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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여름호) 독자 시 감상/이상에게 말 걸기-이상의 시/이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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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67회 작성일 11-12-2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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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시 감상/이상에게 말 걸기-이상의 시/이연수

 

 

    꽃나무 외

    李 箱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紙 碑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無事한世上이병원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끝끝내있다

 

 

 

    悔恨의 章

 

 

    가장 무력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懶怠는 安心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職務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歷史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封墳보다도 나의의무는 적다.

    나에게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그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게다.

    처음으로 나는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시를 쓰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내 상상 속에서 그들은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휘릭휘릭 글을 써낸다. 그렇게 쉽게 써내려간 시에는 시대에 대한 성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 아무렇게나 녹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껄끄러움 없이 읽어가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어떠한 의미를 찾아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거리기도 한다. 시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소설이나 수필이 담고 있는 무엇보다 직접적이며 관념적이다. 이렇게 이성보다 직관에 먼저 닿는 느낌 때문에 시가 좋다!    

    시집을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읽는 것은 퍽이나 유쾌하다. 때문에 지하철역이나 광고 선전 문구에서 시를 접하게 되면 반갑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반가움이다. 나와 공통점이 많을수록 반가움은 배가 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부분에 이끌리기도 한다. 李箱의 시는 내게 그런 친구다. 난해하고 복잡하고 엉뚱하기도 한 그의 시들은 그동안 만나왔던 시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다름’에 거리감을 느끼고 거부감이 일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꾸만 알고 싶어지는 그런 마력이 있다.

    이상을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소설가였다. 「날개」라는 기묘한 글을 접하고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화자가 회색의 도시 속에서 어항 속의 금붕어 같은 삶을 사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마지막에 겨드랑이에서 솟는 날개는 죽음에의 갈망이자 잃었던 꿈을 실현시켜보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이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주문처럼 인식되었다.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의 글은 이렇게 무의식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끌어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곧 어린애 특유의 감성대로 그를 기억 언저리에 묻어버렸다. 끝없이 이어질 줄 알았던 열정은 쉽게 고갈되어 버렸다.

    그는 내 기억 저편에 존재했지만, 나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이제 그는 시인이 되어있었다. 「거울」이라는 작품을 접했는데, 시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선생님의 수업은 깡그리 잊고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마치 이상처럼 내 자신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의 눈과 얼굴과 손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관찰했다. 슬프게도 거울 속의 나 또한 왼손잡이였고 우리는 악수를 나누지 못했다. 내가 오른손을 뻗어도, 왼손을 뻗어도 거울상은 같은 손을 내밀고 서서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런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이로 인해 내가 어떤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라는 것은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때때로 분노가 되기도 연민이 되기도 했고 기쁨과 웃음이 되기도 했다.

이후로 이상을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 더 친밀한 유대를 쌓고 싶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자체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그의 삶은 작품에서처럼 어지러웠다.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조숙함을 배워야만 했고, 지식인으로서 슬픈 시대를 거쳐 오면서 감성은 너덜너덜해졌다. 그의 내면도 외부적 환경도 그를 아프게 했다. 때문에 육체적인 나약함과 정신적인 죄의식이 그의 삶을 지배했던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진일보적인 성취가 있었다. 새로운 작품경향을 보이며 실험적이고 대담한 글의 양식은 내가 살아오면서도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움이었다. 과학이 이렇게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외치는 현대에도, 그와 같은 奇人은 내 삶에 없었다. 이 때문에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 희소성에 열광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심사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그에게 흠뻑 매료되었음은 분명하다.

어머니의 서재에서 이상을 만났다. 그러나 숱한 한자들의 나열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지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내게는 너무도 어려웠다. 다시 이상을 찾게 된 것은 며칠 전이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난해했다. 읽을 수 없는 한자들에 덮인 글들은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장애가 되었지만, 외레 이러한 장벽이 ‘그답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유난히 十三을 좋아하는 기호는 작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끊임없는 나열과 나열과 나열과 반복들. 언어로는 그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 부족했던 탓일까? 다양한 상징체계와 metaphor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글 속에 녹아 있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어색하지 않다. 그저 ‘이상답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할 뿐이다. 일기처럼 쓰인 연작시들은 나의 일상과 닮아있기도 해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멀지만 멀지않은, 가깝지만 가깝지만은 않은 理想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동경하게 된다.

그의 시중 기억에 남는, 실은 현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꽃나무」와 「紙碑」, 「悔恨의 章」이다. 「꽃나무」는 자아분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꽃나무는 자신이 생각하는 꽃나무, 즉 이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화자는 도망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어째서 도망친 것인지 이런 행동을 ‘이상스런 흉내’라고 하면서도, 꽃을 피우려 애쓰는 꽃나무를 위해 도망쳤음은 역설적이게 느껴진다. ‘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라는 구절을 보면 무엇도 없이 꽃나무와 자신만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앞서 이야기 했던 ‘거울’에서처럼 두 자아가 마주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즉, 꽃나무는 화자를 비치는 또 다른 거울인 것이다. 이는 내게 있어서 잠재된 자아분열의 가능성을 일깨웠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나 자아가 둘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상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외면하고 싶었던 그의 현실일까, 아니면 자신의 무기력함일까? 그런 상상을 자극하는 작품이었다.

「紙碑」는 해석하면 종이 비석이다. 세상 속에서 절름발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부의 상을 그려놓았는데, 나는 이상의 인식 속에서 그들이 죽어있다고 보았다. 이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닌 정신적 불완전성에서 기인한 인식상의 죽음이다. 즉, 이상의 시는 정신적으로 왜곡된 이들에 대한 활자비석이 된다. ‘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로 보이는 부부는 절뚝거리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불구자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無事한世上은병원’이 되고 그들은 그 속에서 치료를 기다린다. 아프지 않지만 아프다. 우리도 이와 같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요새는 자꾸 내 주변에 무뎌지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신경을 쓰던 안 쓰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감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본래부터 갖고 있던 결핍된 부분을 사회에서 찾아나가려 애쓰며 기형적인 관계를 맺는다. 무엇이 우리를 불구의 상태로 만드는가? 이상이 살던 시대도 우리가 사는 시대도 완전치 않음이, 같은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 가슴 아프게 와 닿았다.

수업시간에도 접해 보았던 「悔恨의 章」은 이상의 작품 중에는 친숙하다. ‘처음으로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화자의 모습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 또한 누군가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삶을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외부적인 상황이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상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이 ‘양팔을 자르고 나의 職務를 회피한다’, ‘나의 문자들을 가둬버렸다’와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내던지고 ‘封墳’, 즉 죽은 이보다 더 건조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자신을 지배하는 어떤 영향력에서도 벗어나 그저 머무르고 싶어 하는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마음은 살다 보면 누구나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그의 절실함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는 어떤 삶을 사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내게 있어 시를 읽는 것은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하나하나 그 조각을 맞춰나가다 보면 그 윤곽이 얼핏 보이고 남은 조각을 끼워 맞출 수 있게 된다. 처음에 이상이란 작가는 내게 그저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쉬운, 이해할 수 있는 작품부터 차근차근 접해나가다 보면, 어느 날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매우 작고 조심스러운 속삭임이지만 귀 기울이다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내게 이상이라는 작가는 익숙한 대상은 아니었다. 동경하는 숱한 시인 중에 한명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조금 특별한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친한 친구처럼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이들도 삶에 있어서 특별한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 이들은 수다스럽게 떠들지 않지만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과 보는 것들을 색다른 언어로 접하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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