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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책 크리틱/시선의 원심력적 확장과 구심력적 집중—하종오 시집 읽기/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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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책 크리틱/시선의 원심력적 확장과 구심력적 집중—하종오 시집 읽기/허정
하종오 시인은 그동안 여러 편의 시집(<반대편 천국>, <국경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입국자들>)에서 아시아에서 이주해 들어온 이주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형상화해왔다. 이러한 점은 이번 시집 <제국>(문학동네, 2011)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이번 시집의 3부에 잘 드러난다. 시인은 그간에 해왔던 작업처럼 이번 시집에서도 이주민을 신성화하지 않고 정형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일방적인 시선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응시 역시 포착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이번 시집의 특징은 무엇이 있으며, 전작에 비해 한 단계 나아간 지점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 시집의 특징과 의의를 시선의 원심력적 확장과 구심력적 집중이라는 이름 아래 간략하게 살피고자 한다.
1.
이번 시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작에 비해 시인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제국> 에서 시인의 시선은 그 동안 아시아권에 집중했던 차원을 넘어, 미국․동유럽․남미․아프리카․아랍 등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2부에 실린 시들처럼 마치 인공위성이나 다른 행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적 시선을 제시하기도 한다. 고명철 평론가의 지적처럼 <제국> 은 아시아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적 인식을 전지구적인 범위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은 1, 2부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시인이 집중하는 점은 다음 2가지다.
먼저, 시인은 한국인 이주의 흐름을 추적한다. 지금 한국의 기업들은 더 값싼 임금의 노동자를 찾아 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케냐․체코 등으로 공장을 옮기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 한국인들 역시 현지공장으로 파견되는데(「제국의 공장—갠지스 강」, 「제국의 공장—풀가동」), 시인은 이러한 흐름을 쫓는다. 그리고 시인은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를 욕망하며 이주를 떠나는 모습(「제국의 공장—달러」), 그리고 그 욕망이 좌절된 뒤에 어려운 처지에 속한 한국인의 모습을 포착하기도 한다.(「제국의 공장—닭고집). 나아가 시인은 근대 초창기부터 있어온 한국인 이민자들의 삶을 추적하기도 한다.(「교차로에서」, 「행복한 치매」, 「제국의 공장—꿈」)
다음으로 시인은 한국인과 이주민들이 같은 처지에 직면해있다는 사실, 즉 그 사이의 공통성을 포착한다.
미국에서 밤새 뒤척거리는 자신이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는 동남아인들과
똑같은 처지라는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는 남자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있기는 한지 의심하며
침대로 올라가 엎드린다
―「불법 아메리칸 드림 54」 부분
시인은 한국인들 역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무적자無籍者의 삶을 산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용한 시에서는 아메리칸드림이 좌절된 한 남성이 자신의 처지가 한국에 불법체류하는 동남아인과 같은 처지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한국인들은 동남아인을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했지만, 이주라는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다. 이런 점은 「제국의 공장—갠지스 강」의 “다음엔 더 가난한 나라로 옮겨갈 걸 알고 있어/ 평생 넘을 국경을 헤아려보기도 하면서/정착할 나라가 어딜지 짚어보면 막막하다”라는 대목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인이 근대 이후 이루어진 한국인 이주의 삶을 추적하는 이유 역시 한국인 이주에 대한 사적 고찰을 통해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의 공통점(안정된 처소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음)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전지구적인 시야를 동원하여 한국인의 이주를 추적하고 있으며, 한국인과 이주민들 사이의 공통성을 부각시킨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여기에는 한국인의 배타성을 비판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깔려 있다. 그 처지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타적 의식으로 이주민과 자신을 다른 존재로 차별하는 한국인의 자화상을 시인은 이러한 시편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이 이주민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인은 그동안 아시아에서 국내로 들어온 이주민을 주목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만 이주를 주목하게 될 경우, 이주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점을 놓치기 싶다. 시인이 1부에서 끈질기게 형상화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근대 이후 이주는 일상화된 것이었고, 한국인 자신의 문제였다.
이런 점을 인정해야지만 이주의 문제를 보다 깊이 성찰할 수 있다. 이주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이주민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나 우월한 위치에 놓고 기껏해야 이주민들에게 동정이나 베푸는 양상으로 귀결되기 싶다. 이주를 나의 문제로 생각할 때 이주민에게 짧은 시간 동안의 연민만을 베풀고 서둘러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해버리는 타성에서 벗어나, 이주의 문제를 보다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빈익빈부익부의 문제를 비판하고, 시인이 「自序」에서 한 말(“그들 모두는 의식주를 얻고 가족과 행복하게 생존하기 위해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좌절하고 환희하는 세계의 시민들이다.”)처럼, 세계의 시민들이 행복하게 생존하기 위한 길도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된다. 1부에서 전지구적인 시각을 동원하여 한국인 이민자를 주목한 것은 이런 점을 성찰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의 공통성에 주목한 것은 이주의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을 안정된 위치 속에서 특권화시켜 사유하는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기 위한 전략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통성 인지를 통해 이주의 문제를 인류공생의 목표로까지 이어가려는 시인의 의도 역시 여기에 드러나 있다.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전지구적인 시야를 동원하고 있다. 필자는 이를 일컬어 시선의 원심력적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2.
<제국>에서 전면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이 시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으로 ‘시인의 면밀한 자기조사’를 꼽고 싶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타자의 고통은 이를 재현하는 창작주체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전유될 위험이 있다. 스피박은 하위자와 같은 타자를 재현하는 과정은 재현하는 이들이 재현체계 속에서 점유한 위치성으로 인하여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어도 부지불식간에 하위자를 대상화하고 하위자의 목소리를 지식인들의 입장에 맞게끔 굴절시키는 과정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끔찍스럽게도 하위자의 목소리에 접근하는 작업이 오히려 지식인들로 하여금 하위자를 주변화하는 과정에 동참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은 하위자를 타자화(주변화)시킨 지배체제에 공모하는 것이 되고 만다.
레이 초우 역시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레이 초우는 1990년대 미국학계의 문화연구와 같이, ‘억압’ ‘희생’ ‘서발터니티’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억압당하는 이들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비판한다. 레이 초우는 서발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권력과 권위를 얻는 확실한 수단이 되는 데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원을 끌어내면서도(서발턴을 자신들의 경력 쌓기 도구로 삼으로면서도) 자신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담론에 의해 권력․부․특권이 축적되고 있으며, ‘자신의 말이 공언한 내용’과 ‘그런 말로부터 자신이 얻은 신분상승’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이 서발턴을 소외시킨 폭력과 공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서발턴을 자신의 입장에 맞게 전유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피억압자에게서 항의와 정당한 요구의 말까지도 박탈해버린다.
이러한 점 때문에 하위자를 위해 말하려는 이들에게는 면밀한 자기조사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 속에 지식인은 자신 역시 자신이 비판하고자 했던 재현의 지배적인 체계 속에 연루되어 있는 의외의 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위치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피박은 면밀한 자기조사를 통해 자신 역시 자신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고 권한을 부여해주었던 구조와 담론을 강조하려고 했던 점을 시인하고, 마침내 자신을 ‘백인 리버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레이 역시 자신이 이산의 상황에 처해있는 디아스포라적 인간(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홍콩인)에 해당되고, 자신의 교육환경을 고려할 때 자신의 타자성은 희생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특별한 사회적 권력에서 나온 것이며, 적의 도구를 휘두르면서 말하고 쓰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밝힌다.
타자에 대한 전유와 면밀한 자기조사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이 점이 <제국> 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1997년, 서울 2007년」 「이율배반」 「뉴스시간」 「일 년간, 십 년간」에서 시인은 이런 점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1997년, 서울 2007년」에서 시인은 불법체류 단속반으로부터 동남아인들을 숨겨주며 은혜로운 고용주를 자처하는 한 공장주를 주목하며, 그의 행위가 실은 자기의 이익 챙기기와 같은 그의 입장성에서 발원한다는 점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율배반」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을 위해 일하지만, 이주민들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이주여성들은 돈을 위해서 결혼을 하고 영주권이 나오면 한국의 소중한 가정마저 내팽개쳐버린다’는 한국인의 선입견)을 떨치치 못하고, 이주민들에게 마치 선심 쓰듯 시혜를 베풀고 있는 중년 여성을 문제시삼는다.
급기야 시인은 자기 자신마저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다. 시인은 「뉴스시간」에서 한국에 살기를 희망하는 콩고인 흑인가족들이 순혈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걱정되어 목이 막힌다. 그러나 잠시 뒤 그는 흑인가족들을 망각하고 만다.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세 끼니 양식이 보장되어 흑인가족들처럼 이주할 필요가 없는 한국의 현실에 만족하며, 좀 전에 절절하게 아파했던 타인의 고통을 짐짓 모른 체해버리는 자신을 자기 풍자라도 하듯 드러낸다.
사고로 다친 몸 치료에 알돈을 다 까먹고
더는 벌어 모을 수 없는 그와
직장에서 은퇴한 나는 처지가 다르고
마흔 살에 떠났던 중국에서도
쉰 살에 떠나려는 한국에서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
한국계 중국인 그를 나도 부르지 않고,
잠 덜 자고 일만 했던 자신을 늙게 만들고
위안화와 원화의 가치를 바꾸어놓은 것이
바로 그 흘러간 시간이라는 걸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그에게
일자리를 줄 수 없는 나는 말할 거리가 없고,
―「일 년간, 십 년간」 부분
인용한 시에는 말하는 이의 위치에 대한 자기성찰이 잘 나타난다. 물론 이 시에는 많은 것을 변모시켜놓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의 정처를 잃은 타자의 모습이 전면화되고 있지만, 이 시에 등장하는 ‘나’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자기성찰의 문제를 예민하게 제기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조선족 박광석(피아오광스)이라는 인물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쓰라리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처지가 다르고”와 같이 자신이 박광석 씨와 처지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발언은 다음의 내용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일자리를 줄 수 없는 나는 말할 거리가 없고”라고 했다. 여기서 일자리는 액면 그대로의 일자리보다는 자신이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도움을 의미하고, 그래서 이 대목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대목으로 읽힌다. 즉 이 대목은 다분히 그동안의 시작행위에 대한 메타적인 자기성찰이 드러난 대목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이 해온 행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자신의 시작행위가 이주민들에게 기여한 바는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그러한 기여는 착각이지 않는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혹시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이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성찰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 때문인지 시인은 자신이 타자와 “처지가 다르”다고 말한다. 아무리 몸을 낮추어 다가가려고 해도 타자는 자신과의 동일한 처지를 완강하게 거부하며, 시인이 한국이라는 상징체계 경계 내부에 예속되어 있음(한국사회와 공모하고 있음)을, 거기서 어쩌면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입장에 맞게끔 전유해버리는 시나 끼적거린 것은 아닌지를 고통스럽게 상기시킨다. ‘나’는 이주민과 처지가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고백은 자기조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아프게 고백한 스피박이나 레이 초우의 고백과 궤를 함께 한다. 이제부터 이주민을 형상화한 한국문학은 이런 점들을 본격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왜 쓰는가? 이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언술행위 속에서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이주민을 나의 입장에 맞게 전유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제국> 에는 비판의 과녁을 자기 쪽을 향해 돌리면서 이루어지는 자기조사의 과정이 드러난다. 비록 시집에서 양은 많지 않지만, 한국문학이 소홀히 하고 있는 이 문제는 이주민과 같은 타자의 문제를 사유할 때 반드시 따져봐야 할 중요한 점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기조사를 시선의 구심력적 집중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제국> 은 하종오 시인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형상화해온 이주민에 대한 시선의 ‘원심력적 확장’과 ‘구심력적 집중’이 어우러진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정∙1996년 ≪창비≫ 신인상(평론) 수상. 저서 <먼곳의 불빛>, <공동체의 감각>.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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