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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허유미/포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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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89회 작성일 20-01-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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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허유미/포도 외 1편


허유미


포도



정오가 포도알처럼 둥글게 솟아오를 때
채석장에 나갈 수 없는 남자의 울음이
산달 여자의 배를 뚫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안으면 뻗어 나가는 초록을 상상하며
여자는 신맛 나는 단어를 읊조린다
포도를 삼키면 쏟아지는 햇발 같은 것들을
포도가 몸을 통화하는 동안
빈 접시 위에 떠나야 할 길과
버려야 할 시간이 지도처럼 펼쳐졌다
여자는 혀 밑에 고인 침을 삼키며
어디서부터 걸어야 할지 짐작할 수 없는
넝쿨처럼 얽힌 청춘의 방향을 풀어본다
남자는 굴삭기를 운전하던 손으로
채석장 수직 암벽처럼 쌓여진
밀린 고지서를 움켜지고 다른 한 손으로
푸석한 여자의 손을 포갠다
여자는 남자의 닳고 부스러진 발톱을 매만지다
푸른 하늘을 가리고 영그는 검은 여름,
어둡고 둥글게 차오르는 기적을 생각하며
생쌀을 씹어야겠다며 일어선다





가랑비 같은 년



장대비는 고맙지
몸 씻겨 주기도 하고 물 받아 부엌에서도 쓰고
밭에서는 잎에 맥도 못 추려
곧 쓰레기가 될 것 같은 저것들한테
부처님 오줌 같은 것이여
근데 가랑비는 못 써야
웃는 듯 웃지 않은 듯
훔쳐보는 듯 안 훔쳐보는 듯
새침스럽다가 눈물 글썽이듯
등을 긁어 주는 척하다가 간지럽히듯
속닥거리는 듯하다가 비밀인 듯 멈춰버려
뒤쫓아 오는 듯한데 돌아보면 구경만 하고 있지
벗어 놓은 홑저고리처럼 널어놓은 홑치마처럼
스멀스멀 손짓하지 솔금솔금 발짓하지
늘 갸우뚱갸우뚱 다가온다니깐
피할 생각도 못 하지
비가 오기 전에 비를 피하는 게 상책이여
가랑비가 내리는 날은 눈이 침침해
사람 표정을 알 수가 없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어쩌자고 가랑비 같은 년을 만나
배창자까지 젖어 버려서는
생전 안 굶던 밥을 굶는다냐 방안이 온통 질척거리네
가랑비 같은 년을 만나 가랑이 같은 년을 만나





*허유미 2019 《서정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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