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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허연/대표시 칠월 외2편/신작시 이별의 서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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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48회 작성일 22-12-2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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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허연/대표시 칠월 외2편/신작시 이별의 서 외1편 


대표시


칠월 외 2편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은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을 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신작시


이별의 서 외1편


허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파스타를 고르다가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있었다는 것 뿐 


그 사이에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 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져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루드비키아가 피어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를 찾아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오히려 누군가를 살게 했을지도 몰라 

더 이상 한심해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할 일을 다 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를 





중심에 관해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 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시작메모


시 쓰는 자들은 제 몸이라도 아파야 한다. 절창은 아픈 자에게만 찾아오는 계시 같은 것 아닐까.

절창을 기다린다면 인생이 아프든, 세상이 아프든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자기 몸이라도 아파야 한다.





*허연 2015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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