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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평 권정일 시인의 작품세계/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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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평 권정일 시인의 작품세계/강동우
현대시는 자아를 찾는 수인囚人이다
―김구용
1.
시는 우리의 삶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계의 살아있는 충만함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체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자 평가이며,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시는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는 개인의 체험과 사상에 따라 각각의 현실과 맺고 있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시인은 경험을 위주로 현실을 드러낼 수도 있고 직관과 심상을 수단으로 현실을 그릴 수도 있다. 또한 묘사가 위주가 될 수도 있고 묘사보다는 창조적 직관이 주가 될 수도 있다. 권정일은 경험보다는 창조적 직관을 수단으로 ‘묘사’보다는 ‘창조’의 자세로, ‘기억에 의존하는 현실’을 ‘상상력에 의존하는 현실’로 바꾸려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시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의 제한된 체험을 넓히는 상상력에 있다. 상상력에 의해 그의 시는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상황과 행위의 정서적, 지적, 도덕적 함축에 대한 감각을 깊게 한다.
권정일의 시는 전통 서정시에서 보이는 자아의 동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자아들이 시 속에서 충돌하고 돌출되어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문득문득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러니까 권정일의 시적 주체는 시 속에서 살아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가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안에서 시적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오히려 존재의 결여를 노래하는 듯하다. 이런 존재의 결여가 그의 시에서는 자아 찾기의 과정으로 드러난다. 다음의 시 「플라톤을 패러디하다」를 보자.
-창문만 바라보는 시계가 있다. 시계는 등을 벽에 대고 평생 시간만 돌린다. 시계는 창문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다. 시계 안에는 같은 표적을 바라보며 시간을 서술하는 시계가 있고 시계 뒤에는 문이 되고 싶은 벽이 있고 벽 오른쪽에 문고리이고 싶은 내가, 벽 왼쪽에 기어이 빠져나와야 하는 시계를 모방하는 시계의 그림자가 있다. 창문과 시계 사이 좁은 통로를 가끔 내가 지나간다. 시계는 창문에 어리는 내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 시계는 내 그림자를 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계는 시선이라 뒷면이 없다. 시계는 결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내가 아니다
시계가 복사해낸 시간의 그림자다
―「플라톤을 패러디하다」 전문
이 시에서 “시계”는 결코 ‘나’와 소통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시계는 창문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가끔 창문과 시계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가기도 하지만, 시계는 창문에 어리는 “나”의 그림자만 볼 뿐이며, 그 그림자를 “나”로 착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계’를 ‘시선’으로 처리하고 있는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인에게 시간은 뒷면이 없는, 그러니까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벽을 등에 대고” 오직 하나의 시선만을 가지는 시계는 결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 때문에 시인에게 과거의 기억들이나 체험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과거는 과거로 존재할 뿐이지 충만한 현재로 재탄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사실 나는 내가 아니다/시계가 복사해낸 시간의 그림자다”라고 언술한다. 이 말은 나의 ‘존재’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흔적만을 남기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은 존재의 충만보다는 오히려 존재의 결여에서 찾아야 하며, 그것은 ‘흔적’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사건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 ‘시계’가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그녀의 시가 ‘존재’ 혹은 ‘자아 찾기’의 과정에 있으며, 그것은 주체의 결여나 소멸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내’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시에서 나의 존재는 시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된다. “시계는 결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언술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계를 본다’라는 의미를 전복시킨다. 내가 시계를 보는 게 아니라 시계가 나를 본다는 인식, 그리고 그 시계는 정작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인식은 개인으로서의 주체가 소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으로서의 주체가 소멸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주체라는 개념은 하나의 허구 혹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존재’는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허망함은 현실이 폐허이며 그 속에 자신이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시 「꽃의 집」을 보자.
꽃은
아찔한 벼랑에서 핀다
정적과 바람 사이
꽃 대궁 둥근 알집이
1초2초5초
어머, 꽃 핀다
가느다란 꼭대기 흔들리는
벼랑이 꽃의 집이다
공중의 누각
한 채의 격랑으로
흔들리는
벼랑을 묻는다
몸의 중심에서 가장 먼 바깥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9층이 내 벼랑이듯
벼랑에 매달린 저 집이 궁금하다
꽃에게 나에게
뿌리 들려 사는 일은
벼랑 아닌 적 없기에
선문답
활주로가 놓이고
세상 모든 꽃은
벼랑 끝에서 이륙과정을 밟는다
활주로를 치고 날아오른다
몸의 집, 가장 아찔한 벼랑으로
―「꽃의 집」 전문
이 시의 첫 두 행, “꽃은/아찔한 벼랑에서 핀다”는 구절부터가 일상적 의미가 탈락되어 있다. 보편적인 경우라면 꽃은 벼랑이 아니라 땅에서 혹은 나무에서 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인은 ‘벼랑’에서 꽃이 핀다고 언술한다. 벼랑에서 꽃이 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런 발상 자체가 시인의 의식이 황폐하고 위태로움을 드러내는 셈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벼랑’은 현실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의식 내면을 드러내는 구성된 대상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은 ‘벼랑에 매달려 있는 집’에 비유된다. 꽃의 집이 벼랑이듯, 시인의 내면을 ‘벼랑’으로 묘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디디고 있는 현실에 대한 회의를 노래하는 바, 그것은 사회적 문맥을 거느린다. 그가 현실에 대한 회의, 혹은 의식에 대한 회의에 빠지는 것은 그가 자아동일성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자아동일성을 우리는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의식적 주체라고 부를 수 있다. 시인이 제대로 사고할 수 없는 의식적 주체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처한 ‘현실’이 “정적과 바람 사이”, 즉 평온과 시련, 행복과 고통 사이에서 “한 채의 격랑으로/흔들리”기 때문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아파트 9층에서 “뿌리 들려 사는 일”과 벼랑에서 피는 꽃을 대비시켜 자신의 내면을 노래하는 이 시는, 결국 “세상 모든 꽃은/벼랑 끝에서 이륙과정을 밟는다”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삶에 대한 하나의 제유로 수용된다. 다시 말하면, 적에 대한 반항이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 혹은 존재 자체가 결국 벼랑 끝에 있는 삶이며 존재라는 그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인 셈이다. 인간 삶이나 존재자체에 대한 이런 위태로움은 그녀가 정착이 아니라 유목을, 상승이 아니라 추락을 지향하고 동경하는 자세로 나타난다. 가령, 그녀의 시 「비행법」의 전반부를 보면,
신생의 아침!
이제 겨우 추락하는 법을 익힌, 날개 터는 법을 좀 더 쉽게 배운 어린 새의 행보를 본다
솜털 묽은 발톱에 푸른 힘줄이 차오르지 않아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수많은 팔을 내밀자 물기 어린 날개가 펄럭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개를 접었다 펴는 쉼 없는 곡예의 아슬한 착지
어린 새는 느티나무의 첫 번째 주민으로 거듭난다
여물지 않은 부리로 느티의 겨드랑이를 긁어주고는 뒷발을 허공에 담근다
―「비행법」 부분
같은 시행들이 보여준다. “이제 겨우 추락하는 법을 익힌, 날개 터는 법을 좀 더 쉽게 배운 어린 새”는 느티나무의 첫 번째 주민이 되기 위해 상승하는 법이 아니라 추락하는 법을 먼저 익힌다. 어쩌면 어린 새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뿌리뽑힌 삶을 살아가는 위태로운 대상이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쉼 없는 곡예, 그리고 아슬한 착지. 뒤발을 허공에 담그는 행위 등 어린 새의 행보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 아니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을 했으리라.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이런 행위를 “나무의 진정한 주민이 되기 위한 유목의 시작”이며, “더 넓은 세상을 익혀 날개의 속도를 가로지른 후에 귀소할 것”이라고 언술한다. 그러니까 어린 새가 허공에 뒷발질을 하듯 방랑과 유목은 정착된 삶을 위한 필연적 행위인 셈이다. 이런 방랑 의식은 「와일드 켓츠」에서 주인의 따뜻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날것을 먹기 위해 신문지에 입을 쓰윽 닦으며 앞발톱이 길어지는 것은 흐뭇해 하는 고양이(러시안 블루)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도 ‘벼랑’의 이미지는 “노숙을 길들이기 위해 바닥을 오르는 계단”으로 대체되어 나타나며, 그 기능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권정일은 ‘벼랑’이나 ‘허공’에서 삶의 보편적 상징을 발견한다. 이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현실이라면 벼랑의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다. 시인이 현실적 삶의 중심에서 발견한 ‘벼랑’의 이미지는 전체 삶에 대한 통찰과 연결된다. 척박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시인은 내면의 ‘벼랑’과 ‘허공’과 접맥시킴으로써 우리 현실 속에 자리잡고 있는 ‘벼랑’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이런 위태로움과 황폐함, 그리고 주체의 소멸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중의 하나가 오늘의 사회가 보여주는 특수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자본주의의 고전적 토대는 개인들 간의 경쟁에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오면서 그런 경쟁 개념은 사라진다. 개인들 상호 간의 경쟁은 어디까지나 사고와 행동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그런 경쟁을 허용치 않기 때문에 사고나 행동의 주체성마저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삶은 조직되거나 관리되기 때문이다. 권정일의 시에서는 이런 자본주의의 현실이 주는 현실비판적 경향의 시들이 적잖게 보인다.
어떤 사람은 동물성이 아닌 그 순수한 식물성으로
코를 풀고
뒤를 닦고
글을 쓰고
집을 짓고
어떤 사람은 잡종이 아닌 그 순수한 유전자로
그림을 그리고
인형을 만들고
수의를 짓고
기도문을 쓰고
어떤 사람은 순수한 그 순수한 종이로
협약이 되고 총칼이 되고
서약이 되고 유서가 되고
신분이 되고 수갑이 되고
법률이 되고 벌레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종이를 주워 모아 최소한의 밥을 만들고
―「자본주의 혹은 종이」
이 시는 ‘종이’의 쓰임새를 예를 들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제목 “자본주의 혹은 종이”가 암시하듯 여기서의 종이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이 은폐하고 있는 모순에 대한 부정을 지향한다. 사람들은 종이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산물로 코를 풀기도 하고 뒤를 닦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며, 또 그림을 그리고 인형을 만들고 수의를 짓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협약이 되고 총칼이 되고 서약이 되기도 하고 유서가 되기도 하며, 종이로 만들어진 화폐로 신분이 상승하고, 그 때문에 수갑을 차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가 비판적인 것은 맨 마지막 연 “어떤 사람은 모든 종이를 주워 모아 최소한의 밥을 만들고”에 집약되어 있다. 모든 종이를 주워 모아 최소한의 밥을 만드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가 낳는 병폐를 대표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환경은 자본주의 시대를 지배하는 화폐경제의 논리와, 그런 논리로 지탱되는 ‘최소한의 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밥그릇 무기」에서 잘 보여준다.
달랑 한 채뿐인 산골의 빈집 사립을 들어서는 순간, 덩치 큰 개 세 마리가 일제히 양은 밥그릇을 주워 물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쭈글쭈글한
빈 밥그릇!
쇠사슬에 묶인 채 짖는 것을 포기한 순한 동공, 묶인 원주율의 정체성, 약 3.14:1, 원둘레와 지름의 비율 그 공간에서는 낯선 침입자보다 밥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밥그릇 무기」 부분
화자는 달랑 한 채뿐인 산골의 빈집에 들어간다. 그러나 큰 개 세 마리는 쇠사슬에 묶인 채 짖는 것을 포기한 순한 동공으로 일제히 각각의 양은 밥그릇을 지킨다. 이런 개의 모습은 밥그릇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듯, 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개가 “약 3.14:1, 원둘레와 지름의 비율 그 공간에서” 묶여 있듯이, 시인은 우리의 삶 또한 조직되고 관리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식한다. 사실, 우리 자신이 사고와 행위의 주체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혹은 사회 제도에 의해 구성되고 관리될 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자본주의는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키는 실체이며, 화폐는 그런 행위에 수반되는 투명한(순수한) 도구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오면서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사회적 역사적 실체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실체 개념이 그렇듯이,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화폐’(여기서는 “종이” 혹은 “밥그릇”을 말한다)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화폐는 물론이고 밥그릇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밥그릇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사회적 관계뿐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화폐’ 혹은 ‘종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고립과 소통 불능, 그리고 그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인용은 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혹은 종이」의 에필로그 부분에 “종이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식물의 섬유를 원료로 한 것’으로 결정하였다”는 언술을 통해 시인은 우리가 ‘순수’하다고 정의내리는 것들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시는 본질적으로 부정의 힘에 있다. 그것이 형식이든 내용이든 시에서 불온성이나 부정성은 일상적 경험이 은폐하고 있는 허위를 걷어내고 주어진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하며 그릇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시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부정의 힘을 갖는다. 그러니까 현실 속에서 기만과 은폐의 허울에 가려져 있던 비화해적인 세계의 모습은 이 같은 부정의 힘을 갖는 시의 언어를 통해 진실의 빛 속에서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내게 된다. 다음은 그녀의 시 「수상한 직업」이다.
예고 없이,
잡고 있던 줄이 팅, 끊어졌다. 그를 조율하던 하루는 늘어나기만 하는 고무줄이다. 헐렁한 아침 해를 따먹는 며칠, 종이꽃처럼 물기가 없다.
강 하류,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허가받지 못한 일상들, 틈에서 그도 실직의 비감을 드리운다. 은밀할 것도 없는 그의 가랑이 사이로
중심 없이 쓸려가는 찌,
다른 엉덩이의 몫이 되어버린 나날, 하이팩의자가, 걸려들어 시야가 뿌옇다. 천년이 흘러간 것 같다.
낚았다. 미깝도 달지 않은 바늘에. 모처럼, 숭어. 살아있으므로. 미쳐가는 것들도 있다. 숭어의 아가미를 땄다.
가정통신문을 펼쳐든 딸 아이
-아빠 직업이 뭐야?
-응, 수산업!
꿈 없는 저녁을 발라냈다
―「수상한 직업」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된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풍자의 기법으로 그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직한 가장家長의 상황은 “예고 없이,/잡고 있던 줄이 팅, 끊어졌다.”는 언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경제 상황이 불안해지면서 예고 없이 실직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목격한다. 이것이 단순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실직한 가장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 딸아이가 가져온 가정통신문이다. 아빠의 직업을 적어야 하는 상황도 부조리하거니와 “수산업!”이라고 꿈 없는 저녁을 또 발라내는 현실은 더욱 우울하다. 권정일은 이 시에서 실직한 가장의 모습과 그 가정의 모습을 노래하되, 어떤 가식도 없이 뿌리 뽑힌 삶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사실 자신의 환경, 자신의 삶을 노래하되, 어떤 관념적 이데올로기에도 기대지 않고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현실비판적인 시에서 그가 다루는 소재가 대부분 이데올로기적 반응을 유발할 수 있고, 아니면 감정적 분노를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는 그런 반응이나 분노가 억제된다. 그렇다고 무슨 휴머니즘의 세계가 강조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그는 병든 주체, 소멸해가는 주체와, 그런 주체를 감싸고 있는 병든 객체(사회), 소멸해 가는 객체를 객관적으로 노래할 뿐이다. 주체가 병들고 객체 역시 병든 데에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교환가치가 계기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권정일은 주체의 소외를 통해 삶의 실패를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그것이 심화될 때 주체의 소멸은 자명할 것이다.
이런 권정일의 시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부정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시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부정의 힘을 갖는다는 것이 곧 시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일그러진 현실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자체의 완결성을 지향하는 창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어진 현실 상황과 시인의 창조적 능력간의 부단한 변증법적 교호작용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그의 시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유미적 환상에 유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우리의 눈을 새롭게 만든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3.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권정일의 시는 여타의 서정시처럼 자아의 동일성이나 주객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주체가 소멸된 자리,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 또한 이런 소멸된 주체의 자리에서 현실의 비의를 노래하고, 그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를 탐색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기억에 의존하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존하는 현실’을 노래한다. 때문에 그녀가 드러내는, 현실의 부정적인 양태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부조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기존의 현실비판시나 리얼리즘 경향의 시와 분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주객분리와 주체의 소멸에 대한 시들은 1930년대 이상에서부터 1980년대 해체시, 그리고 최근 젊은 시인들의 환상적인 시에 나타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권정일의 시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환상성이나 잡다한 요설이나 수다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건대 권정일은 언어에 대한 자각과 기법의 새로움 속에서 그녀만의 시적 방법론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이승훈이나 박상순, 그리고 같은 세대인 함기석이나 이수명 등과도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근원에 대해 회의하고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다는 점, 그리고 창조적 직관에 순응하고 창조적 직관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는 김구용의 시적 경향과 맥이 닿아 있다. 물론 김구용의 시적 실험이 주로 산문시를 통해 이루어진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찾는 방법으로 존재의 충만함이 아니라 존재의 부재, 그리고 존재의 유동성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문명비판적 시적 경향들은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학이나 계보학 속에 그녀를 위치시키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권정일만의 고유한 주제적 집념과 형식적 외장, 그리고 그녀의 시 중에서 성취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독립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권정일은 독자적인 개인문법을 견지하면서도, 최근 젊은 시인들에서 자주 보이는 광기의 감수성이나 자폐적인 경험 유형, 그리고 초현실적인 환상성을 거느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은 그 가능성만으로 우리들에게 새롭고 풍요롭게 다가온다. 시적 실험에 치중한 나머지 퇴폐나 고립을 자처하는 일부 신세대 시인들의 소통 부재와는 달리 그녀의 시에는 시적 실험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소통되는 지점이 있고, 자기동일성의 붕괴를 드러내면서도 이성적 질서의 억압을 비판해 들어가는 불온성이 매개되어 있다. 물론 더욱 섬세한 경험유형을 시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찔한 벼랑에서”(「꽃의 집」) “더 넓은 세상을 익혀 날개의 속도로 가로지른 후에 귀소할 것”(「비행법」)임을 짐작하기에 권정일의 시의 전개를 우리는 지속적으로 지켜보야야 할 것이다.
강동우∙2001년 ≪현대시≫로 평론 등단.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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