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김구용의 시 오늘/장이지
페이지 정보

본문
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김구용의 시 오늘/장이지
‘어항’안의 수인囚人, 니체적인 것
오늘
김구용
무너진 經濟에 피어난 虛榮의 남녀들, 錯綜한 고민이 構築되다. 街路樹 아래 서서 지난날의 輪廓을 聯想하면, 다투어 廢都의 背景에 나타나는 욕망, 그러나 그것은 한낱 療飢도 될 수 없는 꿈이었다. 茶房 안 사람들의 對話는 計算機처럼 냉혹한 利損으로 오르내리고, 天惠의 다알리아가 花甁에서 시드는 季節이다. 금붕어는 監禁당하였을지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効果를 주는, 그 너머 큰 간판 글씨들이 絶叫하고, 海面을 건너온 物品, 쇼윈도우가 蠱惑의 웃음짓는 거리를 초만원 電車가 돌아나간 뒤, 모든 정신에 별도 달도 전등도 없는 밤이 내리다. 누구인지 파괴된 空間의 層階를 취하여 내려가는 구두 발자국소리, 어디론지 굴러 떨어지는 긴 悲鳴을 이윽고 어두움이 지워버린다.
2.
觀世音菩薩. 누구에도 아닌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점점 없어지고, 우리가 생활하는 오늘날 거리의 內部로 휩쓸린다. 나는 산란한 市場에서 自嘖없는 奸商군, 스스로 허위의 假面을 쓰고 食料品을 구하여 돌아온다. 어떻게 하면 너를 사랑할 수 있나뇨, 나의 미운 사람아. 아내도 굶지 않기 위하여 羞恥없이 몇 장의 紙幣를 받고, 언제나 발가숭이가 되는 人肉, 제 그림자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고독에 산[生]다. 생존한다는 것까지가 죄악이 되어버린 오늘날, 그 누구와도 相違點이 없는 나와 너는 뭇사람들이 누웠다 가버린 쓰레기통 같은 방에서, 은근히 음식을 권하며 同情으로 結合한다. 서로의 合掌은 절망에다 法 이전의 마음을 꽃피워, 너와 나 不條理도 肯定 않고 微笑하면, 門 너머 汚辱의 거리도 모든 것을 위하여, 그대로 一切가 觀世音菩薩.
3.
이 사형수를 보십시오. 온 몸을 태워버릴 듯 炎焰하는 빛깔의 옷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나의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나는 잘 익은 果實이며, 당신들에게 있어 마음의 糧食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보십시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收穫을 위한 이슬입니다. 미소를 보십시오. 내가 地上에서 오늘날을 홀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누가 손가락질하며 나를 꾸짖습니까. 나에게는 당신도 아름답게 익은 사형수로 보입니다.(1953)
김구용의 「오늘」은 제1연만 보면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가 연상된다. 그러나 역시 1950년대의 전형적인 전후 모더니즘 시의 품목들도 갖추고 있다.
‘다방’은 댄디들이 모여서 축음기 음악을 듣는 그런 1930년대식은 아닌 모양이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업 이야기 따위를 하는 전후의 착잡한 공간으로서의 ‘다방’ 안 풍경이 제1연에 제시되어 있다. 이권 때문에 친구를 앞에 놓고 ‘후라이’를 치는 사기꾼들도 있는지 모른다. 그런 손익을 재는 분위기가 테이블을 타고 넘을 만큼 협소하고 답답한 공간이 떠오른다.
제1연에는 ‘나’라는 시어가 없다. 제2연에는 나오는데 제1연에는 없다. 아마도 이 ‘나’는 다방 안 어느 소파에 깊이 파묻힌 채 손님들의 면면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렷다. ‘나’의 시선은 아무래도 젊은 남녀에게 가 머문다. 1950년대 가난하고 가난한 시절, 월급도 변변치 않을 것 같은 젊은 남녀가 다방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영의 남녀들’은 ‘무너진 경제’와 대비를 이루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구축’되고 있다. ‘구축構築’이란 말, ‘윤곽輪廓’이란 말이 시의 앞부분에 나오는데, 이런 말의 쓰임새는 역시 시적인 구도를 잡는 데 있었겠지 하는 짐작을 하면서 시를 읽으면 좀 읽는 맛이 다르다.
이 시선視線만으로 등장하는 ‘나’는 이 젊은 남녀를 보다가 문득 그들의 고민을 과거 자신의 그것에 겹쳐본다. 한 마디로 부질없는 꿈, 밥도 안 나오는 헛꿈이다. 그런 꿈들은 ‘폐도廢都’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어떤 한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한 세대의 두색된 욕망과 그 욕망의 좌절을 생각게 한다. 그러므로 다방 안에 시든 꽃이 화병에 꽂혀 있어야 할 법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그 시든 꽃은, 더욱이 외래어로 된 꽃 이름으로 보건대, 어떤 허영마저도 느껴지거니와, 꿈의 좌절에 대한 상징으로 다방 안 한 구석지에 놓여있을 법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금붕어’가 나오는 지점부터는 1930년대식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다. ‘어항’이나 ‘금붕어’는 이상李箱이 좋아했던 세목이었다. ‘물품’이나 ‘쇼윈도’ 같은 것은 이상이나 김기림도 편애했던 세목이었다. ‘나’는 유리를 통해 세상을 좀 다르게 보고 있다. 늘 보던 세상이 아니라 유리라는 필터를 몇 번 거쳐서 본 세상이니 이물스러울 수밖에 없다. 쇼윈도는 ‘물품’에 마법을 거는가. 건다. 걸기는 건다. 마땅히 걸 것이 아닌가. 이물스러운 것으로 변신시킨다. ‘물품’을. 가령 빛나게, 고혹적으로 보이게끔. 그 반면에 사람들은 전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저마다의 집으로 간다. 간판이나 물품이나 쇼윈도는 휘황하지만, 사람의 정신에는 빛이 없다. ‘무너진 경제’에 지친 누군가는 인칭으로 불리지도 못하고 ‘구두 발자국 소리’로 격하되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 비인간화나, 물신에 대한 비판 따위도 사실은 1930년대 느낌이다. 시대에 뒤졌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김구용이 난해하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사실은 ‘딱’ 떨어지는 명료함을 잘 숨겨놓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금붕어는 監禁당하였을지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効果를 주는, 그 너머 큰 간판 글씨들이 絶叫하고, 海面을 건너온 物品,[……]” 하는 문장은 나라면 절대 그렇게 안 썼을 것 같은 문장이다. 어쩌면 절대 그렇게 ‘못 쓰는’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 문장은 비통사적이어서 그랬는지 전집에 묶일 때는 반점(,)의 활용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전혀 쓸모없는 변개였던 게 아닌가 싶다. 비문이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오히려 비문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니체적인 비극적 상황.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위치가 그런 ‘니체적인’ 상황이라는 것인데, ―이 점은 아마 독자 여러분들도 몰랐을 텐데―그것은 제3연의 ‘사형수’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밝히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단 순서가 그렇지 않으니까 제2연부터 좀 해설해 볼까 한다.
제2연의 ‘관세음보살’의 수미상관은 어떤 구원 없는 상황의 영원한 지속처럼 읽힌다. ‘나’는 점점 없어져서 자기를 상실한 채 살 수밖에 없다. 이 ‘나’는 시인 자신은 아니다. 오히려 제1연의 내레이션이 시인의 것이고 제2연의 ‘나’는 현대적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 가깝다. 이 제2연의 ‘나’는 현대인에 대한 대표격이다.
우리는 저마다 ‘시장’에 살고 있다. 김구용이 자주 ‘시장’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좀 진중하게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은 나름대로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감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시장에서 ‘나’는 ‘간상奸商’ 노릇을 하여 ‘식료품’을 구해 집으로 간다. 그는 “어떻게 하면 너를 사랑할 수 있나뇨, 나의 미운 사람아.”라고 하여 매춘을 하는 아내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매춘하는 아내의 이야기는 이상의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이상이 언제나 자본주의의 생리에 ‘정통한’ 여자들에게 당하는 반면, 김구용이 그리는 매춘부 아내는 매우 동정적으로 그려지곤 한다.
“제 그림자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고독”이라는 구절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읽었다. 제그림자를 너무 깊이 보고 있는 고독한 사람의 정경이 떠오른다. ‘고독’은 차라리 산다는 술어와 결합하면서 생生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어버린 전후의 현실에서 인간은 ‘고독’이라는 독 안에 든 쥐.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나온다. “뭇사람들이 누웠다 가버린 쓰레기 같은 방”이라는 구절이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다. 물론 이 시에는 매우 정교한 상징과 패러독스가 있지만, 그 안배는 어디까지나 지성의 소산이며, 실존의 차원에서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쓰레기 같은 방’인 것이다. 미운 사람이지만 사랑하고 싶은 아내에게 줄 수 있는 방이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어떤 거창한 것보다는 이런 것을 읽어야 한다.
서러운 사랑. 그것은 ‘합장’이다. 이 가난한 부부의 정상은 사랑이라는 흔한 말로는 다 말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으로 보일 만큼 서러운 것이다. 그들의 방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이 순간 ‘문 너머’의 거리가 더럽다고 위안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의 이해는 사실은 제2연에서 그쳐도 좋다. 그런데 제3연은 시에 익숙지 않은 독자에게는 난해할 것이다. 난해하기 때문에 해설이 필요하다. 시를 난도질하려고 해설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제3연의 ‘사형수’는 어디서 갑자기 나왔을까. 그는 물론 제2연의 “생존한다는 것까지가 죄악이 되어버린”이라는 구절에 이어져 있다. 그런데 “염염炎焰하는 빛깔의 옷”이라는 수사는 왜 나왔을까. 그것은 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쓴 것이 아니다. 멋을 부리려고 썼나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김구용 시가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것인데, 난해하지만 매우 명료하다. “염염하는 빛깔의 옷”은 제1연의 ‘금붕어’의 비늘을 가리킨다. ‘금붕어’는 어항에 ‘감금監禁’당해 있다. 물론 감금당해 있을지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효과’를 준다. 제3연은 제2연의 현대인을 제1연의 금붕어에 빗대어 실존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존재로 그린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제1연에서 소파에 파묻힌 채 실내를 여기저기 뜯어보고 있는 관찰자 ‘나’가 어항을 보면서 하는 생각의 편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3연은 제1연과 제2연의 시상을 통합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시의 ‘이해’는 제2연까지만 ‘잘’ 읽으면 제3연 없이도 가능하다. 제2연에 이미 수인의식囚人意識이 나온다. 물론 제1연의 ‘어항’이 지닌 ‘감금’의 코드도 제2연까지 읽으면 명확해진다. 그러나 역시 시를 읽는 차원이 아니라 시를 쓰는 차원에서는 제3연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운산하면서 읽으면 시가 더 재미있다.
제3연의 어조도 사실은 재미있는 것이다. “이 사형수를 보십시오.”는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대응시켜 읽을 수도 있다. 니체의 위악적인 포즈에는 그의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이 깔려있거니와, “금붕어는 감금당하였을지라도,[……]모든 정신에 별도 달도 전등도 없는 밤이 내리다.”의 제1연에 나오는 긴 비문에는 어항 속에 갇힌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이 ‘니체적으로’, 일종의 포즈로 형상화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오늘’의 현주소임을 갓 서른을 넘긴 한 시인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져 보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인보다 더 젊은 시절에 이 시인은 한 천재를 드러내고 있었음을 능히 알 만하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2007), 편저 <이수복 시 전집>(2009)이 있음.
- 이전글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백석의 시/남승원 11.12.28
- 다음글42호(여름호)/정우영의 시평 에세이/정우영 시인 11.12.2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