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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박은지/산책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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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박은지/산책 외 1편
박은지
산책
너와 걸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언제나 끝이 있고
끝에는 물이 반짝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반드시
할 수 없는 일로 돌아오고
오늘 나는 춤출 수 없겠지
보이지 않는 끝을 가리키며 그 너머를 얘기할 때
네가 나를 바라볼 때
오늘만큼은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
그러나 그것은 느낌일 뿐
물속을 걸었지
미끄럽고 부드러운
느리고 조용하게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
내가 계단에서 뺨을 맞았어
여기는 계단이 없어서 다행이지
물속에서 나눌 수 있는 좋은 얘기들
손을 힘껏 뻗어도 수면은 그 위에 있고
빛은 수면에서 춤을 춘다
하고 싶은 얘기와 좋은 얘기는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어
산책의 끝을 궁금해 하며
헤엄치는 너의 물보라 따라
너의 뒷모습을 따라
멀어지는 빛을 본다
조금은 더 걸을 수 있겠지
끝없이 반짝이는 수면
느리고 조용하게
주말 상설 공연
이번 주말은 특별히 이해와 공감의 축제
땀 흘리는 아이들과 스웨터를 껴입은 모두에게 알맞은 바람
남몰래 연습해온 외줄타기를 오늘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누가 본 걸까 나의 외줄타기를
아무도 몰래는 실패했습니다
누군가 눈을 숨겼을 기둥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줄에서 떨어진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덕분에 제가 줄에 오르게 되었어요
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걸까
격려의 박수가 쏟아집니다
수많은 손이 부딪칩니다
볕이 뜨거운 날에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들이 좋았는데요
동아줄 한가운데로 발을 옮깁니다
줄을 흔들면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줄 위에 착지한 적이 있었던가
격려의 박수가 장마처럼 이어지고요
모두들 잘했다고 괜찮다고 평화로운 얼굴로 돌아갑니다
이해와 공감의 축제는 만족스러운 피날레를 맞이하고
어디까지 본 걸까 나의 찢어진 밤을
아무도 몰래 줄 위에 올라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을 내뱉습니다
*박은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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