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2호(여름호)오늘의 시인/신작시 대표시 산문/강우식
페이지 정보

본문
체 게바라 외 9편
세계 각국의 마그넷이 산동네 판잣집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는 우리 집 냉장고 문짝엔 체 게바라도 있다. 내 눈엔 꼭 볼리비아 산 도적 닮은 이 사내를 어느새 은근히 마음에 두었던지 체 게바라에 대하여서는 혁명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까막눈인 아내가 이역만리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떠억 데려왔다.
내색은 전혀 안했지만 체 게바라를 볼 때마다 우리 집 여편네가 내게 밤낮 술이나 쳐 먹고 팔도가 좁다고 계집질이나 하며 어영부영 살다가는 이 집구석 혁명으로 풍진박살 낼 수 있다는 으름장으로 보여 겁이 났다.
하지만 겉으로는 쳇 저 따위 마그넷 체 게바라쯤이야 삼태기로 데려와 봐라 눈 하나 끔적하나 큰 소리 탕탕 치고 하늘이 떠나갈 듯이 하하하 웃지만 저놈 죽어서도 힘이 있긴 있네. 어느새 일면식도 없는 내 마누라 곁에 자석(마그넷)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예까지 왔으니. 하여간 잘나긴 잘났어. 에라! 모르겠다. 만세다. 만세.
고층유리 청소부
검은 버섯처럼 치솟은 도시의 빌딩을 배반의 문신으로 등에 새기고 투명한 유리벽과 마주하는 일상이다. 줄 하나에 매달린 목숨은 어느 순간인들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다. 벽을 마주하고 벽을 닦아야 하는 캄캄한 절망 앞에서 나는 가끔 저 투명한 벽 너머의 나와는 전혀 소통이 안 되는 타인의 삶을 본다. 까마득한 허공에 점 하나로 매달려 바람에 휘불리는 목숨은 차라리 삶의 도정이 이럴 바에야 전쟁이라도 터져서 저 유리벽이 산산조각 파편으로 흩어지고 안과 밖이 없는 폐허가 되었으면 하지만(박살나더라도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꿈꾸지만) 그런 불행한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나는 매일 거대한 벽 밖에서 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일뿐이다. 당장 벽이 없으면 하루의 생계가 걱정인 내 삶이 있기 때문이다. 유리벽에 묻은 찌들은 때를 닦으며 들여다보는 저편 세상의 편안함이 결코 내 삶이 아닐지라도, 내 마음을 닦듯이 말끔히 닦다보면 비록 그것이 한 뙈기의 땅이나 논마지기는 아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저 푸르른 창공으로 흘러가는 새들과 구름도 무슨 영화 속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 혼자만의 한가한 일상도 있다. 유리벽을 닦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어느 삶인들 한 가닥 목숨을 걸지 않은 삶이 있으랴. 그 운명마저 사랑해야지. 어느 해인가 빌딩 숲속에 자리한 교회의 유리창을 씻으며 내가 갈 수 없는 저 유리벽 너머에 하나님도 계심을 알았다. 거기 내가 아무리 유리벽을 닦으며 간절히 소망해도 대답이 없는 하나님이 있었다. 하지만 실내에 계신 하나님도 허공에 매달린 내 인생을 보고 당신이 계신 벽 안의 세계로 이끌어 줄 날이 벽을 닦다 보면 있으리라 확신하며 파리 같은 목숨 빙벽에 매달려 오늘 하루를 까만 점 하나로 산다.
마리아나해구
바다도 하늘색 따라 변함을 마리아나 해구에 와 실감한다. 세계에서 제일 깊은 바다가 있는 해구 위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다리 위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간다. 저 바다에는 어머니가 계시다. 수심 1만 미터의 심연도 겁나지 않다. 어머니가 계신데 세상에 무엇이 겁나랴. 바다인데 바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해저 1만 미터의 압축된 고요. 정밀한 고요. 그저 꿈만 같다. 그 해표면 위에 나는 평소에 어머니처럼 간직했던 은가락지를 떨어뜨렸다. 은가락지 속에 바다로 침잠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1만 미터 아래로 무심히 가라앉는 은가락지에 1만 미터의 물의 두께들, 층층겹겹 쌓인다. 이 깊은 물의 밑바닥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과 같은 곳이다. 어머니는 그 깊이에서 은가락지로 빛날 것이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다. 어머니는, 살아생전에도 늘 그래왔듯이 죽어서도 아들이 좋다면 이 까마득한 남태평양 한바다에 가라앉아 다른 한 생을 외로워도 견딜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나만의, 나만의 어머니다. 1만 미터의 고요와 정밀 속에 일렁이는 순수다. 바다다. 마리아나 해구는 무지개가 서야만 내가 꿈의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가는 1만 미터의 깊이다.
이스탄불
아직도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옛 향수에 젖어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바자르 초입 茶館에서 사과차를 한 잔 시켜놓고 한가롭게 물 담배 피우는 노인들을 구경하다 이국의 풍물에 끌려 들어선 골목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미로와 같은 골목길은 개처럼 헤맬수록 더욱 수렁 속이었다. 더럭 겁이 났다. 구경보다는 길 찾기에 골몰하다 기진하여 쳐다본 터키석 하늘엔 블루모스크의 첨탑이 등대처럼 보였다. 나는 어느새 미로를 헤매다 이 땅의 풍물에 젖고 배여서 터키인이 된 듯했다.
어둠의 중량이 토카프 궁전을 채우고 넘쳐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결을 스칠 무렵 카페에 들러 키신저 전 국무총리가 안경알을 빛내며 보던 배꼽춤을 관람했다. 댄서의 궁둥이는 대륙을 압도했다. 한 쪽은 유럽파, 한 쪽은 오리엔탈. 두 궁둥짝이 주는 혼돈 속에 나는 결코 저들의 춤에 동조하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실감했다.
실크로드의 旅愁가 어려 있는 인종전시장 같은 여인숙. 숙소에는 먼 길을 돌아온 동양의 한 사내가 이국의 계집을 품었는지 밤새 살 태우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정말 좋긴 좋은데…… 뭐라 할 수는 없고,,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어머니가 물려주신 은장도 생각이 간절했다. 이스탄불이여. 제발 잠 좀 자자. 잠도 없니.
슬픈 Y담
내 고향 주문진에서는 바닷물고기도 절기 따라 사는지 아카시아 꽃 필 때면 영락없이 꽁치가 잡혔다. 고맙게도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꽁치 회 먹으러 내려오라는 기별이 왔다. 일흔의 나이에도 누가 갯가 사람이 아니랄까봐 사내나 계집이나 꽁치 회에 죽고 못 사는 우리는 소식 오기가 무섭게 서울 사는 초등학교 동창생끼리 내려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주문진까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차 속은 주둥이만 살아 동동 뜬 일흔답게 처음부터 Y담 천국이었다. 특히 한 달포 전 팔순의 홀아비와 맺어진 과부 동창생은 갓 결혼해서인지 달콤 씁쓸한 Y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하 호호로 내려가는 고향 길이었다. 배꼽들은 모두 빠진지 오래되었다. Y담을 듣던 동창 중 한 명이 ‘야 너 그러지 말고 라이브로 늬 신랑하고 첫날밤 새운 얘기 좀 해 봐라. 고사리 같은 물건으로 그게 되긴 되데……’, 한참을 망설이던 여동창생이 지 허즈 고사리 운운 품평회가 싫었던지 ‘고사리, 고사리 같은 소리하지마라. 나 피 나왔어!?’ 시침 뚝 따고 던진 한 마디에 모두들 기가 막혀 웃어야할 대목에 ‘어머, 어머머’ 하더니만 기절초풍 말도 못하고 그만 조용해지고 말았다.
동에서 서로 바쁜 유월이었다. 집에 온 다음날 이번에는 대학동창끼리 몇이서 서천 판교로 매실 따러 갔다. 그곳은 동창 중 한 명의 고향이었다. 초등학교보다는 좀 많이 배워서인지 어딜 가나 빠질 수 없는 Y담이 이번에는 간간히 이어졌다. 내가 Y담 중 피나온 얘기를 옮겼다. 듣던 동창들이 모두 같은 또래의 칠순이어서인지 웃음 토네이도가 휩쓸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못한 초등학교 동창끼리의 웃음을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대학동창들이 대신했다. 하도, 하도 깔깔대니까 바다도, 하늘도, 땅도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웃다가는 바다도 하하하 증발하고 하하하 땅도 하늘로 뒤집혔다. 무아지경이었다. 그리고 화두가 시작됐다. 술 한 잔에도 바둑을 두면서도 매실을 따면서도 ‘나 피 나왔어’ 화두 만발이더니 마침내 그날 밤에는 역사적인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와의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진짜 피를 보는 비극이 벌어졌다. 오, 필승 코리아! 어쩌다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내 고향 주문진에서는 내년에도 아카시아 꽃 피면 꽁치 회 먹으러 오라는 기별이 있겠지만 서천 사는 친구는 다시 매실 따러 가자고 입에 담을지 어떨지 나지도 않는 피를 철철 본 하루가 가고 있었다. 아 늙봄 하루는 유행가 가락처럼 애련히 가고 있었다.
장모상
장모 박아무개 여사는 91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외아들도 시집간 딸들도 나름대로 모시지 못한 까닭이 있겠지만 나는 장모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본다. 불효스럽게도 딸들은 어머니를 뵈올 때마다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한 발 먼저 간 아버님 곁으로 가시라고 틈만 있으면 권유했고 마침내 장모는 단식 아닌 단식 끝에 체중이 25kg으로 줄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살아 있는 유일한 즐거움인 일일 저녁드라마 ‘미우나 고우나’의 끝도 못보고 말았다. 혼자 사는 외로움의 그 지독한 깊이를 누가 헤일 수 있으랴. 나는 입관시 미이라 같은 그 몸뚱어리가 고독으로 찌들고 인이 박혀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장례 후 장모의 방에는
누가 먹으라는 것인지 정성스레 담근
노오란 모과주가
장롱 속에 한 병 있었다.
효자지게
올해 아흔 둘의 이선주 씨는 햇볕도 묵은 먼지 말짱 털어내는 맑고 고운 봄날 툇마루에 앉아 해바라기하며 속말로 금강산에 한 번 가봤으면 하고 가는 숨을 내쉬었다. 그걸 어찌 알았는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막내아들이 짐작을 하고는 워낙 연로하신지라 궁리 끝에 어릴 적 나뭇짐 지던 생각이 문득 일어 특수지게를 만들어 유람키로 했다. 체중 62kg의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북측 입국 심사대에 이르렀다. 군관동무가 궁금한지 ‘이게 뭐요’, ‘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에 가고 있습니다.’ 딱딱한 군관동무도 하하 웃으며 ‘통과하시라요.’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힘들고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천선대로, 귀면대로, 구룡폭포로 어깨에 피멍자국이 드는 줄도 모르고 오르내리며 새털구름처럼 가볍게 쏘다녔다. 모실 마음이 간절하여 하늘에 닿은 그 행보는 모든 것을 털어버린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이었다. 어디서 이런 효자를 볼 수 있으랴. 여기 이름 석자라도 남겨야 될 것 같다. 마흔 두 살 서산 사는 이군익 씨다. 갸륵한 효심에 눈물이 난다.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정말 사람으로 태어난 행복 때문에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밤바다
안 보이니까 밤바다다. 보이면 어찌 밤바다일 수 있겠느냐. 소경이 보는 바다와 같다. 또 보인다고 한들 어찌 다 볼 수 있겠는가. 일생을 두루 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 떠 보니 캄캄한 벽이었다. 수직의 벽인지, 수평의 벽인지 가늠할 수 없는 벽이었다. 아니다. 수직의 물인지 수평의 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무한량의 벽과 물의 두께와 길이에서 넓이와 깊이에서 파도가 뇌성벽력처럼 이마를 때려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밤바다와 마주한다는 것은 면벽이다. 산다는 것은 득도하는 길이다. 득도하고 깨치기 위해 나는 날마다 면벽하고 그 벽에 중처럼 처절하게 이마를 부딪는다. 이마가 골을 쏟으며 하얗게 기절한다. 파도가 된다. 그 파도조차도 밤바다는 삼켜버린다. 파도는 소리만 남긴다. 그리고 쿵쿵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공룡의 발소리로 다가온다. 그 소리는 아수라였다. 파도가 소리로 끓어오르고 온갖 짐승들이 괴로워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지옥인 듯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서로의 살을 물어뜯고 할퀴고 삼키는 소리였다. 나는 내 삶의 처절한 현장에서 파도처럼 절규한다. 아아, 밤바다처럼 캄캄하게 살아왔구나.
어머니의 물감상자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 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꽃물을, 연초록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족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나에게는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자화상
꽃들에게 강원도 감자알만큼씩한 불알 두 쪽을 흔들어주며 십 년 세월을 바람으로 살아왔다. 파도를 일으키기 위하여 좆물을 채우거나 빼듯이 했다. 익사하지 못한 빈 술병으로 바다에 내던져져 흐르며 추던 춤. 텅 빈 가슴으로 바람소리나 흉내 내다 이 몸 물이 되지 못하면 어차피 부서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몸 깨뜨릴 바위는
무량수전 바다의 어디에 있는가.
시론
산문시에 대한 생각
산문시는 나에게는 매우 애매한 시다. 아직도 나는 산문시가 시이냐 산문이냐 묻는다면 시 보다는 산문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줄글이라지만 시행의 길이를 어느 정도 해야 되는지도 문제고 또 산문시가 서구처럼 시와 산문시의 분명한 구분이 안 서기 때문이다. 우리 시는 고전시가와 현대시로 구분되어 있고 현대시라는 것도 때에 따라서 근대시, 자유시와 같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산문시 또한 현대시여서 용어의 구분이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산문시는 주요한의 ‘불놀이’로부터 셈 하더라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오늘날 많은 시인이 산문시를 쓰고는 있지만 대다수 시인들이 나처럼 그저 줄글로 시를 쓰면 산문시라고 믿는 경향이 많다고 본다. 그 까닭은 나로서는 이제껏 산문시에 대한 명쾌하고 심도 깊은 글을 읽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흔히 산문시를 구분 지을 때 운문과 산문으로 말하는 분이 있으나 명확히 그렇다고 긍정할 수가 없다. 산문도 얼마든지 운문일 수가 있다. 또 산문시를 시적담론이나 시적서술양상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도 있지만 시적담론이란 우리시의 특장인 이야기 시에 다름 아니므로 시와 산문시에 대한 분별에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나는 산문시를 좋아하는 시인이 아니다. 당치않은 착각이겠지만 시인들이 자유시를 쓰다 힘이 부치니까 산문시라는 것을 쓴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 산문시를 쓰는 시인이 제법 많다는 것도 괜스레 싫다. 왜냐하면 시의 긴장감이나 맛이 덜하고 시의 근본은 산문시가 아니니까 그렇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끔 산문시를 쓴다. 어떤 때 쓰는가 하면 소설처럼 좀 이야기를 많이 풀어놓고 싶을 때 쓰고 긴장감이 없어서 쓰고 가볍게 시를 그적이고 싶을 때 쓴다. 이렇게 아직까지 산문시를 포기 못하고 쓰고 있는 것은 생전에 좀 제대로 된 산문시 하나 만들자는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또 산문시를 쓸 때면 나는 나름대로의 습관이 있다. 이것은 시 쓰는 사람으로서의 하나의 벽인데 이상하게도 내재율을 염두에 두는 버릇이 있다.
내재율이란 50년대의 시인들 중 모더니즘 계통의 시를 써오던 시인들이 자주 거론하던 시어였다. 아마 50년대의 모더니즘 계통의 시인들이 일본의 시론서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리라. 내재율이란 쉽게 말하면 겉에 드러나는 음률 대신에 산문체의 시 속에도, 드라이한 시에도 음률이 있다는 견해였다. 심지어 현대시라고 불리는 시에는 서정시건 뭐건 모두 내재율이 있다고 하여 한때는 시단에 제법 유행처럼 번졌었다. 이런 음률이 일부 시를 연구하는 사람에 의해 점차 내재율을 인정치 않는 쪽으로 기울어져 요즈음은 별로 거론하는 시인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산문시를 쓸 때면 내재율을 떠올리게 된다. 내 딴에는 산문시가 가진 평범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즉 산문시에 시다운 맛을 가미하기 위해 내재율(있던 없던 상관없이)이 필요하다는 쪽이고 이 내재율이란 나에게는 음률의 의미를 떠나 난해성과도 연관 짓는 우스운 벽이 있다.
산문시에서 시다운 맛을 살리려면 난해성이 있어야 된다. 산문시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산문을 탈피해야 한다. 산문이면서 산문을 탈피하는 방도로 나는 난해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산문시라고 써놓고 보면 난해성이란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늘 시도는 해보지만 실패하는 쪽에 선다. 이런 산문시의 극복을 위해서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고 있다. 그 극복의 하나가 산문성에 대한 극적 효과다.
가령 고은이 내 시 ‘장모상’을 언급하며 시 전체는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까운데 종반부의 시적인 면이 그나마 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 예다. 이 시는 전체가 산문답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로서는 일상적인 산문으로 진행되다가 종반부에 극적인 묘사를 함으로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충격을 주고자 했던 데서 만든 산문시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이 산문시의 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단에서 써본 작품이다. 또 시 형식에서도 줄글로 이어져 오던 표현이 종반부에 자유시의 시행으로 변화를 주고 별행으로 자리 잡게 만든 것도 그런 의도였다. 시행이 없는 산문시와 시행을 염두에 둔 자유시의 혼융형식의 어떤 모양새를 만들어 보려한 것이다.
다음은 시사적인 내용이 산문시가 되는 경우다. 내 작품 ‘효자지게’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시가 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시인 나름대로 느낌이 오는 소재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것들에 시적 충동을 줘서 한편의 시를 만들게 되는 경우가 많다. ‘효자지게’는 어느 날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사람이 살면서도 이런 아름다운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써 본 작품이다. 산문시의 평범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적감동을 주는 내용이었으면 한다는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다음에는 산문시이되 시적 긴장감도 있고 선적인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시 형태다. ‘밤바다’ 같은 산문시다. 한 마디로 산문시의 진행과정에 난해한 맛도 좀 풍기는 형태라 하겠다. 나로서는 이런 형태의 산문시가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시란 늘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잖은가.
마지막으로 열거하는 산문시는 ‘어머니의 물감상자’다. 제목처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다. 쓸 무렵 무엇보다 나를 지배했던 것은 어머니를 묘사하면서 난해하게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가벼운 터치로 마음에 아무런 부담도 없이 만든 작품이다. 아주 서정적으로 그려보자고 한 것이 예상 외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가 되었었다. 산문시건 무슨 시든지 서정이 근간임을 새삼 일깨워준 시라 할까.
이상으로 산문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지만 나는 어느 것이 좋은지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하지만 나는 산문시란 뭐니뭐니 해도 읽는 재미가 있어야 된다고 본다. 짧은 이야기도 아니고 긴 설을 푸는 사람이 그것이 무엇이던 재미가 없으면 관심 밖이 됨은 자명한 일이다. 읽는 재미를 위해서 내 시 ‘자화상’처럼 성적인 내용의 주입도 괜찮지 않을까.
이번에 발표한 작품은 산문시라고 쓰긴 했는데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일정한 주제의식이 없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쓴 작품이라는 것을 우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제껏 내가 시 쓰며 걸어온 길에 비추어보면 그러하다. 나는 일생 시를 쓰면서 큰 실험 같은 것은 세상 떠들썩하게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시를 쓰는 한 나름대로 끊임없이 변해왔다고 본다. 그것이 비록 성공하건 실패하건 떠나서 한동안 우리시에서 맥이 끊겼던 사행시를 쓴 것도 그러하고 달착지근한 연애시류는 시단에서 쳐다보지도 않던 시절, 민중시가 무슨 유행처럼 판을 치던 무렵에 시인이라면 사랑을 주제로 한 연애시집 한 권쯤 가져야된다는 마음으로 외롭게 쓴 사행시집 ‘설연집’이 그러하다. 또 시집 ‘어머니의 물감상자’에 담긴 “불시잡변”의 시편에 있는 시들, 이 연작시들은 발표 때 시의 말미에 찬, 송, 게, 설이니 하는 것을 달았었는데 우리시의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해 본 것으로 ‘삼국유사’에서 차용해 온 것이기도 했다. 한편 기존의 여행시가 불과 몇 명의 시인들이 외국 여행 끝에 쓴 대다수 풍물시에 그쳤던 데서 탈피하여 좀 내용이 담긴 시를 써보고자 시도했던 여행시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므로 해서 노인에 대한 문제가 심각함에도 노인에 대한 관심이 없을 때 시작한 ‘노인일기’ 연작시들이 그러하다. 이런 내 시의 작업은 나름대로 늘 변하고자 했던 내 의지의 작은 결과다.
나는 시에 대해서만은 욕심이 많다. 산문시집도 한 권쯤 갖고 싶다. 산문시집뿐 아니라 1행시도 부지런히 써서 1행시집도 펴내고자 한다. 내 나이 어느덧 칠순 줄에 접어들었지만 시 쓰는 데만은 늙은 티 안 내고 아직 젊고 싶다.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호 水兄, 老平, 果山. 시집 <사행시초>(1974), <고려의 눈보라>(1977),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 <물의 혼>(1986), <설연집>(1988),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 <바보산수>(1999), <바보산수 가을 봄>(2004) 발간. 시극집 <벌거숭이 방문>(1983), 시에세이집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1994), 시론집 <육감과 혼>, <절망과 구원의 시학>(1991), <한국분단시연구>, 시연구서 <한국 상진주의 시 연구> 발간. 현대문학상(1975), 한국시인협회상(1985), 한국펜클럽 문학상 시 부문(1987),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2000) 수상.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 이전글42호(여름호)집중조명/김유석 신작시/해설-김혜영 11.12.22
- 다음글42호 (여름호) 특집 젊은 비평가들이 읽은 아프리카 문학/ 고인환 11.12.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