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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백석의 시/남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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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17회 작성일 11-12-2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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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백석의 시/남승원 

서사의 길 끝에서 만나는 시적 진실




八 院

-西行詩抄·3

백석白石



차디찬 아침인데

妙香山行 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처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慈城은 예서 三百五十里 妙香山 百五十里

妙香山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自動車 유리창 밖에

內地人 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車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內地人 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조선일보(1939.11.10.)


최근 개봉한 어떤 영화에는 적대관계에 있던 주인공 남녀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한 편을 암송하면서 마음을 열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성 간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그 미묘한 순간을 관객의 공감으로 이끌어야 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장면은 백석의 시를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만큼 백석이라는 시인과 그의 시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 남녀는 사실 북-남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출발했기에 북한에서 숨을 거둔 시인의 개인적 처지와 어울려 더욱 묘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백석 시인이 활동을 하던 당대에서부터 그런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아주 극단적으로 양분이 되었으며, 특히 임화 같은 이는 백석의 시가 “보편성을 가진 전조선적인 문학과 원거리”(「문학상의 ‘지방주의’문제」, ≪조광≫, 1936.10.)에 놓인다는,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혹평까지 내놓았다. 월북문인과 작품들의 해금으로 가히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된 이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등의 상반된 관점에 따라 각각의 방면에서 이루어져왔다.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에서부터 최근까지 백석의 시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연구자들의 문학적 관점이나 당시의 현실이 부여하는 책임감과 사명감 등에 좌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백석의 시세계에 대해 보다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에 따른 연구성과들의 축적과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의 꾸준한 관심과 호응에 힘입어 백석의 시는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을 두고 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일이 아주 낯선 일은 아니지만, 특히 백석의 경우 그 이유는 시인의 작품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기인한다. 일찍이 최재서가 “상당한 역량을 가지고 꾸준이 詩作을 발표하건만 한 번도 그 작품을 정면으로 문제 삼아 주는 사람이 없는 그러한 시인이 왕왕히 있다. 백석 씨가 그러한 시인이다. 그것은 결국 그 시를 어떤 카테고리에 넣고 평하여 좋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2월 시단평」, ≪인문평론≫, 1940.3.)라고 지적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일반 독자들의 고개를 다소 갸우뚱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백석의 시세계는 「여승」, 「여우난골族」 등에 드러난 토속적 정서나 일제 강점기 서민의 애환, 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드러나 있고 자야子夜와의 열애로 잘 알려진 연애감정 등으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쉽고 명확한 시세계를 가진 백석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다양하게 된 이유는 어째서일까.


2.

일상에서 정지停止의 순간이란 어떤 사건들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의미화과정이 말 그대로 완전히 멈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조건들은 새로운 의미관계를 맺기보다는 기존의 관계들을 해소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멈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회화, 조각, 사진, 건축 등의 예술 장르들은 이와 다른 양상을 갖는다. 예술장르들은 표현 양식상 필연적으로 정지된 순간과 결부되어 있지만, 그 순간에 이르게 한 창작자나 수용자의 의도가 서로 다른 수많은 의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작품들에 관계하는 모든 조건들이 실제로는 그 고정된 순간에 머물지 않게끔 한다. 오히려 말 그대로의 정지 상태에 머물렀을 때 작품들은 의미화작용을 멈춘 채 생명력을 잃고 마는 역설적 운명에 처한다.

20세기에 들어와 급속하게 예술 장르로 부각된 사진의 경우 이와 같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찰나의 정지된 순간이 그 본질적 속성을 결정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역시 다른 예술장르들처럼 앞서 언급한 역설적 운명을 지니고 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라면 사진의 예술적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용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이 시간이라는 조건은 사진을 가혹한 유통의 흐름 속에 내던지게 되고 결국 사진 속에 찰나의 순간을 통해 박제된 ‘윤리적 내용’을 퇴색시키는 방식으로 예술적 수준에 올라서게 된다.

그렇다면 문학, 특히 시의 경우는 어떨까. 시 장르 역시 시간의 거센 흐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흐름에 비껴서 있는 어떤 고양된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지속을 기도한다. 특히 백석은 자신의 시가 뿌리내린 구체적인 현실을 구구절절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찰나의 어떤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응축된 특정 장면이나 소재 등을 그리는 데 탁월하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에서 서사성을 가진 시작품의 전형으로만 다루는 「여승」의 경우도 사실 작품의 정서를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유지시키는 것은 서사적인 특질도 물론이지만, 1연에서 시작된 “서럽다”는 정서가 마지막 연까지 이어지며 압축된 소재인 “눈물방울” 그 자체가 더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묘향산으로 가는 “승합자동차”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린 계집아이”를 다룬 이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그 소녀를 둘러싼 몇 가지의 상징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을 따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시인 특유의 서사적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유일한 피붙이일 “삼촌이 산다고”하는 곳을 가기 위해 이제는 잘 입지 않는 옛날식  옷이나마 깨끗하게 꺼내 입은 소녀는 사실 그곳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길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주재소장 같은 이가 배웅 나온 것을 보면 그 집에서 더부살이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다가 더 이상은 지낼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이리라. 그나마 그럭저럭 지내왔던 곳을 떠나자니, 혹은 자신이 업어 키우다시피 하면서 정도 든 “어린아이”를 마지막으로 보자니, 혹은 갈곳도 마땅히 정해지지 않은 자신의 답답한 생활에 생각이 미치니 자신도 모르게 “느끼며 운다.”

소녀를 고용해왔을 일본인 인물이 나온다고 해서, 그리고 소녀가 울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이 소녀의 감정이 일제에 의해 탄압받는 우리 민족 애환의 상징이라 지적하고 돌아선다면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녀의 감정은 어느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상징적인 의미만을 얘기한다면 오히려 소녀의 눈물을 외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백석 시인이 안내하는 서사의 길 끝에서 우리는 소녀의 “손잔등”을, 그리고 소녀가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여승」에서 ‘머리를 깎는 장면’이 그렇듯이 시적 진술 상 이 작품에서 소녀의 ‘걸레 빠는 장면’은 물론 시인-관찰자의 상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시적 화자의 관찰과 진술은 시적진실poetic truth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서사의 길들은 소녀의 “손잔등”위로 고정, 응축된다. 바로 이것이 백석 시인의 시가 보편적 정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고도의 서정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인들의 앞에 근본적인 분열상태들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시의 언어적 측면에서부터 시적 진술은 이미 그 어떤 조화나 통합에 대한 시도도 무화시키는 차연différance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석 같은 시인의 경우 식민자본과 근대, 제국주의와 독립, 계급과 민족 그리고 분단 등 20세기 이후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거의 모든 모순과 분열상을 차례로 경험한다. 고전시가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 안에 형이상학적으로 고양된 어떤 순간을 담는 것은 이제 무의미해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진 시대에 들어서게 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백석의 시선은 더욱 빛을 발한다. 백석은 실제로도 고향과 서울, 일본, 그리고 만주 등지를 오가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내용 상 기행시적인 것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南行詩抄’와 더불어 아예 ‘西行詩抄’라는 부제를 단 연작 기행시 중 하나이다. 즉, 시인이 이 땅의 곳곳을 다니며 실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이를 통해 백석 시세계가 가진 서사적 특질과 고도의 서정성은 단순히 기법적 차원의 특징이 아니라 실제 한반도라는 땅을 배경으로 한 시인의 경험과 단련을 통해 체현한 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서민들의 구구절절한 애환을 그려내고 있을 때도 고도의 서정으로 가는 길을 잊지 않으며, 압축된 상징을 놓치지 않을 때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서민들의 이름을 모두 재현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한 결과이다. 결국 백석은 이 땅을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하게 된 셈이다. 당대를 살아가는 평자들에 의해 다양한 평가를 받고, 때로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백석의 시가 흔들리지 않는 세계를 꿋꿋이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에 기인한다.



남승원∙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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