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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여름호) 산문 윤의섭의 포에티카/시노래의 장르적 위상/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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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여름호) 산문 윤의섭의 포에티카/시노래의 장르적 위상/윤의섭
음 들었던 날, 시와 음률의 오묘한 조화와 청각만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촉각으로도 느껴지던 전달력에 낯선 경이를 경험했을 때부터였다. ≪리토피아≫는 이 시노래 보급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매체이다. 보다 많은 이에게 보다 편안하고 흥겹게 시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으로 시노래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과연 시노래가 어떠한 특징을 갖고 있기에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시노래의 특성을 고찰해 봄으로써 시노래의 장르적 위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예술 장르로서 문학, 특히 시와 음악이 과거 시대로 올라갈수록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조선 초기 악보인 <시용향악보>에는 고려 속요가 악보와 함께 기록되어 있으며 고시조는 창으로 불리기도 했다. 악보의 가사로서 뿐만이 아니라 시가, 시조 등은 정형적 운율에 의해 자체적으로 음악성을 담보하고 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유시 형식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아직도 시의 음악성은 내재율이라는 속성으로 남아 있다. 사실 현대의 많은 시들이 이 음악성에 대해 무관심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시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강약고저의 리듬과 호흡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독특한 특성을 지닌 우리말과 그것의 시적 운용에 의한 결과이다. 주지하듯 우리의 시가 갖는 운율적 자질은 음보율에 있다. 정형 시조나 민요시의 경우 한 구절이나 한 행의 글자수가 어느 정도 균등하게 조직되어 있어 음수율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음수율은 예외적 음수와 파격적 변용이 자주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대처하기 힘든 율격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시조의 3․4(4․3)조 형식은 현존하는 고시조에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많은 경우 한 구절의 글자수(음절수)가 기본조인 숫자(3 또는 4)보다 적거나 많게 운용되고 있다. 운율론에 있어서 우리의 시에 가장 부합하는 율격 개념은 음보율이라고 할 수 있다. 음보율은 한 호흡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 구절이 등질적인 호흡의 길이로 반복되어 있을 때 성립되는 율격 장치이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중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를 보면 각 행이 단어의 띄어쓰기와 관계없이 세 번의 호흡 휴지休止를 갖고 발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나보기가’와 대응관계를 이루며 반복구를 이루고 있는 ‘말없이’는 글자수는 다르지만 서로의 발음 호흡의 길이가 균등하게 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역겨워’와 ‘고이 보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결국 이 시행은 등질적인 호흡 길이로 각 구절이 세 번씩 발음되고 있으며, 그것이 여섯 번의 반복(반복은 율격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체계이다.)을 이루고 있으므로 등장성에 의해 유지되는 3음보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우리말의 음보율적 특징으로 인해 그것을 운용하고 있는 시의 음보율은 일정한 반복적 리듬을 유도하며 음악성을 형성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시는 음보율의 율격적 체계에 적합한 호흡률을 갖고 있다. 그런데 노래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즉, 한 음절의 가사에 여러 개의 음부가 대응하는 방식(멜리스마 스타일 melisma style)과, 한 음부에 한 음절의 가사가 대응되는 방식(실러빅 스타일 syllabic style)이 그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대개 실러빅 스타일이 많이 쓰이는데, 특히 한 단어가 한 음부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 영어와는 달리 하나의 의미를 지닌 여러 음절의 단어가 그것에 대응하는 여러 음부와 대응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중요한 변별적 특징이다. 예를 들면 팝송에서 ‘Beautiful’은 한 음부와 대응시키는 경우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많은 경우 2개 이상의 음부와 대응될 때 자연스럽게 들린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이 아니고 노래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시노래는 이러한 특징 속에서 음보율의 등장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깨고 박자를 맞추기 위해 멜리스마 스타일을 도입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그만큼 시노래는 우리말의 원형질과 서구적 음악의 속성을 함께 끌어들이며 창작되어야 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시노래가 결코 단순하게 시에 맞춰 간단하게 작곡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노래라는 독창적 장르는 시가 갖고 있는 우리말의 운율적 본질을 살리면서 음악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작위적이지 않은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나름의 음악적 특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시를 시노래로 창작한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노래 창작은 그 가사를 시에서 끌어온 가운데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창조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노래는 새로운 예술 장르로 구분하어 살펴봐야 한다. 예술에 있어서 장르론은 필연적으로 다른 범주의 장르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이때 다른 장르와의 공통성과 차이성이 분명하게 공존하는 가운데 독립적, 자율적 특성이 확충되어 있어야 한다. 시노래는 물론 음악 분야의 한 장르이다. 그러나 가사로 사용되는 시의 전달에 중점을 둘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우리는 노래로 불리던 속요나 시조를 ‘시가’라고 일컫고 있으며 우리의 고전문학사에서는 이를 문학의 한 장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문학에 있어서 음악적 요소가 배제된 기록문학을 문학 장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문학에서 음악적 요소가 폐기되어서라기보다 문학과 음악이 분리된 채 더 이상 문학에 음악적 요소를 결부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노래 같이 음악과 문학이 결합된 장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찬송가 형식으로 불리던 창가가 우리의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음악적 요소가 거세된 서구의 문학이 대거 유입되면서 우리의 근대문학 역시 음악적 요소가 배제된 채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에 음악적 요소가 결합된 시노래를 단순히 음악의 한 장르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시노래는 문학사에 다시금 등장한 문학의 한 장르인 것이다. 더구나 시노래는 음악성이 부여되기 이전에 가사로서의 시가 선재한다. 이는 시노래에 있어 문학적 성격이 우선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노래는 시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시노래는 일반 문학의 영역 속에 넣을 수 있는 공통 속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시노래를 문학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일반 ‘시’와의 차이성을 통해 문학 장르로서의 시노래의 위상을 지정할 수 있다.
첫째, 시노래는 듣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둔다.
둘째, 음악적 요소를 통해 시의 운율적 요소가 배가된다.
셋째, 가창자가 있다.
넷째, 기록문학보다 다수의 청자(독자)에게 동시적으로 배포, 감상될 수 있다.
다섯째, 가사로서의 원시原詩가 다소 개작될 수 있다.
여기서 다섯째의 ‘원시 개작’은 다소 신중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와 시노래의 장르적 영역을 분리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다. 만약 시에 음정만을 붙인 것이 시노래라면 그것은 단지 인접예술과의 결합이라는 실험적 장르로 봐야 할 것이다. 시노래를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창출하는 장르로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가사가 되는 원시原詩가 음악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시에 맞춰 작곡된 음악 역시 원시原詩의 특징에 맞춰 그것의 내용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창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도 아니고 순수음악도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융섭된 시노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原詩의 개작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음악의 박자와 멜로디 때문에 원시原詩가 과도하게 훼손되어선 안 된다. 원시原詩 개작의 범위는 시인이 의도한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 한다. 구체적으로 창작된 시노래의 경우를 보면 ‘눈앞에 보이는’을 ‘앞에 보이는’(박윤배 시, 「연어가 되세요」)으로 바꾼다든지, ‘낡은 포장마차가’를 ‘포장마차가’(공광규 시, 「월미도」)로 바꾸는 등 노래의 박자를 고려한 최소한의 보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원시原詩의 흐름은 그대로 살리되 한 연을 후렴에서 한 번 더 반복한다든지, 중요한 구절을 후렴구로 삼아 반복하는 등 재구성, 재배열을 통해 음악성을 살린 시노래도 있다. 이처럼 원시原詩를 가능한 한 그대로 가져오되 음의 길이와 박자, 후렴 등을 고려한 원시原詩 개작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시노래가 문학의 장르로서 위상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시와 노래의 장르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장르적 특성을 넘어서야 하는 방법적 장치를 꾸준히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복합적 장르로 거듭나고 있는 시노래가 시의 대중적, 대량적 보급에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시노래가 갖는 특장은 시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강도를 높이는 데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시를 접하는 방식에 익숙한 상황에서 시노래는 이질적인 장르로 다가올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시노래에 대한 유도 방향은 원시原詩의 아우라를 함께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시와 시노래를 병행하여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다만 시노래는 원시原詩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체험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노래의 가사인 시는 원시原詩와는 또 다르게 이해될 것이며, 지적 작용에 의해 인식되는 시의 독서보다 복합감각적으로 감응될 수 있을 것이다. 시노래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서는 이러한 점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시노래의 장르적 위상은 인위적으로 규정되어선 안 될 것이다. 시노래를 창작하고, 시노래의 보급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시노래가 갖는 진정한 가치가 발생할 것이고, 그러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시노래 장르가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시노래에 대한 ≪리토피아≫의 지속적인 활동은 시노래 장르의 유착을 위한 가장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시노래 공연을 통한 대중적 확산 운동과 함께 시노래에 대한 학문적 고구도 함께 이루어져 내적으로도 튼실한 미학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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