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구용 시인의 세계

시의 논리 현실의 논리/홍신선 시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방지기
댓글 0건 조회 4,905회 작성일 03-07-29 13:27

본문

시의 논리 현실의 논리

―金丘庸 시집 『詩』를 중심으로

홍신선

 

Ⅰ. 문제의 제기

긍정적인 입장이든 부정적인 입장이든, 그동안 김구용 시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난해하다는 것이다.1)

통상적인 독법으로는 그의 작품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의견들이 그것이다. 흔히 통상적인 시읽기에서 우리는 한 편의 작품을 읽으며 행간이나 텍스트 심층에 도사린 작자의 의도를 헤아리고 그 언술된 내용을 산문으로 되번역해낸다. 이 경우, 좀더 시읽기에 훈련된 독자라면 작품의 구조와 결에 따라 또는 해석의 층위에 따라 다양하게 분석과 감싸기를 행할 것이다.2)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같은 과정을 거치다 보면 상당 부분의 내밀한 모습이나 의미를 우리 앞에 드러내게 마련이다. 물론, 아무리 정치한 분석과 감싸기를 수행한다고 해도 그 결과물이 바로 작품 자체라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작품에서 생산해낸 의미란, 제 아무리 완벽하게 탐색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을 대체한다거나 작품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 역동적 구조를 지니고 끊임없이 그 자체의 의미를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신비주의적 태도라고 험구당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의 여러 예가 가리키듯이 고전적인 작품 내지 좋은 시작품은 이와 같은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시읽기의 갖가지 다양한 노력들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시작품과 시읽기에서 생산된 의미들이 상호 바람직스런 상보 관계에 놓일 때 우리는 좀더 행복한 독자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읽기에서 우리는 많은 장애들을 만날 수 있다. 시인 작자의 독특한 개인방언(idiolect)에서부터 작품 문맥의 뜻겹침(ambiguity)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난관들이 그것이다.3) 하지만, 이들 장애나 난관들은 대부분, 훈련된 독자의 경우, 세심하고 꼼꼼한 작품 읽기를 통하여 극복될 수 있는 것들이다. 나아가서는 일부 독자지향비평에서 말하는 창조적 오독을 통하여 때로는 뜻밖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시읽기에서의 장애는 이처럼 대부분 분별 있는 독서에 의해서 극복된다. 말하자면, 시의 난해성 대부분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읽기의 노력에 의하여 극복되고 풀이할 수 있는 무엇인 것이다.

김구용시의 난해성 역시 훈련된 독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에서 많은 부분들이 극복되고 풀릴 수 있는 것들이다. 한때 김구용시의 난해성은 “소피스티케이션을 위한 소피스티케이션”(유종호, 「불모의 도식」)이니 “난해의 장막”(김수영, 「난해의 장막」)이니 하는 등등으로 집중 비판된 바 있었다. 특히 작품 「거울을 보면서」를 대표적인 사례로 한 김수영의 난해성 비판은 그 무렵 전봉건과의 유명한 ‘사기논쟁’으로 확대되기도 했었다. 이와 같은 난해성은 이후 김구용의 등록상표처럼 간주돼 온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림잡아 오십 년이 넘는 긴 시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동네에서 아직도 그에 대한 논의나 평가가 활발하지 못한 데에는 바로 이같은 등록상표 탓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윤병로의 「인간애로 감화시키는 중후한 시」에 따르자면, 김구용은 1949년 『신천지』에 시 「산중야」, 「백탑송」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4) 당시 잡지 『신천지』는 청년문학가협회의 대표적인 이론분자였던 김동리가 실질적인 편집 책임을 맡아 만들던 잡지였다. 김동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김구용은 오랜 뒷날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5)

해방후 서울로 올라와 동리선생을 찾아뵈었죠. 그때 동리선생이 처음으로 신천지에 작품을 발표해 주셨지요. 그때가 49년도였으니 끼니조차 어려운 때였는데 곧 6·25가 터졌어요. 피난처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에 부산으로 갔는데 동리선생을 만나니 취직을 시켜줬어요.

―대담 「나의 문학, 나의 시작법」에서

김동리에 의하여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래 김구용은 꽤 띄엄띄엄 시집을 내놓았다. 사실상의 첫시집 『詩』가 1976년에 나왔으니 데뷔로부터 물경 27년만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 故 육영수의 후원으로 한국시인협회가 기획한 시집 총서 가운데 하나로 『詩集 1』이 1969년 삼애사에서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작품이 모두 『詩』에 전재된 사실을 감안하면 명실상부한 첫시집은 『詩』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시집 『九曲』 『頌百八』 등을 내어놓은 것이 고작이다. 굳이 시집 출간까지 들먹이는 까닭은 그의 시작 활동이, 좋게 말해서 은둔적이라고 할 만큼, 세간에 크게 드러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나친 은일적 자세는 시인으로 하여금 시동네 한복판의 중심 화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시의 난해성과 시인으로서의 은일적 자세가 어울어지면서 김구용은 우리 시에 대한 숱한 담론 한복판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은 김구용의 등록상표같은 난해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그 난해성을 헤치고 그의 시 세계를 열어갈 코드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그의 시가 담론하는 세계 혹은 메시지는 어떤 품목들의 것인가를 따져보게 될 터이다. 이미 필자는 비록 주문 생산이기는 했지만 김구용시에 관한 글을 두어 편 쓴 바가 있다.6) 그 글들은, 지금 돌이켜 보자면, 주로 김구용시의 성격과 내용들을 개략적으로 살핀 것들이었다. 이들 글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글은 그의 시집 『詩』에 나타난 두드러진 작품 세계와 그에 대한 자리매김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시 앞에 드리워진 ‘난해의 장막’을 다소나마 걷고 독자로 하여금 작품 세계의 심층을 엿보는 데 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면 주어진 몫을 다하는 셈이 될 것이다.

Ⅱ. 붕괴된 세계 혹은 실존의식

김구용시의 두드러진 한 방향은 말할 것도 없이 산문지향성이다. 그 산문성은 줄〔行〕갈이 없는 줄글 형태에서, 또는 한 작품이 이같은 줄글 형태의 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데에서, 그리고 한 논자에 의하여 ‘중산문시’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일정한 줄거리 서사를 담은 긴 분량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7) 김동리의 주선에 의하여 『신천지』에 발표된 「산중야」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마치 박태원의 소설 「방란장 주인」처럼, 이 작품은 비록 쉼표 몇이 중간에 삽입된 형태이긴 하지만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작품 「消印」 「꿈의 理想」 「不協和音의 꽃 Ⅱ」 등은 분량만으로 볼 때에도 여느 단편소설 길이에 가까운 양적 규모를 보이고 있다. 이들 작품은 시집에 들어있기에 그렇지, 우리가 소설이라고 불러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그런 산문시들인 것이다. 굳이 말하라면, 김구용이 젊은 시절 경도했었던 이상(李箱)의 소설들, 예컨대 「날개」나 「지주회시」 등과 여러 면에서 비견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8) 시집 『詩』에는 이밖에도 초기 작품인 「石獅子」 「사색의 날개」 등을 비롯하여 「미지의 모습」 「인간기계」 등 짧은 형식의 산문시들이 상당수 들어 있다. 수록 작품 160편의 절반 이상이 산문시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산문시 지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김구용은 시인 김종철과의 대담(이하 ‘대담’으로 줄인다)에서 자기 시의 산문지향성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6·25사변 중에 산문시를 많이 썼는데 그것은 그 당시 복잡한 시대적 어지러움 속에서 산문시로 밖엔 나를 소화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시가 길어진 것은 사실 짧게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는 질이 중요한 것이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그 무렵 일기에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질적으로 압축시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특히 압축시킬 여건이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불가능 했기 때문입니다.9)

옮겨온 말이 얼마간 길어지긴 했지만, 이 진술은 김구용이 왜 산문시를 지향했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사정을 소박한 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이 극도로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서 겪은 갖가지 중층적인 체험을 산문 형식으로밖에는 구조화할 수 없었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를 짧게 쓸 능력이 없었다는 진술 역시 따지고 보면 이같은 명분의 다른 한 면일 터이다.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뜻에서는 산문시는 짜임의 견고함과 내적 불규칙성을 특징으로 한다. 우선 짜임의 견고함은 화자의 언술이 일정한 하나의 초점을 향해서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산문시 역시 여느 시작품처럼 초점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통하여 체험을 일정하게 질서화하는 여느 자유시의 경우보다 오히려 산문시에 한결 더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일 것이다. 왜냐하면 산문시는 줄글 형식 탓에 자칫하면 일정한 규제나 절제없이 방만하게 풀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적 불규칙성은 운과 율격을 통한 리듬의 생산이 불가능한 데서 자연스럽게 초래되는 현상이다.10) 굳이 외국의 예까지 갈 것 없이 우리 현대시에서의 몇몇 뛰어난 산문시들은 이와 같은 특성들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한용운이나 정지용, 미당 서정주의 뛰어난 산문시편들이 바로 그것이다. 대담에서 김구용이 뒤미처 말한 압축을 할 능력이 없다는 진술 역시 이같은 내적 불규칙성을 의식한 말일 것이다. 특히, 시인이 활발하게 시적 대응을 한 1950년대의 공간이란 6·25 전쟁으로 인한 “페허를 씻고, 매몰된 문화의 파편”(「腦炎」)들만이 널린 곳이었다. 이같은 공간 현실에 대한 대응은 정제된 시 형식을 통한 질서화의 노력보다는 산문으로의 즉응적인 표출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시대의 어지러움을 두고 자연만 노래하는 데 회의를 느꼈다고 언술한 것이나 전통 양식의 표현만 가지고는 의도화한 표현이 결코 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사정을 단적으로 감지한 때문이었다. 산문 형식이 갖는 현실에 대한 즉응성 때문에, 곡 장르 선택의 힘을 감지한 탓에 김구용은 한국 전쟁 이후 대부분의 작품을 산문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것도 잘 정리되고 다듬어진 산문시이기보다는 독자들이 그 앞에서 당황하기 일쑤인 그런 줄글 형식의 작품을 계속 선보였던 것이다.

 

鐵과 重油로 움직이는 機體 안에 마음은 囚禁되다. 피빛 풍경의 派生點을 吸收하는 眼底에 공장의 해골들이 暗示한다. 제비는 砲口를 스치고 지나, 空間에 壁을 뚫으며 자유로이 노래한다. 골목마다 여자는 梅毒의 목숨으로서 웃는다. 다리〔橋〕밑으로 숨는 어린 餓鬼의 표정에서 食口들을 생각할 때, 어느 地點에서나 우리 自性은 우리의 것, 그러나 잡을 수 없는 제 그림자처럼 잃었다. 시간과 함께 존속하려는 奇蹟의 旗가 바람에 찢겨 펄럭인다. 최후의 승리로, 마침내 命令一下! 精油는 炎熱하고 순화하여, 機軸은 돌아올 수 없는 電流地帶로 방향을 돌린다. 雜草의 도시를 지나, 인간기계들은 살기 위한 죽음으로 整然히 행진한다. 닫혀질 눈에 저승의 光明이 이르기까지, 溶解하는 암흑 속으로 金屬性의 나팔소리 드높이.

―「인간기계」 전문11)

 

옮겨온 시는 한국전쟁이 한참이었던 1951년에 쓴 작품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김구용의 산문시 가운데 「腦炎」 「消印」 「不協和音의 꽃 Ⅱ」 등의 작품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나 그의 시적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곧, 사람들의 삶을 기계적인 것 내지 기계라고 인식하는 태고나 “囚禁”이란 말이 암시하는 감금의식, 그리고 성의 상품화같은 내용들이 짧은 길이 속에 모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의 삶이 기계적인 것 내지 기계라고 인식하는 태도는, 그것이 전쟁 공간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김구용만의 독특한 발상은 아니다. 지난날 우리의 모더니즘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T. S. 엘리어트의 시 가운데서도 쉽게 발견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초 유럽의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를 통해 특이하게 보여준 그의 시구,

 

보랏빛 時間, 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난고 人間의 內燃機關이

택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불의 說敎」에서12)

 

와 같은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해가 막 지고 나서 본격적인 어둠이 오기 전의 시간은 대체로 보랏빛으로 어슴프레한 때이다. 흔히 박모라고도 불리는 그의 시간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답게 사람들에게 각별한 정서를 자아내주는 시간이다. 이를테면, 김영랑이 “먼 산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으로 노래한 그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의 시간인 것이다. 이같은 시간은 그러나 대도시의 일상을 꾸리고 사는 사람에게는 기계처럼 움직이던 하루의 노동에서 해당되는 시간이다. 흔히 극적인 일탈이나 변화없이 반복해서 지속되는 일상을 기계적이라고 하는 것도 굳이 따지자면 이와 비슷한 의미를 염두에 둔 언술일 것이다. 작품 「인간기계」에 나타난 인간 곧 기계라는 상상 내지 인식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화자가 자신과 동일한 대상으로 지목한 기계가 전쟁의 공간답게 탱크라는 점일 것이다. 화자는 철과 중유로 움직이는 탱크에 마음을 뺏기고 있다. 그리고 그 군장비가 몰려 있는 저 밑지대에는 공장의 앙상하고 살벌한, 해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제비가 포신을 스치듯 지나 날아오르고 있다. 이같은 풍경이 펼쳐진 공간에서 화자는 다시 성을 상품화해서 생계를 꾸리는 여인네들과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굶주린 어린 거지들을 떠올린다. 황폐한 전쟁의 뒤풍경인 이 헐벗고 굶주리는 정황은 어느 지점, 어느 누구, 예컨대는 화자의 식구들조차에게도 마찬가지인 당시의 참상이었다. 이같은 전쟁 공간에서 “시간과 함께 존속”해야 하는, 또는 생존하는 일만이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미덕처럼 통용되고 있었던 것. 인간기계는 이와 같은 유일의 미덕인 생존을 위해 묵묵히 잡답의 일상을 통과해가는 전쟁 중의 군상들을 의미하고 있다.

김구용시의 또 다른 두드러진 담론인 성의 매매도 생존이 유일한 미덕이라는 전시의 상황논리로 그의 작품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특히 작품 「벗은 奴隸」에 나타난 윤락가의 정황 묘사는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꽃같은 化粧品이 늘어있고, 水面처럼 맑은 鏡臺안에서 좁은 방안의 兩頭蛇가 一心異身이 아닌 異心一身으로 나타났다. 누가 이 괴상한 生命을 본대도, 서로 싸우며 同身을 괴롭히는 自滅의 刑罰이 어디서 起因하였는지 모를 것이다. 긴 몸이 축 늘어지고 愛憎의 毒牙가 閃光을 일으키며 서로의 대가리를 물어뜯자 피는 거울에 튀고 물결은 방안을 피빛으로 바꾸었다. 그는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은 조여들며 입술과 혓바닥이 타들어갔다. 그는 몸부림치며 救援을 불렀다. 누가 흔들기에 눈도 뜰 사이 없이 물을 받아 마시었다. 甘露水였다. 조그만 창은 새벽빛이었다. LIFE 雜誌를 뜯어 바른 벽이 아스무레 나타나고, 寒氣가 들어서 놀랐다. 벽 너머 바깥에서 어린 것이 엄마를 부른다.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貧相으로 생긴 여자는 그가 벽인 줄만 알았던 문을 열었다. 바로 길바닥에서 넝마를 입은 어린 것이 벌벌 떨며 들어와 눈치를 살금살금 보았다.

여자의 마른 몸뚱아리와 더러운 이부자리가 역해서, 그는 옷을 주어입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또 오셔요.」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밀어 냈는지도 모른다.

―「벗은 奴隸」의 일부13)

서울로 환도한 지 몇 달 뒤에 “그”는 술을 마셨고 소문만 듣던 뒷골목, 사창가를 찾는다. 매매된 성이 교환되고 난 이튿날의 정경은, 옮겨 적은 대목 그대로, 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도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 그녀는 “넝마를 입은” 어린것과 먹고살기 위해서 매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매음은 “아내도 굶지 않기 위하여 羞恥없이 몇 장의 紙幣를 받고 언제나 벌거숭이가 되는 人肉, 제 그림자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고독에 사”는(「오늘」)14), 사회 금기의 파괴는 물론 가족 관계의 황폐화마저 몰고 오는 극단의 것이다. 이상이나 김유정 소설의 아내 매매(음)를 연상시키는 가난과 결핍의 모진 병리 현상인 셈이다. 다른 작품 속의 수사대로 하자면, “생존한다는 것까지가 죄악이” 되는 현실인 것이다.

성의 상품화는, 잘 알려진 그대로, 기존 사회의 가치 체계가 여지없이 붕괴 내지 해체되었음을 뜻한다. 그것도 유교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성의 문란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강상(綱常)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군주와 신하 다음 자리의 인간사회를 꾸리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심적인 근본 위계가 해체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 상품화 내지 성윤리의 실종은 한 사회의 기본적이면서도 중심적인 축이 무너졌음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현상이 된다. 일찍이 미셸 푸코에 따르자면, 결혼이란 성의 방종과 문란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마련한 대표적인 제도라고 한다. 그와 같은 제도가 비록 굶주림과 가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의 매매 형식에 의하여 철저히 무너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의 모든 가치 체계가 와해된 혼란상 내지 아노미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일련의 산문시뿐만이 아니라 「九曲」과 같은 장시를 통하여 김구용의 성의 상품화 현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도 실은 이 때문일 것이다.15) 유교적인 환경 속에서의 성장이나 한학에의 깊은 소양 등 시인의 개인사적인 일 등을 통하여 미루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자명해진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성의 상품화 현상은 기존의 가족 제도나 사회 가치 체계를 근본에서 흔드는 충격적인 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실제로 김구용은 성의 매매 문제만이 아니라 결혼 풍속의 변화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작품 「꿈의 理想」은 여의사, 여교사, 여대생이란 세 사람의 미혼여성 사이를 오가는 “그”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긴 다른 산문시 작품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인데 직업은 대학의 시간강사이다. 그는 때로 노예처럼 번역원고를 작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직의 고통 속에 거리를 하릴없이 방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일제시대 서울거리를 배회하던 소설가 구보처럼 김구용 산문시의 “그” 역시 전시의 부산거리나 환도 후의 서울 뒷골목들을 자의식 과잉의 룸펜처럼 헤매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그는 우리 근대문학사상의 창백한 지식인 캐릭터들 뒤를 그대로 잇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의식 과잉 현상을 주특기처럼 내보인다. 그 자의식 과잉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따지게 만들고 곧잘 “거울”을 소도구로까지 들먹이게 한다. 시집 『詩』를 통독하다 보면 우리는 작품 여러 대목에서 거울 이미지를 만난다. 산문시뿐만이 아니라 짧은 자유시 작품들 속에서도 자주 그리고 인상깊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이미지는 일찍이 우리 시에서 이상 시의 등록상표처럼 널리 회자된 바가 있다. 주로 시인이 주체를 기획하고 확립하는 주요한 매개로써 사용된 대표적 이미지의 하나인 것이다. 이 거울 이미지의 근원은 서구의 나르시시즘까지 거슬러오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 시의 경우는 이상 같은 모더니스트들에게서 한 전범을 본 바 있었다.16) 마찬가지로 김구용 역시 거울 이미지를 작품 속에 소도구처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거울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이 글의 뒷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산문시 「꿈의 理想」 가운데 그는, 앞에 적은 그대로, 쇠약하며 우울하기만 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원래부터 이유가 없어요” 라고 실존적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듯, 세계의 합리성은 원인과 결과라는 일련의 연쇄에 의하여 설명된다. 이러한 의미선상에서 일련의 원인이 없다는 것은 결과들만이 우연처럼, 혹은 우연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그 존재 이유나 본질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그 인물은 우연에 의하여 혹은 잉여성만으로 존재하는 꼴이 될 것이다.17) 세계나 삶의 제일원인으로서 일찍이 인류가 신을 상정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F. 니체 류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고는 세계와 삶에 있어서 더이상 선험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알린 사건이었다. 이른바 실존적 고뇌는 이러한 선험적 본질 내지 제일원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이 앓는 고도의 정신적 질환인 셈이다. 흔히 1950년대 우리의 전후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강의 하나로 꼽히는 실존적 고뇌 역시 혹심한 전쟁에 의하여 세계와 삶에 있어서의 일체 선험적 본질이나 의미들이 파괴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대규모의 파괴와 살상이 무차별로 이루어진 전쟁을 통과하며 사람들은 누구나 합리성을 가장한 모든 기존 가치가 실은 보잘 것 없는 허상이었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후시나 소설 등에서 실존적 고뇌란 없어지지 않는 흉터로 깊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외계로서 세계란 것이 하루 아침의 신기루처럼 쉽게 파괴되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면 남는 것은 개개인의 고독하고 단절된 내면 세계뿐일 것이다. 이는 지난 1950·60년대 우리 시의 한 가닥이 내면 심리의 탐구로 질주해간 사실로도 잘 입증되고 있다.18)

마찬가지로 세계와 삶에서 원래 이유를 망실한 김구용시의 “그”는 자의식과 과잉의 내면을 수시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는 影響을 끼칠 수 있는 限界 안에서, 終焉의 喪服을 입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 「나를 돌려달라 나를 돌려달라」는 曠野의 反響이 일어났다. 고막이 울린다. 휘황한 전등이 꺼졌다. 「나라는 너는 어디 있느냐 뭣을 돌려달라는 것냐.」 어둡기만 하였다. 氾濫한 달빛이 실내를 엄습하였다.

―「꿈의 理想」의 일부19)

 

와 같은 대목이 그것이다. “그”의 외면과 내면이 정치하게 교차하면서 드러내는 것은 이 대목에서 보듯 유동하는 의식 세계이다. 곧 자의식 세계를 집중적으로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그”의 실체를, 반면에 내면에서는 자의식 과잉으로 혼돈을 겪고 있는 인물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그”가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세 여인 중의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날은 오렌지를 둘이서 먹기로 하자. 그리고 求婚하자” 라는 결단 아닌 결단(?)에 이른다. 이 작품은 이같은 결단으로 끝마무리를 짓는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 작품 「꿈의 理想」은 자기 진정성의 탐색을 세 여인 사이를 오가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같은 기본구도와 함께 우리가 다른 한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 여인들의 결혼관을 통해서 확인하는 결혼에 대한 의식인 것이다.

작품 「消印」은 살인혐의로 “수금(囚禁)”된 내가 취조를 받는 이야기이다.20) 서사체로 보자면 범죄소설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 특이한 줄거리의 작품인 것이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녹빛 외투 여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채 조사를 받고 있다. 살인 혐의는 그야말로 혐의일 뿐, 나는 녹빛 외투 여인을 죽인 적이 없다. 내가 녹빛 외투 여인을 만난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늦은 시간 밤 전차에서 차표 한 장 때문에 운전수와 실랑이를 벌이는 그녀에게 대신 차표를 내어준 것이 그녀와의 만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목적지에서 하차하자 따라내렸고 근처 다방에서 차를 함께 마신다.

“댁의 주소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사람을 좀 보낼까 하는데…… 신세를 졌으면 으레 인사쯤 있어야 하니까요 비록 전차표 한 장이지만.”

이런 제의 때문에 나는 이름과 직장 주소를 적어 그녀에게 별 생각없이 건네준다. 그리고 이 쪽지 때문에 그날밤 돈암교 근처 개천에서 피살당한 그녀의 살해용의자로 체포된 것이다. 우리가 읽기에 지루하리 만큼 장황하고 긴 이 산문시는 서사구조와 세부 묘사 때문에 한 편의 소설로 읽어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일찍이 발표 당시 유종호에 의하여 “산문에의 무조건적 항복”이라고 비판당하기도 했던 작품답게 오늘날 우리가 읽기에도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난해한 산문시인 것이다. 비록 살인사건의 틀을 빌고 있지만, 김구용의 시적 의도는, 그가 즐겨 쓰는 “囚禁”이란 말 그대로 이 조리 없는 세계 속에 구속·감금당한 실존의식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이 작품 속의 “나”는 마치 이유없는 살인 행위 끝에 사형을 당하는 실존주의 작가 A.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어떠한 필연이나 합리성이란 것이 없는 세계 내에서는 살인 행위에도 필연의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뫼르소가 행복하게 맞게 되는 사형 역시 굳이 뚜렷한 합리적인 이유나 설명이 있을 수 없는 우연의 사태일 뿐이다. 일체 조리가 없는 세계는 무의미로 가득찬 허무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세계의 무의미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반항의 형식은 자살이거나 무의미하기에 의미있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삶을 선택하는 길밖에 없다.21) 작품 「消印」의 주인공 “나” 역시 적극 무죄를 주장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끝날 뿐, 취조관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처럼 서로의 주장이 일방통행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나와 세계(취조관)와의 소통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이같은 소통 불가능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타자와의 유대가 근본에서 막힌 단자로서의 개인만으로 이 세계-내를 부유하도록 만든다. 그 개인은 따라서 자기 내면 속에 깊이 수금된 존재일 뿐이다. 실제로 「消印」 속의 “나”는 아무리 무죄를 주장하여도 끝내는 살인범으로 다른 곳으로 넘겨지고 만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면 이 작품에서의 감금안 구속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개인 내면 속으로의 수금은 물론 완강한 세계 속에 우리가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잘 아다시피 인간의 실존은 뛰어넘을 수 없는 저 한계 상황 속에, 일체의 탈출 가능성도 없이 갇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1950년대의 전후문학에 관한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거듭되는 말이지만, 실존에 관련된 문제이다. 전쟁은 대량의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외재적 세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내부 세계 역시 파괴한다. 모든 합리적 가치 체계가 붕괴된 내면 정황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외부 현실 세계의 파괴뿐만이 아니라 내면 세계마저 붕괴된 ‘시대적 어지러움’에 대하여 김구용은 시적 대응으로서 과감하게 산문시를 선택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산문시의 보다 자유롭게 열린 형식을 빌어, 때로는 줄거리 중심의 소설 같은 즉응의 형태로, 때로는 서경의 형태로 현실과 삶을 가감없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존 가치 체계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성의 상품화 현상이나 굶주림과 가난, 수금의식, 실존의 잉여성 등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담론화하였던 것이다.

Ⅲ. 내면 탐구와 불교적 상상력

대략 1936년부터 1971년까지 40년 가까운 동안의 작품들을 망라한 시집 『詩』에는 산문시들을 뺀 자유시 형식의 작품들 또한 절반 넘는 편수를 차지하고 있다. 어림잡아 80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것이다. 대담에서 김구용은 본격적으로 문학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 11세 때라는 술회를 한 적이 있지만, 이 80편 작품 가운데는 14세 무렵의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 청소년기의 작품을 뺀 그의 등단 이후의 작품들을 집중 검토해 보자. 이 논의에서 청소년기의 작품들을 논외로 하는 것은, 이미 필자 나름으로는 그들 작품을 개괄적이나마 살펴본 바 있기도 하지만, 굳이 시인의 조숙한 시의식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면 일단 접어두는 것이 논의의 효율성을 위해 바람직스럽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미 산문시에 대한 검토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과한 시인의 내면 풍경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본 바 있다. 자유시 형식의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이같은 전후의식을 구조화한 경우들이 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리도 잎은 우거졌는데

집들은 하나 하나 터만 남고

이리도 꽃은 만발한데

어디서나 송장들 썩는 냄새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를 일이다.

―「잎은 우거졌는데」 전문22)

 

옮겨온 시는 김구용의 작품치고는 아주 간결하고 평이한 수사로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집들이 하나같이 파괴된 폐허의 모습과 살육당한 “송장”들의 시취를 일련의 자연현상들과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파괴된 도시와 피폐한 삶을 소박한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자연과 대비하여 그려낸 작품들은 김구용만의 것이 아닌 그와 동시대 시인이었던 전봉건, 박남수의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것.23) 따라서,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할 작품 양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와 같은 엄청난 비극적 상황 앞에서도 시인은 일체의 개인적 정서를 작품 속에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탄식이나 감상같은 주관적 반응을 극도로 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아마도 김구용시가 앞서 든 동시대 시인들과 남다르게 보여주고 있는 두드러진 성격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왜냐하면 시각을 축으로 한 대상의 감각적 해석 내지 회화성이라고 불러야 할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들에는 질척거리는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전혀 스며 있지 않다. 이는 정지용의 시를 가장 좋아했다는 그의 술회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T. S. 엘리어트 류의 영국 주지주의 시학의 감염 현상으로 이해해도 좋은 태도이다. 이왕 말이 난 끝에 더 이야기하자면 김구용시의 모더니즘 양상은 복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 가운데 초현실주의의 절연기법이나 의식의 흐름, 주지주의적 몰개성의 태도 등등 현대시다운 요소들이 다양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개인적 기질의 탓으로 돌려야 될 부분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김구용시의 건조성(dry)은 6·25, 4·19 같은 역사적 사건이나 공분을 살 만한 현실사(現實事)를 작품화한 경우에도 그대로 잘 견지되고 있다. 이를테면, 4·19를 담론화한 「많은 머리」나 분단현실을 작품화한 「절단된 허리」 「끊어진 땅은 없었다」 등의 작품에서도 이같은 메마름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일련의 작품들은 지난날 우리 현실주의 시들이 보여준 구호같은 거친 말투나 과격한 감정표출 등을 거의 내장하지 않고 있다. 있다면, 예의 그만의 기이한 문채(文彩, figure)를 통한 분위기나 정경 묘사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영혼을 부리다가

버림받은 武器의 가장자리에

곡식을 기르려, 枯血은 봄비에 씻기고

工場은 放送되어, 다음 해면

간소한 婚禮나마 올릴 것인가

―「切斷된 허리」의 일부24)

 

와 같은, 지금은 비록 무기가 차지한 땅이지만 언젠가는 흘린 피를 봄비에 씻어내고 경작을 하겠다는, 그리고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이 혼례를 올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김구용시만의 특이한 언술 형식이 그것이다. 사실 김구용은

추천17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