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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여름호) 특집 젊은 비평가들이 읽은 아프리카 문학/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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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딘 파라의 장편 지도읽기
고 명 철 |문학평론가
1. ‘보여지는’ 아프리카: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폭력
깊이 우거진 밀림,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낯설고 두려운 동식물과 풍토병, 문명과 거리를 둔 원시의 삶을 살고 있는 부족 등은 아프리카를 전혀 모르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 각인된 아프리카의 초상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아프리카에 대해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이국적 풍경에 의해 굴절된 아프리카를 마치 아프리카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한다.
이렇게 ‘보여지는’ 이국적 풍경으로서 아프리카는 문명의 손길이 가 닿지 않는 야만의 세계이며, 미지의 세계이고, 인류의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고고학의 장소로 자연스레 인식되고 있다. 서구의 눈에 의해 ‘보여지는’ 아프리카는 이국적 풍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서구의 눈에는 아프리카의 사람이 포착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사람이 아닌,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경을 구성하는 피사체 중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서구가 아프리카의 엄청난 천연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할 노동력일 뿐이다. 여기에다 그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 아래 가난과 질병 그리고 내전으로 고통 받으면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최하층 약소자로서 유달리 부각된다. 말하자면 아프리카는 신에게 저주받은 땅으로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행복과 무관한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십상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폭력적 인식인가. 아프리카가 다른 대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서구중심의 합리적 문명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습속과 행태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되, 아프리카에도 사람들이 엄연히 살고 있으며 아프리카 고유의 창발적 문화를 그들은 향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아프리카식 근대를 추구하는 가운데 생기는 온갖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힘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 역시 서구 못지 않은, 서구의 일방통행식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기존 어설픈 통념과 숱한 인식의 오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일환으로 아프리카의 작가 누르딘 파라Nurddin Farah의 장편 지도maps(1986)1)를 읽어본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서구의 근대소설에 익숙한 내게 이 소설은 점차 퇴행하고 있는 근대소설의 양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서구가 아닌 비서구에서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는 모종의 비평적 계시를 만난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 나포된 세계문학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비평의 또 다른 준거들을 확보하는 기쁨을 만끽해본다.
2. ‘응시’와 2인칭의 서술전략:소말리아의 중층적 객관현실
지도를 읽는 것은 기존 낯익은 서구식 근대소설과 충돌하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새롭기도 하면서 낯선 측면은 지도의 주류적 화법으로 2인칭을 서술전략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번역자가 언급했듯 “파라는 이 작품 전체를 2인칭 화법으로 관통함으로써 1인칭 화법의 주관성 혹은 3인칭 화법의 객관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11쪽) 그렇다면 작가가 이처럼 줄타기의 모험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작가의 이 같은 2인칭의 서술전략화를 서구의 미의식으로 파악한 나머지 (탈)모더니즘으로 이해해서는 번짓수를 잘못 짚어도 여간 잘못 짚은 게 아니다. 하여, 작가가 2인칭을 서술전략화한 의도를 섬세히 읽어내는 일이 긴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인칭으로 불리우는 작중인물 아스카르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아스카르는 “빼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로 조숙함의 징후를 풍성하게 지니고 있”는데(19쪽), 특히 아스카르만이 볼 수 있는 “어떤 계시”(22쪽), 즉 ‘응시gaze’의 권능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스카르의 ‘응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아스카르의 ‘응시’를 서구의 합리적 이성의 ‘시선see’과 착종해서는 곤란하다. 아스카르의 ‘응시’에 대해 작가는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함축한 직관”(12쪽)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존재를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나눠 인식의 유무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분별지分別智와 구분된다. 특히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명확한 구별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와 구분된다. 더욱이 계산가능성과 유용가능성의 합리적 준거틀을 갖고 세계를 파악하는 것과 구분된다. ‘응시’는 어떻게 보면, 서구가 발견하여 맹신하고 있는 합리적 이성의 문제틀과 전혀 다른 진리 탐구의 방법이자 태도이며, 그러한 차원에서 동시에 세계의 미를 탐구한다.2)
여기서 이 ‘응시’의 권능이 아스카르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린 아스카르를 친엄마처럼 정성스레 키워준 미스라에게도 ‘응시’의 권능이 있다. 미스라는 마치 주술사처럼 죽은 짐승의 내장을 통해 타자들의 일을 ‘응시’하는가 하면, 아스카르의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응시’한다.
서구의 합리적 이성의 측면에서는 이 ‘응시’를 모종의 마법적 주술로 치환해버리기 십상이다. ‘응시’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이러한 판단을 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아스카르와 미스라의 ‘응시’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끊임없는 전쟁과 피난 그리고 이산의 역사”(29쪽)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지도>는 1977년 오가덴Ogaden 지역을 중심으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스카르와 미스라는 이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파편화된 육체의 이야기들!/파편화된 이야기의 육체들!/상심한 가슴과 상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들!”(305쪽)을 보고 들어온 터에, 그들의 ‘응시’는 전대미문의 참상과 비극을 견뎌내는 정치적·윤리적 항체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이 ‘응시’는 역사와 현실을 비껴난 신비의 영역에서 마법화된 주술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에 대한 핍진한 태도로 갈갈이 찢겨지고 흩어지고 소멸해간 뭇존재들의 슬픔을 위무해주는, 아프리카 특유의 ‘리얼리즘적 주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도의 주된 무대인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으로, 인도양과 홍해의 입구인 아덴만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지정학적 이유로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식민 통치 아래 서구의 이해관계(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따라 영토가 분할 점령당하였는가 하면, 1960년 소말리아공화국으로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군정파軍政派들의 심각한 대립 갈등으로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는 실정인데(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간섭), 아스카르와 미스라는 이 같은 역사적 정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응시’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응시’는 이 복잡한 현실을 분석적 태도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작게는 소말리아가 처한 현실, 넓게는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을 중층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해법을 서구의 일방통행식 합리적 이성(가령, 권력의 우열관계에 따라 합의한 각종 정치사회적 계약)에 의한 게 아닌, 아프리카가 지닌 문화와 역사에 기반한 ‘응시’를 통해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응시’의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2인칭 서술전략화는 이 ‘응시’에 함축된 소설적 전언을 효과적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서구 중심 혹은 소말리아 중심 혹은 에티오피아 중심 혹은 이 지역 특정한 부족 중심의 1인칭 화법을 통해서는 이 지역의 복잡다변한 중층적 객관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현실을 객관적 시선으로 온전히 파악하는 일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칫 객관이란 미명 아래 주관적 폭력이 자행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2인칭 서술전략화는 이 지역의 중층적 객관상황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고, 작중인물들 사이(특히 종족간 분쟁으로 형성된 적대적 관계에 대한 소통)와 독자와 작중인물 사이(아프리카 밖 사람들과 이 지역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의 소통)의 물꼬를 트는 데 매우 긴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것은 아스카르의 비범함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아스카르는 주변 인물들에게 고백한다. 아스카르의 섹스와 젠더는 남성인데, 그의 몸 안에 여자가 살고 있으며, 심지어 월경月經을 한다고 말한다.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스카르의 이러한 면모를 정신분열증 및 젠더적 측면에서 봐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아스카르의 이러한 정신분열증을 치유의 대상으로 설정하거나 성性 정체성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도 곤란하다. 아스카르가 실감하는 이 신체의 비정상적 징후야말로 이 지역의 격렬한 내전과 그로 인한 끔찍한 참상은 물론, 아스카르의 ‘응시’에 함축된 소말리아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침탈로 인해 분할된 영토, 하여 소말리아 인접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산 등을 은유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온당한 해석이 아닐까.3) 말하자면 작가는 아스카르의 비범함 그 자체를 통해 소말리아의 중층적 현실을 매우 효과적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3. 아프리카 서사문학의 매혹:구술성과 문자성의 공존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지도를 읽는 동안 “유럽중심주의에 나포된 세계문학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비평의 또 다른 준거들을 확보하는 기쁨을 만끽”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구술성the orality과 문자성the literacy의 길항·간섭·충돌을 통해 아프리카 태생의 작가가 실현하고 싶은 서사적 과제를 매우 훌륭히 해결하고 있다는 비평적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지도가 지닌 서사적 매혹의 비의성은 아프리카의 구체적 삶에 밀착한 소설의 양식이 구술성과 문자성의 오묘한 관계로부터 생성되고 있다.
가령, 아스카르의 비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료적인 이놈의 나라가 요구하는 그 어떤 신분도 너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아스카르! 네 이름 가운데 있는 ‘스’자를 사람들은 부드럽게 발음했다. 괜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카’자의 ‘ㅋ’은 발설되지 않은 소리의 비밀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감미로운 혀 속에 휘감겨 있었다. 아스카르! ‘르’자의 ‘ㄹ’은 반나절 동안 신나게 풀을 뜯은 뒤 뜨거운 모래 위를 뒹구는 소와 같았다. 아스카르!(27쪽)
소말리어로 ‘아스카르’를 부를 때 조음기관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리로부터 비롯된 느낌과 이미지가 아스카르의 비범성을 암시한다. 아스카르의 비범성은 ‘응시’와 양성兩性의 공존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데, 여기에는 이처럼 ‘아스카르’를 소리로써 호명할 때 지니는 어떤 힘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 힘은 아프리카의 대지, 바람, 물, 그리고 살아있는 뭇존재와 공명共鳴하는 가운데 절로 생성된다. 이것이 바로 구술성의 힘으로, 아스카르의 ‘응시’를 통해 아프리카가 직면한 첨예한 문제들은 “전방위적인 맥락에서 탈식민화의 도구적 내러티브로 적극 활용”4)되는 구술성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
지도에서 이 같은 면은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에티오피아인 미스라는 비록 소말리아인 아스카르를 친자식처럼 돌보며 소말리아 땅에서 살고 있으나 소말리아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거나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상처받은 자신을 추스를 때마다 에티오피아어인 암하릭어를 몰래 읊조리곤 한다. 오가덴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히 벌어지는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전쟁의 틈새에서 미스라는 소말리아에 살면서 남몰래 에티오피아어를 읊조렸던 것이다. 전쟁의 난민이나 다름없는 미스라에게 에티오피아어는 그녀의 현존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구술성은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삶 그 자체이다. 한때 서구 제국의 언어가 아프리카의 구술성을 외면하고 심지어 폭압적으로 금기하고 한갓 노예의 언어로서 취급을 하였으나, 아프리카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구비전승한 구술성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지도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서사문학적 산물들―신화, 전설, 민중가요의 중요성과 가치가 작중인물들에 의해 주목되는 것은 문자성을 주축으로 한 서구 제국의 언어 질서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정치적 욕망을 쉽게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아프리카 스스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정비하고자 하는 정치적 욕망도 저버릴 수 없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서구의 식민 통치를 받은 아프리카는 신생 독립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들 특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일방통행식 문자성을 고집하기 어렵다. 물론 아스카르의 삼촌 힐랄은 근대국가의 공식언어를 자리잡기 위해 소말리어의 공식어 사용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문자성으로서 소말리어 사용이야말로 아프리카가 그토록 희구하던 근대국가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파악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지도의 경우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하루 속히 내전이 종식되고 근대국가의 체제 정비 일환으로 구술성보다 문자성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작가가 작중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이에서 경계하고 있듯, 작가는 문자성의 맹목이 가져올 위험을 또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하여, 작가는 아스카르와 미스라를 통해 구술성의 가치 또한 소중히 부각시킨다. 이에 대한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아스카르는 화물차를 타고 가는 도중 소말리아인들이 1950년대에 애창되던 민중가요를 우연히 듣는다. 아스카르는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 위치한 완충지대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249쪽)는다. 처음 듣는 소말리아의 민중가요인데도 불구하고 아스카르는 그 노래를 듣고 잠자는 자신의 영혼을 깨운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영토가 분할돼 점령당하던 1950년대에 널리 불리운 민중가요가 아스카르의 영혼을 새삼스레 깨운 것은 지난 날 식민의 예속적 삶을 살아온 역사의 기억을 불러일으켜 그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밟지 않기 위한 작가의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요컨대 지도에서는 소말리아어와 에티오피아어의 긴장을 통해 오가덴 지역에서 벌어지는 영토 분쟁과 관련한 현실을 주목하게 하고, 문자성에 기반한 서구 제국의 언어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욕망을 인식하게 하고, 신생 독립국가로서 서구의 모델과 구분되는 아프리카식 근대국가의 기틀을 정비하고자 하는 정치적 욕망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구술성과 문자성의 길항·간섭·충돌로부터 서구중심의 근대소설 양식의 서사 매혹과 전혀 다른 그것이 절로 생성되고 있다.5) 어쩌면 이것이 바로 퇴행하고 있는 서구의 근대소설의 양식을 혁신할 수 있는 자양분일지 모를 일이다.
4. 비서구 작가들의 평화적 연대로 지도 그리기
누르딘 파라의 지도가 지닌 서사의 매혹을 이 짧은 지면에서 충분히 다루기는 어렵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곰곰 숙고해보았다. 인도양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프리카는 지구 문명의 주요한 교차지로서 외래 문화가 두 대양을 통해 밀려오더니 서구 식민지로 전락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획된 경계선은 곧바로 신생 독립국가들을 구분하는 국경선으로 고착화되었다. 그렇게 아프리카 지도 위에는 반듯한 선들이 그어졌다. 아프리카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서구에 의해 반듯한 국경선들이 지도 위에 그려지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약소자들의 신체, 즉 “몸이라는 지도”(156쪽) 위에는 온갖 언어절言語絶의 식민의 아픈 상처와 연루된 끔찍한 기억들이 깊게 패어 있다.
이 같은 지도에 아프리카의 삶은 구속돼 있다. ‘검은 대륙’이란 말에 숨은 오리엔탈리즘은 아프리카 지도 위에 고스란히 객관의 탈을 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곳곳에서는 아직도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어 근대국가를 향한 힘든 행보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북부 아프리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민주화 운동은 아프리카식 근대 추구를 향한 신열身熱의 고통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이 서구 중심에 의해 구획된 근대의 지도가 오류 투성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누르딘 파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다른 작가들, 그리고 비서구의 작가들에게 문제적인 것은 서구중심의 지도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비서구 작가들의 평화적 연대에 의해 창조적으로 지도를 그리는 일이다. 이 지도를 갖고 우리는 삶의 아름다운 가치와 행복을 찾아나설 수 있을 것이다.
고명철∙1970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저서로는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등 다수. 고석규비평문학상 및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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