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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여름호) 특집 젊은 비평가들이 읽은 아프리카 문학/ 고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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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딘 파라의 지도에 대한 단상
고 인 환|문학평론가
1.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이다. ‘해적의 나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청해부대의 아덴만 작전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국가이다. 이러한 소말리아 출신의 대표적 작가 누르딘 파라가 비서구 작가들의 연대를 모색하는 ‘아시아 · 아프리카 · 라틴 아메리카 문학포럼’AALA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해적소탕작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 ‘물론 해적행위는 나쁘지만 소말리아 해역에서 마구잡이로 어획을 하는 국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누르딘 파라는 ‘2000년대 들어 줄곧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아프리카의 대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지도(1986)가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이미 스물 한 개 언어로 번역된 작품이지만 우리에게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지도는 ‘오가덴’이라는 지역을 가운데 두고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서 벌어진 영토분쟁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소말리아는 19세기 이래 유럽 강대국의 침략,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끊이지 않는 내전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구 열강이 그들의 이권에 따라 무자비하게 그은 국경선에 의해 소말리아 민족은 다섯 개의 소국가로 분단되었다.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조국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고인환∙문학평론가,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 젊은평론가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지도는 퍽이나 낯선 성장소설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의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과 그 성격이 다르다. 주인공 즉, 성장의 주체가 이른바 서구적 의미의 ‘근대적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서구적 의미의 ‘근대성’에 끊임없이 회의의 시선을 보내며, 이와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아프리카(소말리아)적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고향 오가덴(미스라)과 소말리아 공화국의 수도 모가디슈(힐랄 삼촌)는 화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두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미스라와 연결된 충만함의 세계는 모가디슈로 떠난 아스카르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힐랄 삼촌으로 대변되는 모가디슈의 세계 또한 아스카르의 새로운 고향으로 자리 잡는다. 아스카르는 오가덴과 모가디슈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심문하고 있다.
화자는 미스라와의 충만한 우주에서 힐랄 삼촌의 세계로 순례를 떠난다. 이윽고 미스라와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는 미스라의 대체물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국 소말리아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조국은 아스카르의 욕망을 온전하게 충족시키지 못한다. 남자인 아스카르가 월경을 하는 모습이나 입에 피가 고이는 현상 등은 새롭게 발견한 조국 소말리아에 온전히 동화하지 못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몸이 남자(국가/조국)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조국(소말리아)의 모습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미스라와의 관계는 이와 다르다. 아스카르는 혈통과 고국이 다른 미스라와 한 몸이 된다. 미스라는 에티오피아의 계약 결혼인 다모스 결합으로 태어났다. 돈으로 산 첩실의 아이인 셈이다. 그녀는 전쟁의 희생양(전리품)이 되어 거부에게 입양된 후 그의 아내가 된다. 미스라는 남편을 살해하고 다시 돈 많은 사내(꾸락스 삼촌)를 만난다. 이후 가정부에서 정부로 몸을 바꾸어 아스카르를 만난다. 미스라의 이름은 ‘이 땅의 토대 혹은 기초’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과 아스카르의 종족이 같다고 여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스카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스라의 동족의식은 혈연, 인종, 민족, 국가 등을 넘어선 공동체의식이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녀는 너를 모태의 세계와 순수의 세계로 되돌린 사람이자 너를 새로운 생명의 물과 성수로 깨끗이 씻기고 네 속에 젊고 튼튼한 자아를 새겨 넣어 고통스런 기억을 없앤 인물이었다(누르딘 파라, <지도>, 이석호 역, 인천문화재단, 2010, 24쪽, 이하 쪽수만 표기).
아스카르의 영원한 어머니이자 우주 그 자체인 미스라는, 아스카르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소말리아의 비극적 역사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이따금 제 속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아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같아요. 누군가 저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요. (중략) 제 어미의 죽음이 제 탄생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래요. 꼭 제 어미가 죽어서 제가 태어나게 된 것 같아서요.”
(중략)
삼촌은 초조하게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네가 지금 몇 살이냐?”
그가 물었다.
“여덟 살이요.”
그는 이제 우주 전체 아니 그 이상의 것들이 모두 사라져도 좋다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중략)
그리고 그는 그가 지금껏 연구해온 모든 자료에 불을 붙였다. 그는 후에 살라도에게 말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지금껏 연구해오던 방향이 완벽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299-301쪽,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에서 아스카르 속의 ‘누군가’, ‘나이가 많은 여자’ 혹은 ‘제 어미’ 등은 소말리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 무엇으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조국인 소말리아의 죽음 이후 태어나 ‘미스라’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 미스라와의 유대는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조국의 모습을 암시하는데, 힐랄 삼촌을 지탱해 오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 태도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서구적 의미의 근대성에 바탕한 국민국가(소말리아 공화국의 수도 모가디슈의 세계)의 이념과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스카르는 온전한 어미(온전한 조국)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2.
지도의 화자는 1인칭, 2인칭, 3인칭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특히, 2인칭 화법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주관성과 객관성에 함몰되기 쉬운 극단적인 현실인식을 경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하나로 쉽게 통합될 수 없는 소말리아(아프리카)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체성과 이를 서술하는 화자의 분열된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주관과 객관, 감성과 이성, 말과 글, 민족과 국가, 자아와 세계, 이상과 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바탕으로 소말리아(아프리카)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선조성을 구부리는 파편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18세의 아스카르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진술 양식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소말리아의 정체성에 대한 심문과 다르지 않다.
주인공 ‘아스카르’는 이미 성장한 인물, 즉 예언자나 선지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의 ‘시선(응시)’은 합리적 이성 너머의 초월적인 그 무엇을 상징한다. 아스카르의 응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소망 혹은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소말리어를 구사하는 지역 전체의 재통합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렇듯 아스카르는 ‘어른의 정신’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며, ‘앎과 이해’를 갖춘 자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 너머의 진실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체현하고 있다.
이러한 아스카르의 사명은 ‘파편화된 육체의 이야기들’ 혹은 ‘파편화된 이야기의 육체들’, 즉 조국의 분단으로 인한 ‘상심한 가슴과 상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아스카르의 꿈은 ‘소말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땅과 바다를 온전히 되찾는 것’이다. 이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모가디슈(힐랄과 살라도)와 오가덴(미스라) 사이, 즉 국가적 정체성(공화국)과 인종적·민족적 정체성(고향)의 통합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살라도는 에티오피아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방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중략)
힐랄이 말했다.
“에티오피아(까만 얼굴을 가진 사람)라는 말은 정확한 분류가 불가능한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일컫는 일반명사란다. 서로 다른 종족과 서로 다른 종교 그리고 서로 다른 조상을 모시는 사람들이 바로 이 에티오피아라는 말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뜻이지. 그러므로 ‘에티오피아’라는 일반명사는 확장적인 성격과 내포적인 특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지. 반면에 ‘소말리아’라는 말은 달라. 소말리아는 아주 구체적이지. 그 누구도 소말리아인이거나 소말리아인이 아니지. 둘 중의 하나뿐이야. ‘에티오피아인’이라고 할 때는 그런 구분이 불가능하지. 그런 취지에서 본다면 ‘나이지라아인’도, ‘케냐인’도, ‘수단인’도, ‘자이레인’도 모두 마찬가지지. 모두 구분이 불가능하지. ‘에티오피아’라는 말의 의미는 검은 인종의 땅을 의미하기 때문이지.”(293쪽, 강조는 인용자)
“소말리아는 소말리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지. 소말리어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공동의 조상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란 뜻이지.”(294쪽)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일반명사와 구체명사의 싸움이다. 일반명사는 외부인이 아프리카인들을 타자화한 명칭이다. 에티오피아라는 말은 ‘까만 얼굴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일반명사에 속하는 국가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소말리아는 구체적이다. 소말리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즉, 소말리어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공동의 조상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이다. 소말리아 사람들은 한 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일반명사를 추구하는 외세와 이를 지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강압적인 논리 때문이다. 작가는 소말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통일조국, 즉 ‘국경’, ‘국기(국가)’, ‘국어’의 경계를 넘어선 구체명사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누르딘 파라의 지도를 통해 우리는 외세의 강압에 의해 분열된 한반도의 현실을 되비추어 볼 수 있으며,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낀 우리의 초상을 재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한반도 또한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분단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의 상황은 하나 된 민족국가를 꿈꾸는 한반도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지도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인환∙문학평론가,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 젊은평론가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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