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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 흐름 진단/분열, 그리고 멜랑콜리/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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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 흐름 진단/분열, 그리고 멜랑콜리/박찬일
∙김영애, 「오랜만에 햇볕도 따뜻하다」(≪시인광장≫, 2011. 4월)
∙윤영림, 「진트플루트―멜랑콜리」(≪예술가≫, 2011. 봄)
∙허정애, 「호모 사케르Homo Sacer」(≪예술가≫, 2011. 봄)
∙이용임, 「내 뜰에 동백」(≪리토피아≫, 2011. 봄)
∙허진아, 「다렐에게」(≪유심≫, 2011. 3/4)
1.
신문을 크로스 리딩하듯 시를 크로스 리딩한다. 신문 사회면 사건기사들의 제목 제목들이 상호 연관관계가 없듯이 시의 연과 연이 상호 연관관계가 없다. 연과 연이 독립해있다. 이런 시류를 일찍이 김춘수는 무의미시라고 하였다. 물론 김춘수의 무의미시에서는 행과 행의 독립성이 더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김춘수는 무의미시는 이른바 허무주의 영향으로 간주하였다. 행과 행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 연과 연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들에 의한 시의 무의미성을 파편화시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분업화시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행과 행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 연과 연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들을 의식분열의 결과로 보아도 마찬가지. 의식분열을 파편화시대의 반영․분업화시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분열이 몽타주, 콜라주, 병렬양식, 자동기술법들을 지향한다. 몽타주, 콜라주, 병렬양식, 자동기술법들과 무의미시는 상호 인접의 관계에 있다. 몽타주시학, 콜라주시학, 병렬양식시학, 자동기술법시학들은 필연적으로 그로테스크미학과 관계한다. 이웃할 수 없는 것들의 동시적 나열을 그로테스크미학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가 파편화시대로서․분업화시대로서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다. 물론 몽타주, 콜라주, 병렬양식, 자동기술법 등 우연성작법들은 모더니즘의 주요 테크닉들이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총체성 개념을 동경했다. 동경했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김향미의 「이것은 시가 아니다」를 인용해본다. 제목에서 이미 암시했듯이 전통적 상호 긴장관계에 처한 시가 아니다.
오늘이 다 가지 않아도 신문이 낡아간다, 죽어도 신문지인; 낡아가는 시간을 모아 한 덩어리로 묶어야 한다 한 달, 일 년, 십 년도 뭉칠 수 있다면, 숙성되는 반죽처럼 짧고 긴 시간들 차지게 기록할 수 있다면
추석 하루 전 내린 비가 서울 강수량을 백여 년 만에 새롭게 기록했다 연휴동안 쌓인 신문을 뒤적인다 물에 잠긴 도시민 이야기는 물 빠지는 수영장 바닥처럼 하얗게 말라간다 재난을 전해 듣는 나는 왜 죄스러울까 적막은 늘 축제 뒤에 선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연체되었다는 문자가 온다 다 읽지 않아도 기한 안에 반납하는 건 내 연습된 버릇, 나는 다루기 쉬운 인간형이므로 약속은 지키려 애쓴다 나는 구름을 좋아하는 인간형이므로 약속은 웬만하면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지금을 낡게 하는 힘이다 산간오지보다 적막한 즈음에서 나는, 지금을 생생하게 익어가고 싶다 정적은 언제나 바람보다 앞에 온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나 아이 울음소리에 정적의 벽은 스스로 두터워져 귀를 닫을 줄 안다
바깥을 향하던 나는 수확을 앞둔 열매처럼 영글어야 한다 나른한 걸음을 이끌고 잘 익은 죄 하나 흔들리며 일어난다 그늘에 꼬리를 물리고도 늘어져 꿈쩍 않는 고양이의 멀뚱한 시선이 눕는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부분(≪시와문화≫, 2011 봄)
연과 연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몽타주, 콜라주, 병렬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문 사회면 사건 기사들이 따로 따로 존재하듯이 연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 연들의 열쇠어를 뽑아보면 “신문”, “적막”, “약속”, “정적”, “고양이” 등이다. 파편화, 분업화, 의식분열의 반영이다. 간단하지 않은 것은 제목 ‘이것은 시가 아니다’ 때문이다. 제목이 단순히 파편화, 분업화, 의식분열의 ‘수동적 반영’이라고 하지 못하게 한다. 의식적․능동적 반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수동적과 능동적의 차이는 모더니즘과 후기모더니즘의 차이다. 물론 후기모더니즘의 능동성이다. 분업․파편․분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시인의 「페스티발」에서도 나타났다.
X는 구름의 향기를 가졌다 한 번도 눈에서 놓친 적이 없는 그림자, Y의 시선에 각인된 향기는 한쪽 방향으로만 불어간다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구름이다
―「페스티발」 부분(≪시와반시≫, 2011 봄)
“한 번도 눈에서 놓친 적이 없는 그림자”라고 하였다.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구름”이라고 하였다. 두 진술이 상호모순적․상호적대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두 진술이 각각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한 번도 눈에서 놓친 적 없었을까. 한 번도 가진 적 없었을까. 문제는 ‘두 가지 경우 다’라는 것. 한 번도 눈에서 놓친 적 없을 수 있고, 한 번도 가진 적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是認Rechtfertigung 만큼 큰 보증이 있을까. 두 가지 중의 하나? 아니다. ‘두 가지 다’가 가능하다. 모순이 가능하다. 모순에 대한 적극적·능동적 수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편적 글쓰기는 김영애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다음은 김영애의 시 「오랜만에 햇볕도 따뜻하다」(웹진 ≪시인광장≫, 2011. 4) 전문.
무덤에서 내려온 가족들은 한탄강 유원지에서 민물매운탕을 먹고 물놀이를 한다. 흐름에 몸을 맡기니 거스르기 어렵다. 저만큼 떠밀려가던 너는 손을 흔들고 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지나가기 전과 지나간 후가 다르다.
미궁 속을 헤매는, 나는 너의 너이고, 너는 나의 나이고, 어두운 밤을 밝혀줄 크리스마스추리를 세우겠다고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자르다가 넘어진 소나무 밑둥을 붙잡고 벌을 서는 어린 너, 쉽사리 끝나지 않는 벌, 여전히 불 밝힌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 때문에 우환거리가 사라지자 가족들은 오랜만에 유원지로 나가 따뜻한 햇볕을 쬐고, 우환거리였던 아버지를 묻으러 가던 날 차창 밖을 스치는 봄꽃들, 가슴 설렌다. 하나 둘 사라지는 우환거리. 오토캠핑을 계획하며 가족들이 환하게 웃는다. 오랜만에 햇볕도 따뜻하다.
세 개의 연이 전혀 다른 정보를 주고 있다. 첫째 연과 둘째 연과 셋째 연을 각각 한 편의 시로 볼 수 있다. 첫째 연의 주제문은 “지나가기 전과 지나간 후가 다르다”다. “무덤” 속으로는 사람이 들어갔고, “철교 위”로는 “기차가 지나”갔다.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연에서 무덤을 대체하는 것은 “미궁”이지만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불 밝힌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얘기한다. 셋째 연에서는 갑자기 카프카의 <변신>의 결말을 환기시키고 있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정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화근이 되어 죽고, 그레고르 잠자가 죽은 후 “가족들은 오랜만에” 소풍을 나간다. 문제는 셋째 연 후반부다. 아들[그레고르 잠자]을 묻으러 간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를 묻으러” 간다고 하였다. 아버지 살해모티브가 등장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이 “우환거리”가 “사라지는”데 기여한다고 하였다. 첫째 연의 ‘무덤’은 아버지의 무덤이었다?
이 시를 파편적 글쓰기의 모범적 예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관계를 가진 ‘히스토리’로 볼 수 있다. 중언하면 무덤은 아버지의 무덤이었고, “가족들”은 아버지의 무덤[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탄강 유원지에서 민물매운탕을 먹고 물놀이를” 하였다. 불 밝힌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 또한 아버지였다. 그러면 셋째 연 시작 부분의 “아버지가 던진 사과 때문에 우환거리가 사라지자”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우환거리였던 아버지를 묻으러 가던 날”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후자 부분을 히스토리에 끼어놓고, 전자 부분을 히스토리에서 배제시켜야할 것으로 보인다. 전자 부분을 우연성작법의 우연한 예로 보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어 우환거리가 사라진 것에서 화자가 카프카의 <변신>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갑충이었듯이 화자의 아버지는 화자에게, 가족들에게, 갑충이었다.
김영애의 「아름다운 날들이 간다」에서는 파편적 기억들이 모여 ‘아름다운 날’을 형성한다. 퍄편, 혹은 병렬관계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화자로 구체화되거나, 형형“색색”의 “넥타이”들로 구체화된다.
길어서 용도가 다양하니 좋은 거야 아버지는 넥타이를 목에 매고, 목을 매달고 살고 어머니는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 눈이 튀어나온 채로 살며 같은 아침을 맞이하다가 제 갈 길로 가버린 거야 나는 넥타이를 허리에 매기 시작하면서 말린 굴비 꼴이 되어 허공에서 흔들리지 서서히 말라가면서 내장이 삐져나오지
옷장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색색의 날들 꽃이 피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리거나 좁아지다가 넓어지거나 사선이나 격자였다가 꽃무늬나 페이즐리 무늬로 바뀌기도 하면서 돌고 돌아가던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기억이란 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돌아가다 멈춘 후에도 길다는 것만은 여전해서 요긴할 것만 같아서 버리기 어렵던 색색의 날들
―「아름다운 날들이 간다」 부분(≪시를사랑하는사람들≫, 2011. 3-4)
“아버지는 넥타이를 목에 매고, 목을 매달고 살”았으며, “어머니는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 눈이 튀어나온 채로 살았으며”, 화자는 “넥타이를 허리에 매”어 “말린 굴비 꼴이 되어” 살았다. “기억이란 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화자에게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억은 “길어서 용도가 다양”했던 넥타이들로 수렴된다. 넥타이가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하게 한다. 그래선지 넥타이는 “여전”히 “버리기 어”려운 물건이 된다. 형형색색의 넥타이처럼, 유행에 따라 “돌고” 도는 넥타이의 모양처럼, 삶은 계속 다채롭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유익함과 즐거움을 함께 주는 넥타이라니? 이 시의 넥타이는 유익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주어야 한다는 고전시대의 문학관의 알레고리? 형형색색의 넥타이인 걸로 보아서 다양성을 적극적·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후기모더니즘 문학관의 알레고리?
2.
우울증, 멜랑콜리는 총체적 ‘자신의 과거 부정’과 관계있다. 우울증으로부터의 회복은 ‘파편적’ 자신의 과거 극복과 관계있다. 완전한 상실감에서 부분 상실감으로 脫態하는 것이 우울증으로부터의 회복과 관계있다.
거대한 바람이 일렁였다……뒤틀리며 뒤섞였다
뇌수에 스미는 ‘검은 담즙’ 이성을 부수었다
자신에게 빠져든 아우라의 붕괴
부식되는 머리/어깨/무릎/발
이 조용한 폭력을 뜨거운 머리로 떠올렸다, 나는
―윤영림, 「진트플루트―멜랑콜리」 부분(≪예술가≫, 2011. 봄)
“진트플루트Sintflut”는 대홍수. 대홍수가 전면적으로 과거를 덮었다. 세계는 돌연 검은 담즙으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압권은 “이 조용한 폭력을 뜨거운 머리로 떠올렸다”라고 한 것. ‘차가운 머리’라고 하지 않은 것. 멜랑콜리가 머리를 뜨겁게 달굴 정도로 심하게 진행 중이라는 것.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홍수는 끝나게 되어있다. 물이 빠지면서 파편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과거들. 아름다운 과거들.
어둠의 진영을 껴안았다 더 나은 은신처가 없었다
몇 겹의 벼랑 어둠의 하중을 견디며 내려갔다
이곳을 어둠의 수몰지역이라 말해두자
암흑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 무엇에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것이다
―윤영림, <어느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부분(≪예술가≫, 2011. 봄)
“어둠”은 “껴”안으려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하중”은 “견디”려고 있는 것이다. “암흑”은 “기억”하라고 있는 것이다. 총체적 자신의 과거 긍정을 기대하지 마시라. 파편적 자신의 과거 긍정으로도 충분하다. 어둠[암흑]의 긍정만으로도 과거가 아름다워질 것이다. 어둠을 긍정할 때 어둠이 어둠이기나 할 것인가.
정오의 태양 아래 내가 놓여 있다
광장의 사람들이 홀로그램처럼 출몰하고
무수한 눈들이 나를 응시한다, 내가 폭발한다
하얗게 發光하는 동공들의
廣大無邊한 우주
[…]
지나간 시간의 모든 내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모든 내가
어둠의 부피에 몸을 맡긴다
내 기대와 기억이 無化된 타자들의 세계에서
무한의 구속을 뚫고
어떤 형태로 내가 태어나게 될까
―허정애, 「호모 사케르Homo Sacer」(≪예술가≫, 2011. 봄)
“정오의 태양 아래 내가 놓여 있다”고 한 것도 점령되었다고 한 것이다. “하얗게 發光하는 동공들의/廣大無邊한 우주”에 노출되었다고 한 것이다. 자아상실, 과거상실이라는 점에서 역시 멜랑콜리다. 멜랑콜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 역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 “어둠의 부피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기대와 기억”을 “無化”시킴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어둠을 긍정할 때 어둠이 어둠이기나 할 것인가. 긍정적 어둠이 어둠이기나 할 것인가. “스크린도어 저편의 여자가 검은 베일을 썼네/누가 먼저랄 것 없이 팔을 내밀지만/서로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네/나는 이해하고 싶네 그에게 일어난 일을, 검은 베일의 내력을//눈먼 행운은 벼락처럼 온다네”(허정애, 「분기를 거듭하는 점X」 부분, ≪예술가≫, 2011. 봄)라고 한 것도 어둠에 대한 적극적 자세다. 요약하면, “검은 베일”을 쓴 “여자”를 “이해하고 싶”다고 하였다. 어둠의 “내력”을 이해하고 싶다고 하였다. 역시, ‘어둠을 긍정할 때 어둠이 어둠이기나 할 것인가’라고 하는 자세다.
멜랑콜리커들이여, ‘눈먼 행운은 벼락처럼 온다네’(허정애)라고 읊조리시게나. 혹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것이다”(윤영림, <어느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라고 읊조리시게나. 과거의 어둠을 되살려내서 그 어둠을 긍정해낼 때 멜랑콜리는 사라진다네. 허정애의 「분기를 거듭하는 점X」는 “부단한 애도 행렬이 轉寫된 판화처럼 열차에 실려가네”라고 끝난다. 애도가 끝나면 멜랑콜리가 온다? 맞는 말이다. 애도가 끝나듯이 멜랑콜리가 끝난다? 맞는 말이다. 어둠을 살려낼 때다. 그때, (다시), 어둠은 어둠이기나 할 것인가.
멜랑콜리한 얼굴들을 심어놓은 정원 속
푸른 줄기가 게워낸
붉은 그림자 속에 앉는 일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밤새 아름다운 꿈들을 도굴한
손가락을 찬 물에 씻는 일
소리 없이 버린 날개들이 나부끼는 밤이면
탁자 위에 물로 쓰는 일
―이용임, 「내 뜰에 동백」 전문(≪리토피아≫, 2011. 봄)
“멜랑콜리한 얼굴들”은 ‘자아’를 상실한 얼굴들. 화자가 “붉은 그림자 속에 앉는 일”은 멜랑콜리에 동참하는 것. “밤새 아름다운 꿈들을 도굴”하지만 도로아미타불이다. “손가락을 찬 물에 씻”어내야 하는 아침이 온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침의 멜랑콜리. “밤”에 “날개들”을 미리 “버린”다. “탁자 위에 물로 쓰는 일”도 도로아마타불을 예상하는 것. 시인에게 멜랑콜리한 얼굴들이 많은 탓이다. 시인의 정원을 파헤쳐 멜랑콜리한 얼굴들을 버릴 일이다. 그 “동백”의 붉은 그림자에 앉지 말 일이다. 그런데 상실이 기억 속에 벌써 흠집을 내고 있으면? 화자는 멜랑콜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능성이 있다. 언어적 상상력에 의한 미적 가상의 넋두리라면!
너의 숨소리가 나를 벤다. 검은 입술, 귀를 대고 너의 기억을 부르자 그림자 축축하다. 잠깐 열었다 닫는 붉은 눈꺼풀, 혼을 잡아도 너는 그림자처럼 조용하다
너의 숨소리를 어떻게 그리고, 빛이 없는 얼굴을 무슨 색으로 칠할까. 벽마다 끈적이는 너의 고통을 어디에 그리고 어떤 색으로 기억할까. 내 캔버스의 어디쯤에 너를 놓을까.
[…]
네가 없는 침대를 그린다. 벽에 붙은 숨소리를 하얗게 칠하고 너의 무게만큼 베개와 시트를 하얗게 칠한다. 너을 안아 침대에 뉘고 담요를 하얗게 칠한다. 마지막으로, 1915년 1월 24일 페르디난트 호들러라고 쓴다.
여전히 뻐끔거리는 입술, 눈꺼풀이 열릴 때까지 나는 너를 바라본다.
다렐, 죽는 것과 사는 것 무엇이 더 가볍니.
침대에 누워 네가 남긴 죽음의 부스러기를 만진다.
―허진아, 「다렐에게」(≪유심≫, 2011. 03/04)
이 시의 각주에는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의 「암으로 죽어가는 발렌틴 고데 다렐」 1915년, 캔버스에 유채”라고 적혀 있다. 죽어가는 다렐을 호들러가 그렸다고 하였다. “죽음의 부스러기를 만진다”라고 끝냈으므로 멜랑콜리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 바로 위 행에서 “죽는 것과 사는 것 무엇이 더 가볍니”라고 물었으므로 멜랑콜리와 관계없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연에서 “너의 고통을 어디에 그리고 어떤 색으로 기억할까”라고 했으므로 간단히 애도의 그림, 애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하이너 뮐러는 병원 침대 위에서 폐암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몇 개월 동안 방송국에서 촬영하도록 했다. 이 경우 뮐러는 사디스트다. 멜랑콜리를 퍼뜨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니까. 호들러 역시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암으로 죽어가는 발렌틴 고데 다렐」을 보여줌으로써 멜랑콜리를 야기시키려고 했으므로. 아니 화자 허진아가 사디스트일까. 멜랑콜리를 보여주려고 쓴 시!
박찬일∙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시단 데뷔. 시집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등.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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