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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신작시/가신들의 결혼식 외 1편/김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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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75회 작성일 11-12-23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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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일

  가신들의 결혼식 외 1편


귄츠―민델, 민델―리스, 리스―뷔름 행진곡에 맞춰 어린이들은 행진한다 궁지의 극지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리고 헤어졌다 금세 또 만났다 다시 녹아 증발할지도 모를 몸과 불안한 태생으로 극지의 궁지에서 우리는 만났다 유빙의 혈족인 우리 어린이들은 지금 미정형의 도형으로 파도 위에 떠서 혀끝에서 녹는 솜사탕처럼 녹는다.


오로라 면사포를 뒤집어쓴 당나귀와 영영 어린이인 나는 결혼식장으로 입장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내뱉었던 의성의태어들만 빼곡히 기록해둔 낱말수첩을 주례는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또 잃고 또 잊고 귄츠―민델, 민델―리스, 리스―뷔름 행진곡에 맞춰 우리 어린이들은 퇴장한다.


이것으로 간결한 결혼식은 모두 끝이 났다 나의 어린 신부여 쏟아진 가신家神의 뇌수 같은 회백색 파도무늬 드레스를 걸치고 지쳐버린 당나귀의 잔등에 올라탄 오늘 처음 보는 나의 신부 처음부터 끝까지 얼음조각처럼 차갑고 푸르스름한 웃음을 베어 물고 있는 저 새하얗게 그을린 얼굴의 계집아이는.


우리 어린이들이 무럭무럭 사라지며 만나고, 다시 어린이들을 낳았는데 그 어린이들이 다시 사라지며 만나고, 어린이들을 낳기 직전인데 그렇게 항상 계속하여 직전인데, 극지의 궁지에서 유빙이 떨어져 나가듯 궁지의 극지에서 어린이들이 뚝 뚝 떨어져 나가는데 얼음들이 망망한 물속에서 깊은 키스를 나누듯 아주 잠깐만 하나가 되는데 엄숙한 서약 따위가 필요할까. 필요하다 그거라도.


귄츠―민델, 민델―리스, 리스―뷔름 엇박자에 네 발을 맞춰가며 하객인 노새 한 마리가 쭈뼛쭈뼛 우리에게 다가와 그런데 사랑하나요? 묻는다면, 잠깐 이쪽으로 와서 언 발굽이나 녹이세요, 라고 말하지 피로연의 불가로 이끌지 네 개의 발굽 검은 숯처럼 호호 불며 불 피워가며.


일찌감치 밤하늘로 부케처럼 던져진 달무리는 며칠 밤새도록 저토록 천천히 떨어질 테니 그믐날만 하늘을 날기로 약속한 펭귄들이 받아 가로챌 테니 잠깐 이쪽으로 와서 언 발굽이나 녹이고 말씀하세요, 라고 지친 노새를 내 옆에 앉히지 불 가까이 눕히지 나는 그의 잔등을 베고 누워, 사랑이라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셨어요? 물으며 둘이 함께 도란도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지, 망망대해로 노 없는 돛배처럼 흘러가고 있는 이 불가에서.





복화술사

 

내게 단 한 개의 지우개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가장 먼저 입술로 가져갈 것이다


오늘도 내 입술은 붉고 푸르스름하다

내 입술은 저녁의 대기 중으로

적적하게 녹아내리고 있고

내 셔츠 왼쪽 가슴께의 작은 포켓에는

앵무새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니다

다시 보니 심장의 일부가 붉게 불거져 나와 있다


키가 무섭게 자라던 열두 살 생일

낮잠에서 깨어보니

입술에 낙서가 되어 있었다

입술 위에 커다랗고 시커먼 입술이 그려져 있었다

입술이 커다란 입술에 시커멓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처마까지 내려온 검게 빛나는 입술이

내 입술을 앙물고 있었다

그 입술은 내 입술을 금관악기를 불듯 불며

내 몸속으로 음표들을 쏟아 붓고 있었다

나를 풍선 불듯 불고 있었고

나는 공중으로 떠오르며 낯 뜨거운 고백들을

나도 모르게 자꾸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뼈가 없고

온몸이 목탁처럼 둥글고 단단해졌다


내가 공터의 수양버들처럼

무수히 많은 목젖을 가진 오늘 밤

빈 방에서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빈 방이 맞는가 아닌가

다문 내 입술에서 낱말들이 흘러나온다면

그것은 말이 맞는가 아닌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자음과 모음들이

서로 끌어안지 못하고 흩어진다면

벌레처럼 내 성대에 구멍을 판다면

그것은 벌레가 맞는가 아닌가


처마까지 내려온 검게 빛나는 입 속으로

보름에서 그믐까지 하늘의 하얀 목젖이

나선형으로 공명하며 떨어지고 있고

나는 그 복화술사의 캄캄한 입 속에 담겨 있다

그 속에서 매일 밤

나는 두툼한 지갑처럼 입술을 도둑맞았다

익사체처럼 강변으로 밀려온 새파란 새벽

내 입술은 텅 빈 채 새벽 속에 버려져있다

사르르 복통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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