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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정우영의 시평 에세이/정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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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9회 작성일 11-12-28 20:25

본문

 나를 넘어 너에게로 가서 너와 함께 나를 되세우는 것

-손병결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요즘 나는 예기치 않은 재앙과 불행과 공포에 짓눌려 있다. 닥쳐오지도 않은 재난을 걱정하면서 이처럼 리얼하게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 <투모로우>와 같은 할리우드 재난 영화나 코맥 매카시의 <로드>류 소설 독후 소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약 닥쳐온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무얼 할지, 무얼 할 수 있을지 꼽아본다. 속수무책이다. 지진은 예보가 없고 초대형 해일은 피해갈 방도가 없다. 초일류 국가라고 하는 일본이 지진과 해일, 방사능 누출 등의 재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하찮고 초라한 인류와 그 문명을 떠올린다.

지구를 점령(과연 점령일까 싶지만)했다고 여긴 인류는 지금 너무 오만해져 있다. 고개 수그려야 한다. 자연과의 첫 번째 교감은 겸손이다. 땅에 엎드려 입 맞추는 오지 원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의 각성覺醒 없이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속도전을 펼친다면 인류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자연재해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어찌 자연재해뿐이겠는가. 오만한 인류에 의해 저질러지는 끔찍한 대재앙이 빈발해질 것이다. 식량 부족, 원전 폭발, 석유 대전쟁, 물 고갈, 종교분쟁, 민족 갈등, 마약 밀매…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으스스한 현실들에 눈떠보라. 무엇 하나 인류의 재앙 품고 있는 뇌관 아닌 게 없다.

지진 대해일에 휩쓸리지 않은 나의 안전을 위안하면서 오늘 나는 움츠러들고, 혹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을까 온몸을 건사하면서 오늘 나는 무기력해진다. 내일도 나는 이렇게 지낼 것이다. 망각이 몰아쳐 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당분간 이런 염려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지금의 안위는 기실 가상이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폭발성을 내재하고 있다. 일본 대재앙과 원전 누출 사고는 그 점을 확인해 준다. 그것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간에 우리는 이처럼 극히 불안한 현대에 내몰려 있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지뢰밭이다. 단지 우리가 그 지뢰들을 눈으로 보지 못하므로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 곁에는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를 이미 견뎌낸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잃어버렸으나 암흑 같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을 찾은 사람들, 느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불안한 현대를 헤쳐 가는 마음의 길이 열린 사람들이며 세상에 스며 있는 빛을 읽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 나는 구원을 본다. 대재앙도 이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앞은 보지 못하나 희망을 보는 사람들. 이들로 인해 오늘 나의 공포는 한결 누그러진 채 위안의 하루를 맞고 있다. 그들의 지팡이는 희망을 두드리는 지상의 울림 아닐까 싶다.


2. 보이지 않는 자가 기록한 새로운 이치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손병걸이며 그 위안서가 바로 그의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이다. 세상의 잣대로 표현하면 손병걸은,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시각장애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집에는 장애가 없으며 장애인도 없다. 그는 오히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제삼의 감각을 펼친다. 소리로 읽어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그의 능력은 보기 드문 신개지新開地를 열어 놓고 있다. 보이지 않는 자가 기록한 새로운 경치이자 새로운 사물의 이치이다. 

문학은 냉정하다. 세상을 독특하게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글로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가치를 두지 않는다. 울림 가득한 몸짓과 언어로 숙성시키기까지에는 적잖은 내공內功이 필요하다. 내공 없는 발언은 어설픈 제스처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문학에는 장애가 없다. 장애에 기반한 발언들은 문학으로 크지 못하고 교훈과 계몽 범벅의 문학 시늉에 그치고 만다. 진정성을 문학적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학만의 방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로 익지 않은 문학은 때로 독자에게 볼썽사나운 억지 감동을 강요하게 된다. 독자들은 곧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손병걸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적공은 만만찮다. 그는 소리를 ‘볼’ 줄 아는 시인인 것이다.      

 

저수지 둑길을 걷는데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

천 년의 잠을 깨는 것 같아서

화들짝 귀가 열렸다


가던 걸음 멈추고

몸을 낮추니

이름 모를 풀잎들 날갯짓 소리

출근길 와글와글 풀벌레 소리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는 흐를 수 없는 물일지라도

아래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끝내는 푸른 몸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

제아무리 하찮은 목숨일지라도

그만큼의 소리를 지니고 있었구나!


내 몸을 관통한 소리 따라

스르르 일어서는 바람,

캄캄한 길 뒤틀린 관절

유쾌한 소리로 일어설 수 있으려니

어둠 속 풀 한 포기라도 괜찮겠다

―「소리를 보다」 전문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눈이 닫히자 소리가 열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아마도 눈이 보일 때는 눈과 귀로 분산되었던 신경이 그렇지 않게 되자 청각으로 모아져 예민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경우도 그런 모양이다. 눈이 닫히자, “화들짝 귀가 열렸다.” 나는 이 ‘화들짝 열린 귀’에 주목하고 싶다. 그 귀는 순순히 열린 귀가 아니라, “천 년의 잠을 깨는 것 같”이 깜짝 놀라 열린 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각’이라고 할까. 화들짝 열린 귀는 그런 ‘깨달음’의 귀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귀에는 “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 “이름 모를 풀잎들 날갯짓 소리/출근길 와글와글 풀벌레 소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신경으로 보는 눈은 닫혔으나, 마음의 눈이 열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깨우친다. “제아무리 하찮은 목숨일지라도/그만큼의 소리를 지니고 있었구나!”하고.

이 지점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도는 반전의 포인트이다. 아마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실명의 공포와 자신의 불행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저수지 둑길을 걷는데/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화들짝 귀가 열”린 것이다. 그는 그 열린 귀로 이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엄숙한 존재감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캄캄한 길 뒤틀린 관절”일지라도 “유쾌한 소리로 일어설 수 있으려니/어둠 속 풀 한 포기라도 괜찮겠다”고 스스로의 자존自存을 확인한다.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손가락 끝에 박힌 눈」 전문


자존의 길이 열린 그는 귀로만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도 본다. 눈이 손가락에 가 달린 것이다. 그가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이라 말할 때 그 눈은 촉각의 눈이다. 오직 시각장애자만 새로이 부여 받은 촉각으로 읽는 살점의 눈이다. 그래서 “깨진 유리컵에 베”이기라도 하면 그 손가락 눈으로는 세상을 읽어낼 수 없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플 것인가. 그 아픔은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한나절 봄비 내린 후/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그 푸른빛의 살점들”을 연상토록 자극한다.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과 “푸른 빛의 살점들”의 대비가 놀랍다. 그렇다. 새싹들은 대지의 푸른 살점들 아닌가. 촉각의 인식이 예리하다. 촉각 인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에서 오싹한다. 내게는 어쩐지 이 부분이 점자책을 읽는 손가락으로 읽히지 않고 점자책 자체로 읽힌다. 점자책이라는 사물이 실은 통증을 삼킨 상처이며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로 보이는 것이다. 촉각 인식의 전이轉移가 여기서 일어난다.


3. 각의 시와 통의 시

촉각 인식의 전이는 다음과 같은 각의 고양高揚으로 나아간다. 그는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열 개의 눈동자를” 뜬 것이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전문


그는 그때까지 “직접 보지 않으면/믿지 않고 살아왔다//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두 눈동자를 굴렸다.” 겉으로 보이는 걸 실체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온 것이다.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며 확인했다고 믿은 모든 관계가 실은 허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 개의 눈동자를 잃고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를 느끼고서야 비로소 그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여유를 배”운다. 그리고 그즈음 그는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열 개의 눈동자를” 뜬다.     두 개의 눈동자를 잃었으나 열 개의 눈동자를 얻은 것이다. 어디 열 개뿐이겠는가. 천수관음처럼 수천 개의 눈동자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으로 보는 눈동자는 셀 수 없을 것이겠기 때문이다. 가상이지만 어쩌면 그 가상의 눈동자가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진실은 겉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이면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이면을 읽어내는 능력을 직감이라 부른다면 그 직감은 범상함보다는 결핍의 예민함 속에서 더 발현되곤 한다. 표정을 감출 수는 있어도 소리의 미세한 떨림과 들고나는 숨결의 흐름을 숨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고 하여 곧 삶의 길이 열리는 건 아니다. 각의 고양高揚이 도인처럼 유지되기는 정말 어렵다. 각의 고양高揚은 순간이고 절망과 좌절은 연속된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 「죽」에서 원군을 얻는다.


느닷없이 두 눈 잃어

죽을 둥 살 둥 술 퍼마시고

빗속에서 청승 떨다

자리를 깔고 드러누웠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

입맛마저 뚝 떨어진 내게

어머닌

독한 약으로 몸살을 다스려야 하는데

빈속 상한다고 죽이라도 먹으라 했다


마지못해 뜨거운 죽만 퍼먹으며

이불을 싸매고 있다가

사흘째 접어드는 아침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집을 나선 길

변한 것 하나 없이 캄캄하건만

낯선 바람, 쏟아지는 햇볕에

온통 죽을 맛이던 세상이

은근히 살맛이 나게 느껴지는 것인데


내 몸 속에서 식은 죽이

펄펄 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죽」 전문


죽이라는 말은 참 묘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품고 있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 처음 먹는 음식이 대부분 죽이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뜨는 숟갈에 얹힌 죽에는 흐릿하게나마 죽음의 맛이 스며있을 것이다. 씁쓰레하게. 그러나 그 죽은 “온통 죽을 맛이던 세상이/은근히 살맛이 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다. 죽은 “느닷없이 두 눈 잃어/죽을 둥 살 둥 술 퍼마시고” “오들오들 떨리는 몸/입맛마저 뚝 떨어진 내게” 삶의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그는 이제 “모처럼 집을 나선 길/변한 것 하나 없이 캄캄하건만” 삶의 어떤 에너지를 느낀다. “낯선 바람, 쏟아지는 햇볕에” 응전할 수 있도록 “내 몸 속에서 식은 죽이/펄펄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어머닌/빈속 상한다고 죽이라도 먹으라 했다”에 언급되는 어머니이다. 요컨대 삶의 온기가 되는 죽을 내게 공급하는 것은 어머니, 곧 모성의 힘이다. 모성의 힘이 그에게 재생을 향해 펄펄 끓는 의지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를 제공해 준 것이다.


아빠 식사하세요

밥때만 되면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이제 아홉 살짜리다


밥상에 앉으면

이건 김치, 빨개요

요건 된장찌깨, 뜨거워요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요란한 밥상이 물러나면

커피는 두 스푼

설탕은 한 스푼 반

크림은 우유가 좋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깡충깡충 커피를 가져다 준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전문


모성만이 아니다. 아이도 그를 키운다. “이제 아홉 살짜리”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밥때만 되면” “아빠 식사하세요” 외친다. “밥상에 앉으면/이건 김치, 빨개요/요건 된장찌깨, 뜨거워요/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두 눈 안 보이는 아빠를 챙겨 주려 애쓰는 아이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그 부산함은 짜르르 시를 감싸면서 시 이면을 울리고 동시에 읽는 이를 감동시킨다. 이 시에 받아먹는 아빠의 느낌은 구체적으로 담겨 있지 않으나 밥상에서 아빠는 얼마나 울컥일 것인가. 보이지 않는 그런 울컥임이 기실 이 시의 힘이다. 아마도 이런 것이 진정성의 동화同化 아닐까.


4. 나를 넘어 너에게로 가서 너와 함께 나를 되세우는 것

앞의 시 「죽」과 위의 시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의 핵심은 무얼까. 나는 ‘식구의 정’이라고 본다. 이 정이 그의 각을 밀어주는 힘인 것이다. 이 정 없이는 그의 눈도,각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정 덕분에 그의 시는 각 너머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통이다. 깨달음 ‘각’은 나와 나의 울림이다. 이것이 나와 너의 어울림으로까지 확장되기 위해서는 서로 통해야 한다. 통하지 않으면 개별 체험이나 특수 범주에 머물 개연성이 높다. 보편적 정서 혹은 시공간을 넘어서는 감동은 ‘각과 각의 어우러짐’인 통감通感에서 나온다. 나와 너, 곧 우리가 서로 어울려 두루 감동으로 들린 상태이다. 소통 교감이 최고조에 이른 경지라고나 할까.

좋은 시는 이처럼 ‘각과 각의 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의 시(시인)와 시의 각覺(독자)이 통할 때 좋은 시는 탄생되는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손병걸의 시 「빛의 경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통할 것인가.      


점자책을 펼치니

와르르 쏟아진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팽팽한 점자처럼 별들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기에

거대한 경전을 읊는 것이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삶이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라고,


밤새 소곤대는 별들을 따라 걷다 보니

짓무른 손가락 끝이 화끈거리고

어깻죽지 목덜미가 뻐근하지만

몸속에 알알이 박힌 별들 탓일까?


창문 너머 별빛 점자를 찍어가는

가파른 새벽 발소리

맨홀 속 은하수, 물소리도 환하다

―「빛의 경전」 전문


점자로 읽는 우주가 환하다. “창문 너머 별빛 점자를 찍어가는/가파른 새벽 발소리” 활달하고 “맨홀 속 은하수, 물소리도 환하다.” 그는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중이다. “밤새 소곤대는 별들을 따라 걷다 보니/짓무른 손가락 끝이 화끈거리고/어깻죽지 목덜미가 뻐근하지만/몸속에 알알이 박힌 별들” 덕분에 그는 우주라는 거대한 경전을 읊을 수가 있다. 별들의 이야기와 은하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환희이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환희.

「빛의 경전」에서 손병걸은 비로소 자신을 벗고 자유로워진다. 여기에는 장애자로 살아가는 이의 불행감이라든지 원망이라든지 좌절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남들과 다른 일상을 자기 것으로 오롯이 받아들여 승화시키려 애쓰는 이의 염원이 밝다. 이런 게 통이다. 나를 넘어 너에게로 가서 너와 함께 나를 되세우는 것.

이와 같은 통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대재앙 같은 것도 능히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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