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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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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이 있으며,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가 있다. 연구서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와 시』가 있다.
선정평
놀라운 시적 상상력
십수 년 전부터, 나의 시집에 대한 손 시인의 평론과 리토피아 등에서 만나는 시, 산문을 읽으면서, 필자는 손 시인의 뛰어난 글쓰기와 발상법에 대하여 감탄한 바 있다. 최근에 낸 손 시인의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을 읽고 나서는 그런 인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깊어졌다.
우리 선시의 작법이나 서구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자동기술법을 글쓰기에 응용하여 본 나로서는, 이번 손 시인의 시집에서 그런 경향의 본보기로 보이는 작품들을 많이 만났고, 낯설게하기, 의식의 흐름 등의 창작법 이외에 내가 근년 탐구해 온 동서양 사상가들의 시론을 상기시켜 주었다.
특히, 손 시인은 광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꿈틀거리는 말을 끌어내어 연금술사들이 보았다는 그 노루를 보여주는 듯한 시를 지으며, 시간과 죽음에 갇힌 현존재로서의 손 시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현세적 경험을 통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의 깊은 동굴에서 진동하는 사물과 사건의 생생한 이미지들을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적으로 엮어내고 전개하는 놀라운 시적 상상력과 글쓰기 능력을 주목하게 한다.
아울러, 은유, 환유는 닿지 못할 듯이 아득히 떨어져 있는 말과 사물과 사건을 끌어내어 섬뜩한 순서/질서로 배열하는 기발함에 놀라게 된다. 한국시의 세계 진출의 측면에서, 적합하게 난해한 시들이 더 많이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 필자로서, 손 시인의 이번 시집을 높이 평가하게 되며, 심오한 사상을 시로 형상화하신 김구용 선생을 기리는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대상으로 선정될만하다고 믿는 바이다./고창수(글), 장종권, 안성덕, 남태식
수상소감
김구용시문학상 앞에서
―나의 시는 패배에 관한 기록이다
지금 엄마는 병상에 누워 계신다. 삶의 요긴한 동작들을 모두 잃어버린 채 반 평짜리 지구 위에서 숨 고르신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삶은 환하다거나 행복한 삶이 아니다. 그녀라고 왜 화창한 시절이 없었을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슬픔을 얼음처럼 몸에 박은 채 그저 삶을 버티는 사람이었다. 늘 지는 쪽으로 기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팔자에도 없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했다. 내가 이겨야 엄마가 웃으니까. 이기는 일이 성가시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지만, 나는 이기는 척이라도 해서 엄마를 슬픔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그것이 오빠 셋 있는 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나의 소임이었다. 그렇게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 되어서 씩씩한 척, 용감한 척, 힘도 없으면서 무조건 지는 사람의 편이 되었다. 이기지도 못하면서 이겨야 하는 외로운 사람으로 자랐다. 그렇게 나의 무의식과 증상들은 슬픔이나 패배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수순처럼 나도 패배했다.
어릴 적 ‘25시’라는 영화를 보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장면이 클로즈업되면서 엔딩 자막이 올라왔던 것을 기억한다. 영화의 내용은 삭제된 채, 주체하지 못했던 울음만 생생하게 엎질러졌던 기억. 그때, 어렴풋이 아름다움의 비극을 본 것도 같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에서 묘하게 스미는 증상들. 그것을 아름다움이라 각인하면서 나의 질문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슬픔의 본질에 대한 무의식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 나는 그저 걷는 사람이 되었다. 걷다 보면 우연하게 이런 장면도 만나게 되는데, 칠흑의 밤하늘에 초승달이 칼금처럼 떠 있었다. 그것을 누가 “북극성 옆에 달이 떴다”라고 명명했다. 지금 막 돋아난 신생의 달과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극성이 묘하게 부딪치면서 ‘생’과 ‘멸’이 한눈에 들어와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멸’에서 ‘생’을 불러오는 그의 발화가 두렵고 무서웠다. 슬픔의 정체인 삶의 본질에 대해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는 1초에 5센티미터이다. 나는 만개한 꽃보다는 지는 꽃에 더 시선이 간다. 그러니까 만월에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빈 기억이 없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살짝 이지러진 열나흘째 달에게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본다. 살짝 빈 사람들과 살짝 부족한 말에 마음이 간다. 살짝 부족하다는 말, 그 말이 내게는 오히려 족하다는 의미로 전해진다. 시에서의 행갈이나 연갈이처럼 당신과 내가 조금은 섞일 수 있는 공간. 숨통이 트이는 자리. 그 흩어지거나 휘돌아 쳐서 망가지거나 주저앉게 되는 상황에서 나는 총체적 나의 삶을 시작한다. 피어나는 꽃은 그냥 아름답지만, 지는 꽃은 처연해서 애달프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해야 하는 시의 애매한 운명처럼.
이제 김구용이다. 현재 김구용 시의 연구는 학위논문 14편, 국내 학술논문 42편으로 그의 시적 업적에 비하면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그의 시에 대한 해석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는 긍정적 평가로 이해해도 좋다. 김구용 시의 텍스트는 무의식이 드러날 때 빛을 발한다.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볼 때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처럼, 난해한 문체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구조는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시의 총체적 의미와 연결되기도 한다. 척박한 시대의 산증인으로 반복 강박의 심리기제의 시적 형상화는 ‘난해시’로 갈등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발현된 그의 욕망의 문제의식은 바다라는 무한한 넓이로 인식되는 공간의 사용이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선의 편재이기도 하다. 즉 그의 시에 이미지로 종종 출몰하는 물과 거울의 의미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생멸의 표상이기도 한데,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환유나 은유의 방법을 넘어서는 시의 발화법으로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되돌리는 처절한 생성 움직임의 빛나는 작업이었다.
이제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부족한 사람의 시를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해주신 문예지 《리토피아》와 장종권 선생님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무릎이 꺾일 때마다 사랑과 격려로 손잡아 주신 고창수 선생님께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 이 상은 단 한 번도 빛난 적 없는 딸이었지만, 무조건 사랑해 주셨던 내 아버지와, 병상에서 힘겹게 삶을 버티고 계신 엄마가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혹시, 지금 내게 소원이 있다면 엄마가 꽃 질 때 꽃처럼 돌아가셔서 꽃이 필 때 꽃으로 다시, 매년 돌아오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손현숙
수상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중에서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 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 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면회
살아 있어도 죽은 불빛, 반 평짜리 지구 위에서
잇몸 오물거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지나간 것들을 주워다 호주머니를 채우는
기억의 회로는 누구의 통제도 불허한다
한 벌 옷으로 먹고 입고 잠을 자는
여기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성별을 모르겠는
닳아빠진 가죽 부대 안에서 쏙 빠져나온 맨발
맑고 깨끗해서 처음의 첫, 처럼 말랑해서
그러나 저 발은 땅을 딛지 못한다
생의 요긴한 동작들은 어디로 흩어 버리고
살기는 언제 살았었는지 걱정도 늙어버려서
저 낡고 구겨진 옷 한 벌이 세상천지다
세 시간 굴러와서 딱, 십 분 면회하고
사진 한 방 찍고 허언증 환자처럼
또 올게, 다음이 있을까, 다시 돌아보면서
쓸쓸한 이별 앞에서 통틀니처럼 가지런하게
저 깊은 고랑의 까매진 얼굴에 나는 자꾸 걸려 넘어지면서
돌아서지도 다가서지도 못하는 딸년의 셈법으로
엄마, 사라진 불빛에 애써 심지를 돋우면서
반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능소화 꽃둘레가 하늘 귀를 사르는 동안이었을 거다 아주 먼 데서 우레가 가는 길을 우레가 지나가고 머리 위로 뭉게구름 사소하게 다녀간 후, 푸른 잠에서 푸른 잠으로 날아가는 부전나비 한 쌍을 비스듬히 좇고 있었다 반백 년이 흐르고 나는 가난한 책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낮별떼가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반짝거렸다 어느 틈에 아침이 오후 두 시를 사시斜視처럼 데려왔다 바람은 비에 젖어 능소화 꽃둘레 무지개를 타고 올랐다 물에 불은 꽃잎이 담장을 기어오른다 허공에 한 금 한 금 긋는 고양이 비음 사이로 그림자를 등진 사내가 어깨의 햇빛을 털면서 왔다, 갔다 그의 뒷덜미에서 목소리가 부풀었다 졸음처럼, 남서쪽에서 잠비가 올라오는 중이라 했다 오만 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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