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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신작시/숭어 외 1편/박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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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인
숭어 외 1편
어둠의 수문이 열리고
느린 강 옆을 산길 따라 오른다
잡음처럼 바람이 밀려온다
휘어지고 꺾어지는 기억이 따라 붙는다
산의 정상에 어산불영魚山佛影*이 있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그리움은 가팔라진다
저녁강의 수면 위로 붉은 물고기 떼가 날아오른다
비늘에 귀를 살며시 문지른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강물은 어깨를 들썩이며
아래로 아래로만 밀려간다
만어사萬魚寺*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거기 가만히 고여 있다
퀭한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본다
언제쯤 나를 낳고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내 오래된 번민이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오른다
*어산불영魚山佛影:만어사 앞 널찍한 너덜지대의 물고기떼가 변한 바윗덩이들로 이루어진 돌더미.
*만어사萬魚寺:수만의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경남 밀양의 사찰.
바람을 파는 사나이
에어컨을 사시면 선풍기를 덤으로 드립니다
대형 할인매장 현수막이 바람을 흔들고 있다
온종일 매장이 토해내는 박스를 치우는 사내
에어컨 밑 헐겁게 돌아가는 선풍기 옆에
증정품처럼 앉아있다
바람 한 가닥이 사내의 늑골과 척추골을 뚫고 밀려 나간다
몸 안의 공기주머니에서 한숨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내가 만든 뽀얀 새들이 담배 연기 속에서 흩어진다
둥지를 찾지 못하던 다른 새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사내는 한참 동안 새가 날아간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임시직인 사내가 비틀거리며
발뒤꿈치를 들어올린다
깡마른 그의 그림자가 조금씩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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