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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책 크리틱/동심을 향해 가는 두 개의 시선—강우식, 김동호 시집 읽기/이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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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25회 작성일 11-12-2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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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호(여름호)책 크리틱/동심을 향해 가는 두 개의 시선—강우식, 김동호 시집 읽기/이채민



중국 명나라 때 사상가이자 문장가인 이지李贄(1527∼1602)는 <분서焚書>를 통해 인간의 위악을 제거하고 형해形骸만 남은 제도를 불신하면서 ‘동심설童心說’을 주장했다. 아니 자신의 주장을 담은 “이 책까지 불지르라!” 고 외치면서 순수의 회복을 염원했다. 과연 순수는 무엇이고 동심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는 때 묻지 않은 원형을 지니고 있다. 이 원형, 즉 본질에는 욕망이 담겨져 있지 않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욕人欲이 싹트기 이전의 시기가 아동기이며 한 마디로 순진무구, 때 묻지 않은 심성으로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이지의 지론은 이 세상의 문물과 제도가 사심으로 얼룩져 있는 공허한 사상누각임을 인정하고 동심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물든 세상의 오욕을 단번에 씻어내기는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생노병사를 막을 수 없기는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의 공통된 운명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늙음은 육체적인 쇠락을 넘어서는 노익장의 세계,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전기를 가질 수도 있다. 누구는 그냥 늙어가지만 어느 누구는 빛나는 예지의 성취를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이 60에 이순耳順을 터득했고, 칠십에는 마음 가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평판에 마음 기울지 않고(耳順), 체면과 위선에 불편해 하지 않는 경지(七十所欲不踰矩)에 다다를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지혜의 얻음이요, 순수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이 같은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은 강우식 시집 <종이학>(문학 아카데미시선 229)과 김동호 시집 <낙엽이 썩어 암실은 총천연색>(시학시인선 38)을 마주하고 통독의 기회를 얻고서부터이다. 날마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발상으로 무장한 신제품이 쏟아지는 디지털시대에 약관弱冠과 미수米壽를 넘나드는 시인들이 상존尙存하는 기쁨은 감각과 감각을 넘어서는 예지의 광대한 스펙트럼을 섭렵하는 즐거움에 다름 아니다. 불가지의 세계를 염탐하는 시인들의 다양하고 불온한 시선이야말로 과학의 세계에서 정서의 세계로 한껏 확장되는 자유의 정신을 맛보게 하는 행운이 아닐까 싶다.

강우식과 김동호는 같은 대학에서 수학하고 평생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행복하게 정년을 맞이한 시인들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길을 걸어온 두 시인의 시집들은 젊은 시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질곡과 애환, 그리고 이 질곡과 애환을 딛고 넘어서는 형형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시인은 다 같이 무애無碍의 경지를 지향하면서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무애는 무엇인가? 장애가 없다는 것,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자각과 안도는 쉽사리 얻어질 수 없기에 그들의 무애를 다루는 공력은 남다르다. 늙어갈수록 애착과 탐욕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아집이 성성해지는 것을 우리는 쉽게 목도할 수 있는 까닭에 ‘버리고 비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강우식 김동호 그들의 순수, 더 나아가서 동심으로의 회귀는 값지고 교훈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종이학>과 <낙엽이 썩어 암실은 총천연색>의 궁극적 종착지는 동심의 세계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강우식과 김동호의 공통적 관심사는 앞 서 말한 대로 순수와 동심의 회복이지만 그 곳으로 가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강우식이 평생 동안 화두로 삼았던 에로티시즘은 여전히 <종이학>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고, 김동호의 <낙엽이 썩어 암실은 총천연색>은 그 에로티시즘을 익살을 곁들인 반어로 치환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두 시인이 펼쳐놓는 이야기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1.

새벽마다 혼자 앉아 효자손으로

텅 빈 등을 긁는

늙은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태풍 몰아친 뒤의

과수원의 낙과처럼 여편네는

흙으로 간 지 오래고

그나마 붙어있던 자식도

제 살림 차린다고 떠나버리고

일찍 눈 뜨인 신새벽에

홀로 등 꾸부리고 앉아

희끄무레 밝아오는 봉창을 바라보며

등을 긁적대는

팔자를 떠올려 본 적이 있으신지요.

지고 가야할 짐이 없어

누군가 뒤가 홀가분해 좋겠다고 하지만

늙은이에게 등이 가볍다는 것은

세상의 무게도 다 덜어내

허사비 같다는 것.

옛날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누가 사다놓은 건지도 모르는

효자손을 들 때마다

이승 떠난 여편네의 손톱이,

가려운 데를 족집게처럼 찾아내던

시원하고 흰 손톱이

눈물나게 떠오르고

아무리 효자손으로 등을 쓸어도

가을걷이 끝난 들녘처럼 허전하기만한

하루하루를 사는

인생을 떠올려본 적이 있는지요.

―강우식 「효자손」 전문


2.

“피검사 또 한다며 핏기 없는

우리 그이 피 많이 뽑아갈 때

간담 서늘했지요”


“평소에 엄살 심한 그이가 그 큰

주사 바늘 맞고도 태연자약할 때

간담 또 서늘했지요”


“우주로 날려 보낼 듯

우주선 같은 CT관 속으로 우리 그이

쑥 - 밀어 넣을 때 영영 못 볼 것 같아

또 간담 서늘했지요”


“전복 한 개면 소주 한 병도

게 눈 감추듯 하던 그가

맛있는 전복죽 앞에 놓고도 머리

푹 - 떨구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

간담 간담 또 서늘했지요”


간담 서늘이 쌓이고 쌓여 간경화

그래서 그니 남편보다 먼저 갔다

그 사실 뒤늦게 알고 오매불망

눈물로 지새우는 남편, 아무래도

부인 따라 곧 갈 것 같다

―김동호 「어떤 간병인」전문


1은 강우식의 시 「효자손」이고 2는 김동호의 시 「어떤 간병인」 이다. 이 두 편의 시가 시인들의 직접 체험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려운 데를 족집게처럼 찾아내던/시원하고 흰 손톱이/눈물 나게 떠오른다’ 는 강우식과 ‘서늘이 쌓이고 쌓여 간경화/그래서 그니 남편보다 먼저 갔다/그 사실 뒤늦게 알고 오매불망/눈물로 지새우는’ 김동호의 시선은 놀랍도록 가깝다. 지금이야 한 물 가버린 얘기지만 우열의 관계로, 차별의 관계로 인식된 남과 여, 지아비와 여편네의 관계가 전복되어 버린 지경, 약해보이는 것이 진정으로 강한 것이며, 강해보이는 것이 사실은 약하디 약한 존재라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다가올 때 늙은 홀아비들의 눈물은 일생에 한 번 피는 꽃에 버금갈 것이다.

과 양은 단순히 합의 관계로 아니라 음이 쇠하는 순간 양이 일어서고 양이 쇠하는 순간 음이 일어서는 부단한 흐름으로 이해할 때 관능이 일방에 의한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상호 순환하는 생명활동이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유의 실마리는 강우식과 김동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2박3일을 죽은 듯이/숲 속 펜션에서 숨어’(강우식, 「불륜시편 1」), ‘통 크게 지아비 있는 계집을 안고’(강우식, 「불륜시편 3」) ‘사랑하는 아내와/자식은 십리 밖 등불로 아득하게’(강우식, 「불륜시편 2」) 밀어내는 위험한 놀음과  ‘엄마들의 요란한 젖가슴/물끄러미 바라보던 아가가/옹알옹알 모유어로 말한다 “이상하다. 왜 어른들은 우리/밥통을 갖고 저렇게들 난리일까” ’(김동호 「젖가슴 엘레지」)의 사이에는 막막하면서도 동질의 무의식이 출렁거리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은/이런 아름다운 유한회사를/몸속에 지니고 다닌다’(김동호의 「태반」)에 드러나는 여성의 위대성과 모친회귀의 본능은 ‘빵처럼 부풀어 오른 산보다는/찰떡처럼 찰진 산이 나는 더 좋아요 ’(김동호의 「젖가슴 엘레지」)와 같은 외형의 쾌감 형태를 벗어난 본질적 생명의 젖을 간구하는 인간의 참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관능은 모친회귀의 본능으로 용서 받는다. 강우식의 위험한 고백과 김동호의 고루한 비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하나로 꼬인다. 관능은 남과 여가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욕망이지만 이 욕망을 일으키는 본질은 자유의 생명활동, 생명활동의 자유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우식의 고백이 지저분하지 않고 김동호의 비꼼이 고집스럽지 않은 까닭은 무애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우식의 활달한 표현과 김동호의 논리를 함축한 현실비판의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쳐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결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방법론은 다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종착지는 한 곳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강우식과 김동호의 시편들은 우리 삶의 장애로 남아 있는 관능을 넘어서서 제물齊物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세상은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며 무한히 출렁거리는 상호화합과 보완의 상태에 있음은 관능의 문제를 살펴봄으로서 그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남과 여(음과 양)의 차별은 차이로 인식되고, 그에 따라 이것과 저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지식의 무한함이 지혜로 이루어지지 않듯,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삶의 진경을 헤아릴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짝의 부재로부터 홀아비의 눈물이 꽃이 되었듯이 체험은 간절한 생각과 경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강우식의 <종이학>은 여자와의 추억과 여자의 부재(소멸, 사라짐)로부터 빚어지는 결핍과 고독의 정서를 빚어내는데 반해 김동호의 <낙엽이 썩어 암실은 총천연색>은 이 세계를 이룩해내고 있는 본질과 다양한 현상과 사물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상관성을 탐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낙엽이 썩어 암실은 총천연색>의 3부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함유하고 있는 오브제를 동원하여 제물齊物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과 사진’,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잠자리와 비행기‘처럼 유사성을 지닌 오브제가 있는가 하면, ’홍어와 토마토‘, ’헌법과 컴퓨터‘, ’대란과 대목‘ 같은 제목을 보아서는 한눈에 유추가 불가능한 오브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익살을 보이는 것이다. 한정된 지면으로 세세하게 드러낼 수 없는 까닭에 우선 한 편을 소개해 볼까 한다.


몸집 큰 동물들은 초식을 하고

몸집 작은 동물들은 육식을 하고 -

왜지?


코끼리 소 말 돼지 -

만일 이 큰 짐승들마저 육식을 하면

올챙이 한 마리도 살아나지 못할까봐?


늑대 여우 독사 매 -

만일 이 작은 금수들마저 초식을 하면

질경이 한 뿌리도 남아나지 않게 될까 봐?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썩은 고기까지 곰삭은 젓갈인 양

맛있게 먹어 치우는 솔개 같은 친구들이 있어

걸판진 남국의 땅도 늘 깨끗한 것이다


사자들이 집채만 한

코끼리를 눕혀 육초肉草 맛있게 뜯고 있다

산 너머엔 집채만 한 코끼리들이 떼로 모여

끝없는 초원의 풀 끝없이 뜯고 있다


어느 쪽 팔자八字가 더 좋을까

하늘에 비 한 번 내리면 온 들판이

곡창이 되는 저 몸집 큰 짐승들과

쫄깃한 살 빨간 넥타와 함께 맛있게 맛있게

뜯고 있는 저 몸집 작은 짐승들과 -

―김동호,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전문


한 편의 동화처럼 아프리카 초원의 풍경이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채로 놓여져 있다. ‘몸집 큰 동물들은 초식을 하고/몸집 작은 동물들은 육식을 하고-/왜지?’ 라는 천진난만한 의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키재기를 하고 힘자랑을 하고 서로서로 잘났다고 뽐내는 인간사와 유비되는 저 동물의 세계에는 약육강식은 분명 존재하지만 먹이사슬의 위대함은 순환의 평등함으로 모든 생명을 서로 먹히고 먹는 더 큰 공존의 세계로 이끌어낸다. 이런 제물을 터득하면 가지되 뽐내지 않고, 없음을 불평하지 않는 안온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김동호의 시편들은 가볍거나 허황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염분이

고기를 뜨게 하듯

눈물이 우리를 뜨게 하네

허공이 새들 날게 하듯

허허虛虛 웃음이

우리를 날게 하네

―김동호 「눈물과 웃음」 전문


이와 반해서 강우식은 시집 <종이꽃>을 상재하면서 「종이학의 개명開明과 무명無明」의 산문을 붙여 놓았다. 시인은 자서에서 「종이학」 한 편을 알리기 위해 시집을 펴낸다고 술회한 바 있듯이 「종이학」은 전 생애에 걸친 강우식 시세계를 집약하는 역작임에 틀림없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가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길 사이

한 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예전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 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신 눈이 기막히게 내린다.

내린 눈보다 내가 더 조용히 깊고 하얗게 젖는다.


한 마디로 「종이학」은 깨달음의 시이다. 자작시 해설에서 시인이 고백했듯이 “무명은 만드는 법도 까맣게 잊은” 표면적 의미와 “칠흑의 흰 마음바탕뿐인 마음 눈”으로서의 양면성을 띤다. 개명(알음알이)로 볼 때 산은 학이 될 수는 없다. 눈 내린 산이 마치 모조지로 접은 학으로 보이는 것은 실로 개명이 아니라 무명의 작용이다. 이 무명은 모든 사물의 관계성을 완전하게 잊어버릴 때의 마음이지만 여전히 ‘유리병 안에 천 마리 학이 갇혔다’는 개명의 간섭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눈은 더 내리고 ‘내린 눈보다 내가 더 조용히 깊고 하얗게 젖게’되는 것이다. ‘내리고 젖는’ 정화의 순간은 그래서 ‘하얗다’. 「종이학」은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 눈을 감고 읽어야 하는 시이다. 눈을 감고 읽을 수 있으려면 이 세상의 순수를 담을 수 있는 동심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언어로 읽는 것이 아니라 눈빛으로 읽는 것이다!


김동호와 강우식은 우리 시단의 어른으로서 사유의 열매가 실로 작은 씨앗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는 진실과 함께 정신의 숙련을 방해하는 장애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돌파해가는 용맹정진에 있음을 증언하는 소중한 깨우침을 알려 주었다. 앞으로도 천애무봉의 그 익살과 해학이 더욱 강건해지시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맺는다.



이채민∙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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