적으로 갑작스런 시장기를 느낀다. 오늘은 국수일까, 수제비일까. 구용씨는 부엌 쪽에 귀와 코를 모아 본다. 궁금하고 초조하다.
(중략)
맥주가 왔다. 조개탕도 들어오고 파전도 들어와서 김치와 나물을 비롯한 기본 안주와 함께 이것들은 상 위에 그들먹하게 자리를 잡았다.
맥주의 첫잔은 언제 마셔봐도 일품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구용씨는 벌컥벌컥 첫잔을 비웠다. 두 번째 잔은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젊은이들은 두 번째 잔도 벌컥벌컥 비웠다. 젊은이들의 세 번째 잔이 구용씨에게 차례로 건너왔다. 마시고 건네고, 또 받아 마시고 건네고, 몇 차례 분주히 술잔이 오가다 보니 좌중은 배도 부르고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용씨의 음주 속도는 취할수록 빨라지는 습벽이 있다. 술잔이 웬만큼 돌고 돌아서 누구의 잔이 누구의 잔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뒤바뀐 다음부터는 젊은이들의 음주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 반면에 구용씨의 음주 속도는 현격히 올라가서 방금 가득 채운 구용씨의 술잔이 담배 한 모금 빨다 보면 거짓말처럼 반으로 줄어들어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가 구용씨의 단정한 앉음새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조개탕 국물 두 숟가락에 맥주 서너 병씩 마시는 불균형의 음주벽이 구용씨의 단정한 앉음새를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용씨는 우선 남녀를 불문하고 옆사람의 손목을 더듬어 쥐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걸 비틀거나 쥐어짠다. 잠시 후엔 그걸 입에 대고 모질게 깨문다.(물론 시늉뿐이지 아프게 깨물지는 않는다)
구용씨의 同語反復症 현상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同時代에 태어난 원수들아’, ‘내 못다한 원수를 갚아 달라’ 등등 주로 ‘원수’를 주제로 한 동어반복 현상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문득 자신이 생각해도 좀 심했다 싶으면 목청을 한 옥타브 끌어내려 옆사람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내가 너무 까불지요.”
이번에는 ‘까분다’는 말의 동어반복 현상이 한동안 이어진다.
좌중이 약간은 지쳐 있을 무렵에 구용씨는 제법 큰소리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보고를 하고는 방에서 나간다. 이것도 구용씨의 한 습관이다. 그런데 화장실에 간 구용씨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는 때가 있다. 혹시나 취중에 무슨 실수나 있을까봐 방문을 열고 내다보면 카운터에 붙어 서서 술값을 계산하고 있는 구용씨를 발견하게 된다.
이날도 구용씨는 예외가 아니어서 한 손으로 카운터를 짚고 또 다른 손으로는 양복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좌중은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구용씨의 안주머니 깊숙이 숨겨져 있던 비상금이 주인여자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K군과 C군이 구용씨의 팔에 매달렸지만 구용씨는 유유히 돌아서며 잡힌 팔을 뿌리쳐 뽑아냈다.
“내게 돈 있어요, 당신네들이 무슨 돈이 있어. 돈을 아껴 써야 돼요.”
일이 이쯤 됐으니 닭 쫓던 개들은 어슬렁어슬렁 구용씨를 뒤따라 방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계산이 끝나버린 술좌석은 맥이 풀리는 법이다.
어느새 11시가 넘었다. 누군가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追記; 이 글은 필자의 완전한 픽션이다. 妄言多謝)◑
솔빛같은 시쭗 김원길
우리는 돈암동 전차 종점 가까이의 오뎅 전문집에 가서 단 둘이서 실컷 마셨다.
그때 그는 자기는 솔빛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뒤 내가 未堂에게 구용은 솔빛같은 시를 쓰고 싶다더라고 했더니 “큭큭큭…… 좋아, 솔빛이란 핏빛보다 진한 거야, 암 핏빛보다 진한 거지…….”
그뒤 내가 구용에게 “미당이 솔빛은 핏빛보다 진하다더라”고 하니 “미당, 알고 있구만. 그 영감은 다 알고 다 써. 안 쓰는 게 없어. 혼자서 다 해버려. 두고 봐. 외로울 거야. 혼자 다 해버리고 안 남기면 외로와져, 발레리처럼….”
나는 두 분이 약간의 연령 차이는 있지만 서로 통하고 아끼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구용에게 미당과 동행하여 안동에 놀러오시라고 청을 했더니 쾌히 그러겠다 해서 또 미당의 의향을 물었더니 “구용과라면 가고말고.” 나는 뛸듯이 기뻐서 안동에서 손님맞이 준비를 꽤나 했는데 갑자기 미당 쪽에서 일이 생겨 구용마저 못오시고 말았다.
그후 나는 구용을 오래 찾아뵙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같이 잘 풀리질 않아 그 앞에 나서기가 송구스러워서였다. 그런데 며칠 전 杏文會 모임에 참석하라기에 만사제폐하고 상경하여 참석을 했다.
구용은 머리카락이 많이 희어져 있었다. 십년이나 소식을 끊어버린 날더러 “어째 그러냐?”며 “우리가 얼마나 가까웠었느냐”며 이십년 전 陶山에 갔을 때 下溪에서 上溪로, 퇴계선생 胎室까지 갔던 일과 경동고등학교 강연회 때 일까지 말씀하셨다.
“제 하는 일이 어찌나 어려운지요, 통 풀리는 일이 없어놔서요.” 했더니 그는 내가 작품이 잘 안된다는 뜻인 줄로만 알고 “명작을 쓰려 하질 마세요, 그저 심심찮을 정도로만 쓰세요.” 그리곤 무얼 떠올렸는지 귀에다 대고 “명작 쓰면 높은 사람 자서전 쓰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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