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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책·크리틱/김정수/‘그리움’이라는 바다―박경순 시집 『그 바다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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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책·크리틱/김정수/‘그리움’이라는 바다―박경순 시집 『그 바다에 가면』
김정수
‘그리움’이라는 바다
―박경순 시집 『그 바다에 가면』
1991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한 박경순 시인은 지금까지 『새는 앉아 또 하나의 詩를 쓰고』, 『이제 창문 내는 일만 남았다』,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을 발간했으며, 『그 바다에 가면』이 네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약력 중 전국성인시낭송대회 최우수상이나 인천예총예술상, 인천문학상 외에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재직 중이라는 독특한 경력이 눈에 띈다. 항구도시 인천 출신인 시인은 1986년 순경 공채시험에 합격,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해양경찰관에 임용됐으며, 2017년 첫 여성 총경으로 진급한 뒤 2018년 8월부터 1년간 울진해양경찰서장을 지냈다.
이번 시집에는 해양경찰관으로서 울진·태안·동해·평택 등 근무지에서의 경험을 ‘그리움’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시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 저 먼 곳의 감정인 그리움은 마음에서 발원한다. 몸은 떨어져 있으되 마음은 늘 그곳에 머무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리움과 이웃한 감정이 ‘기다림’이라면 이 두 개의 감정이 교차하며, 평행하며 아늑히 품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회상한다. 그것이 공간과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과의 만남일 수도 있고, 공간과 풍경과 사람이 서로 겹쳐질 수도 있다. 이번 시집에서의 회상(추억)은 과거 근무지라는 공간에 기인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자연풍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바다의 ‘어둠’과 ‘노을’ 뒤에 등장하는 ‘산등성’ 너머에는 ‘아버지’라는 근원적 그리움이 존재한다. 시집 후반의 업무 중 순직한 동료 경찰관에 대한 추모의 시 또한 그리움이라는 그릇에 담긴 사랑이다.
어둠이 먼저
바다에 떨어졌다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노을이
그대 사랑처럼
걸려 있는데
저녁 밥 짓는
연기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
다시 듣고 싶은
후포리 저녁
-「후포리 저녁」 전문
여는 시 「후포리 저녁」은 시인이 울진해양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 쓴 시다. 시인이 울진 후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후포를 떠나던 날/아침 바다를/잊을 수가 없다./(중략)/그 바다에 가면/나는/비로소/자유로워진다.”는 「시인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서장으로서 첫 근무지인 울진 후포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몸은 매어 있으되 마음은 평안한 상태라는 것이다. 서해 인천 출신의 시인이 반대 방향인 동해 울진에서 찾은 자유는 바다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타향이지만 바다가 있기에 타향이 아닌 고향처럼 느껴져 산등성이의 노을에서 사랑을 소환하고, “저녁 밥 짓는/연기”를 환기하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엄마 목소리”를 떠올린다. 이 모든 건 장소는 달라도 바다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인에게 바다는 유년의 기억부터 현재의 삶까지 아우르는 원형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침 그물 놓으려
바다로 나간 남편은
끝내 살아오지 못하고
빈 배만 먼저 왔다
축산항 떠나
사랑하는 아내 위해
그물 던졌던
바다는,
아무런 진실도 알리지 않은 채
숨을 죽였다
내 일처럼
선뜻 나선 50척 고마운 어선들
그 애타는 마음
알까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살아서 만날 수 있었을 것을
비상 출동한
봄 바다에
그대 살리지 못한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축산 바다」 전문
이 시는 영덕군 축산 바다에서 난 사고를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다. 어느 “봄날 아침 그물을 놓으러/바다로 나간” 어부가 사고를 당한다. 근처 “50척 고마운 어선들”이 내 일처럼 나서 구조를 하고, 울진해양경찰도 출동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부는 살아서 항구에 돌아오지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봄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던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일찍이 정지용 시인은 시 「바다 9」에서 바다를 “푸른 도마뱀 떼”라면서 “흰 발톱에 찢긴/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라고 했다. 시인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이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사고의 진실은 바다만이 알고 있는데, 다시 잔잔해진 바다는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흔히 ‘두 얼굴의 바다’라고 하는데, 시인은 그런 바다를 통해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풍랑주의보 강한 바람에/후보 바다는/ 첫사랑 기억”(「후포 5일장」)을 떠올린다. 부정보다는 긍정, 뒷면보다는 앞면, 그리고 시집 1부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 중 어느 계절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보여주는 것은 시인의 성정이 선善함에 기인다.
수평선
가슴 흔드는
저녁놀은
오지 않는 당신
기다리고 있는데
할멈,
나는 언제나 당신 손 잡고
연기 모락모락 나는
지붕 낮은 집 마당에서
저녁상 마주 앉을 수 있을까
-「태안 연가戀歌·3 -꽃지 할미할아비 바위」 부분
그믐달이 의지되는
쓸쓸한 저녁 밥상
뻐꾸기 울음이
가슴을 파고 든다
-「부고訃告·2」 부분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는 것萬事知 食一碗”이라는 해월 최시형의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명을 나누는 행위이다. 밥의 이치를 아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 생명의 소중함을 터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은 하루해가 지고 저녁놀이 질 때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와 “쓸쓸한 저녁 밥상”, “지붕 낮은 마당에서” 마주 앉아 먹는 ‘저녁상’에서 그리움의 정조를 길어 올린다. 엄마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과거나 가족과 떨어져 혼자 밥을 먹으며 가족을 생각하는 현재가 만나는 교차점에 밥이 상존한다. 하지만 그 밥상은 가난하거나 외롭지 않다. 밥상 너머로 그리움과 사랑이 잔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시인이 한 끼 밥 앞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과 ‘희망’ 때문이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새벽 열차의 기다림”(「기다림은 행복하다」)이나 “쓰러지고 쓰러지더라도/다시 일어나는”(「영일만에서」) 사람들로 인해 “다시 희망이 생겼”(「후포의 봄」)기 때문이다. 아니 희망이 생겼다기보다 시인의 마음속에 늘 희망의 씨앗이 존재한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이 기다림과 그리움이지만 이들에게 끊임없이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희망이다. 그 희망의 발원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과 함께한 ‘밥’이다. 시인에게 밥은 그리움, 사랑. 희망 그리고 삶이 힘겨울 때마다 견딜 수 있게 해준 힘이라 할 수 있다.
‘국수’ 하고 말하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사발
밥보다 많이 먹던 시절
아!
아버지
-「국수」 부분
노을 한 바가지 가져와서 저녁 밥물로 안치고 그대를 기다린다 낮달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지켜보고 물 빠진 갯벌에 피곤이 날아든다 어망을 걷지 못한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 만장 펄럭일 꿈을 꾼다 땅이 되어버린 바다는 끝내 바다를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늘어나는 헛구역질에 꼬시래기가 자란다 평택항에서는 날마다 바다가 달아나고 그 뒤를 쫓아가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살아있다
-「평택항에서」 전문
밥과 달리 국수는 가난과 슬픔의 대상이다. 단지 밥보다 국수를 더 많이 먹어야만 했던 가난한 시절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 먹을 것도 부족한데 “어깨를 바싹 붙”이고 자식에게 국수를 덜어주던 그 ‘온기’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수’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글썽해진다. 몸의 허기를 채워주던 국수가 마음의 허기로 남아 “눈물 한 방울”로 나오고, ‘바다의 국수’로 불리는 꼬시래기국수 한 그릇 먹을 때도 아버지가 먼저 생각나 헛구역질을 한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24년 전 아들이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이하 「전철역에서」)가 자리 잡고 있다. 딸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깃발처럼 자랑”하던, “어망을 걷지 못”하고 “만장 펄럭일 꿈”을 꾸던,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읽”(‘태안 연가戀歌·4-신두리’)어주던 아버지를 시인은 아직 보내지 못했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이하 「식목」)라며, 내가 보내지 않으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하여 “아버지의 제사 때면/가슴 속까지”(이하 「아카시아 꽃」) “그리운 꽃”이 피어난다.
시인이 바다에 있는 동안만큼, 딸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몸은 떠났으되 혼魂은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하여 시인은 “그 바다에 가면”(이하 「그 바다에 가면」) 잊었던 “유년의 꿈”도 찾고, “만나지 못해 애태우던/당신도 만”나고, “내 존재의 이유도/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직업의식이 한데 어울려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을 다 내려놓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인식 또한 필요할 것이다. 바다는 늘 거기 있어도 스스로 바다라 하지 않는다. 지용의 바다는 재재발렀다.
*김정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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