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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신작시/즐거운 소개 외 1편/박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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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하
즐거운 소개 외 1편
골똘한 난생의 동물,
오래 쓴 베게처럼 움푹합니다
케이크 상자에 매달린 성냥만큼 분명하고
항구의 얼음만큼 자유로우며
벨기에 와플처럼 모호합니다
원더우먼 놀이를 좋아합니다
우산살처럼 급진적입니다
굴러가는 푸른 편자입니다
웅크린 새의 검은 등입니다
유독가스를 마신 창백한 손등입니다
한밤의 고양이처럼 상냥합니다
옷깃에 주렁주렁 낙타를 달고 다닙니다
고원의 바람에 오르고 있습니다
유목을 상정하고 정처를 숨깁니다
당신에게 눌렸던 그림자입니다
그 때 마신 맥주의 거품입니다
너의 머리카락을 잘라 준 가위,
네가 잃어버린 구두 한 짝,
시인이 빠져 죽은 맨홀입니다
다섯 개의 칼날을 가진 별
쏟아져버린 핏빛 포도주
네 눈동자에 퍼진 붉고 아픈 형편입니다
어떤 노르스름한 여관방
댓돌에 매달려 있는 모래 세 알
일억 년 동안 그 세 알의 모래에 부딪고 있는
단 한 번의 일몰입니다
나에게 죽어버린 나
따갑게 늘어선 8월의 흰 벽
뒤에서 들려오는 모르는 언어
거울에 비친 달력입니다
너에게 없는 너,
이 한없이 즐거운 부재입니다
첫눈의 세계
소녀가 눈썹을 쓰다듬고 있다
암흑이 봉투를 밀봉하고 있다
바람이 별의 입술을 만지고 있다
죽은 풀이 두근거리고 있다
너의 책상서랍에 편지가 들어 있다
거기서 우리가 껴안고 있다
사랑이 망명을 결심하고 있다
그 나라가 불타고 있다
오늘이 어제를 미워하고 있다
어제가 내일을 부서뜨리고 있다
산기슭에 묻힌 흰 개의 주검이 드러나고 있다
자명종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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