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2호(여름호)집중조명/김유석 신작시/해설-김혜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65회 작성일 11-12-22 23:37

본문

김유석/김유석∙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상처에 대하여>.

모호한 독백 외 5편



다섯 마리의 투계鬪鷄를 한 우리에 넣는다.

모두가 적인,

제각각 4대1이 되어 싸워야 하는 다자간의 투쟁


맞장에 길들여진 것들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선택이란 그들 몫이 아니었으므로


먹이가 던져지고

맨 먼저 배고픔을 떠올리는 녀석의 발톱이 허공을 할퀼 때쯤

학습된 싸움의 맹목적성 속에서

공중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본능들이 뛰쳐나온다.


하나의 먹이를 두고 여럿이 벌이는 사투

싸움의 진수는

피아 구별 없는 난장에 몰입하는 것,

끝까지 살아남을 한 마리를 가리기 위해

모두의 상처를 지켜보는 동안


힘 센 놈보다 잔꾀부릴 줄 아는 놈, 그 놈보다

오래 굶주려 본 적 있는 녀석이 살아남았을 때

생은 도박이 되었다는 걸 아는지, 하여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피투성이 울음 속에는,

쓰러진 네 마리의 울음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 칭기즈칸의 어록.






오리 발바닥 요리에 관한 일고一考



1.

철판 위에 오리를 올려놓고 불을 지핀다.

물론, 오리는 살아있다

오리 알에서 곧 오리를 꺼낼 수 없듯, 살아있다는 것은

이내 별난 요리가 되고 말 한 마리 살진 오리를 말하지 않는다.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때론 무수정의 알을 낳기도 해야 하는 오리는

자신이 먹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불우라 탓하지도 않는다. 오직

뒤뚱거리던 세상의 한 부분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의

초조한 낯빛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먹이와 울에 길들여진 날개처럼

서서히 달구어지는 철판의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것을 던져준다.



2.

문지방에 줄을 매고 사내는 얼음 위로 올라선다.


얼음은 틀이다, 말갛고 유연한 액체로 만들어진 집착

뜨거운 사내의 발바닥이 단단한 물속으로 빠져든다.

몸속에 기억이라는 송곳을 찔러 넣으며

조여져 있던 입자들을 천천히 풀어낸다. 거기서

걸러내야 하는 담담한 고통


어떤 형태로든 그를 살아오게 한 생각들을 뒤져야 한다.

얼음이 녹아 발끝이 들려지기 전

목을 매야만 하는 까닭을 떠올려야 한다.

그러는 동안


점점 느리게 녹는 얼음은

통증을 전율로 바꾼다.

흔하거나 딱딱하게 굳어 있어 느끼지 못하거나

삶 속에는 전율이 들어 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공중에 들려지는 사내

발버둥치는 시간 속에서

한 번 맛본 적 없는 오르가즘에 이르며

사내는 서서히 물이 되어간다.


물도 마르고 얼룩만 남는다.






평역評譯



내가 그 동산에서 추방된 것은 썩은 사과를 탐했기 때문이다.


수고로움도 배고픔도 없는

열락의 정원, 또는 황무지에서

내 갈비뼈만으론 살만큼 살아보았으므로


금기된 것

상대성을 띠고 있는 것들의 치명적 유혹에

나는 기꺼이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땄다. 아니

그것의 그림자를 따 먹었다.


뱀의 혓바닥 같은 맛이었다.

걸리듯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림자사과

실재보다 부푸는 살 속에는 씨가 없어

먹을수록 배가 고팠고


필경 내가 먹고 있는 것이

고상한 욕망의 냄새였음을 느꼈을 때

씨가 없는 것들은 너무 쉽게 썩어갔다.


갈등과 고통이 생기고, 그것들이 머문 자리

소멸이 생기고

그 다음 어떤 경계가 생긴 것


씨를 가진 사과의 맛이 궁금했을 즈음

나는 이미 망했고

꿈속에서 꿈을 깨듯

썩음으로써 멀쩡한 사과의 맛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파먹는 일,

썩은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이 하염없이 슬펐다.






갈치의 편린



줄줄이 낚시에 끌려 오르는 갈치들, 집어등에 비치는 은백의 빛깔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한데


족히 사지四指*는 됨직한 몸뚱이를 비틀어 제 몸 칠 때가 있다.


미늘에 꿰인 고통인 듯싶지만 하찮은 밑밥에 홀린 자신에 대한 채질인 것, 실은 그 순간의 빛깔이 가장 아름답다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동족을 물어뜯을 만큼 가학적인 갈치가 갈치의 꼬리를 물고 끌리는 경우도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갈치낚시의 미끼로는 그 무엇보다 갈치의 생살이 제격이라 한다.


실은, 갈치는 비늘이 없다.


* 갈치의 크기는 손가락 굵기로 따진다.






조금 열려 있는



초록벌레 두어 마리 세 들여 먹이면서 속을 다물어 가는 배추에서는 항상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꽁꽁 얼어붙은 개울 그 어디 송사리들 숨구멍 빠끔하다.


비긋이 방문을 밀어 놓고 집을 비우던 아버지


밖으로 채워진 자물쇠를 볼 때마다 나는 기어이 열고 싶다.

엿보고 싶은 은밀함을 단호하게 차단한 그 안은 이미 관심 밖

모름지기 열쇠만 따놓고 싶어진다.

지켜야 할 것들에 골몰하는 이들은 이미 잃어버린 자

큰 도둑은

불안만을 훔친다.


사랑이 뭐 대단한 위세라고

안으로 닫아걸고 들어앉은 당신 맘 참, 대책 없다.






물꽃



봄바람에 목마른 흰나비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을 빨아먹는다.


무거운 길을 끌고 간

소의 생각을 알기나 한다는 듯


소가 걸어간 쪽으로

팔랑거리다


다시 내려앉아

구정물에 비친 제 모습을 빨아먹는다.



시작메모

내 안의 부조리에 대한 역설적인 자백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초입에 나오는 대사이다. 다짜고짜 무엇을 모르겠다는 것인지, 낡은 절간 같은 나무꾼과 스님의 표정을 쫒아 세찬 빗줄기 속으로 나서면 단순한 하나의 사건을 저마다 다르게 진술하는 사람들에 엮여 가식적인 인간의 마음과 내통하게 된다. 필경, 인간이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존재들이기 마련이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세상 사람들 일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에 이르러,

실재 같은 허구, 허구 같은 실재,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가정한다. 원칙과 도덕을 씨줄날줄 엮어 짠 민돗자리 같은 삶인 줄 알겠지만 천만에, 아름답든 추하든 인간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파생되는 얼룩이거나 상대성을 띠며 공존하는 모순과 부조리일 거라고 나는 건방을 떤다. 공연한 사물이나 생물들에게 가당찮은 누명을 씌워 문초하는 일이 곧 나의 허물일 터,

가소롭게도 삶의 본질을 따지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 정체를 모른다. 실은 있지도 않다고 믿는다. 내가 중얼거리는 모순이란 고작 나만의 것이고 오래된 습속 같은 내 안의 부조리에 스스로 노출당하는 역설적인 자백에 지나지 않을 뿐, 그러다가,

때때로 자기연민에 빠져 남의 것 같은 휴머니티를 기구하기도 하는 나의 서툰 상념들은 좀 전에 다시 본 ‘구로사와’, 혹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비유되어 있음에 목덜미를 훔친다.(<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단편들을 영상으로 옮긴 것)

“정말 모르겠다.”






|해설|

불안을 훔치는 도둑

―김유석의 작품세계

김혜영|시인·문학평론가



익숙한 말, 익숙한 리듬, 익숙한 이미지에 길들여진 독자에게 김유석은 도둑처럼 낯선 감성을 들이민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불안하고 가학적인 존재 혹은 황폐한 시적 화자의 내면을 들춰내어 제시한다. 그의 시 「패왕별곡」을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영화의 여운이 감돌면서 그의 비장하고 장중한 어조가 전해져왔다. 이름을 가린 채 읽으면 누구의 시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비슷한 서정적 어법이 많은 시단에서 독특한 개성이 있는 목소리여서 신선했다. 시가 때로 거칠고 매끈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 진짜가 아닐까?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 비슷비슷한 자동차, 단정한 슈트, 지나칠 정도로 유행을 쫓는 문화에서 이단적인 목소리가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다람쥐 바퀴처럼 돌아가는 팍팍한 일상에서 은근히 탈주를 꿈꾸는 욕망인지도 모른다.

「패왕별곡」 시의 2부는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속 깊은 정이 뭉클하게 스며든 매혹적인 시이다. 시대를 가로지르는 이데올로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뭇 사내들의 심장에 폭풍 같은 바람을 불러일으키지만, 잡초처럼 떠도는 민중들은 혁명이나 개혁이란 거대란 담론보다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안을 가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무혈혁명’을 읽는다. 그것은 광대 같은 시인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어찌 혁명뿐이겠는가. 절대 권력이나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도 언제나 근원적 결핍을 느끼는 남자의 본능 때문일 것이다.


별희別姬

내가 꿈꾸지 않아도 세상은 거기 있었지만

사랑은 내게 혁명 같은 것이었다.

모사도 고요한 전야도 없이 한순간 몰아친

무혈혁명, 어지러운 세상 한가운데

한 여자가 나를 가두었다.

들여다보고 싶은 안이 생겼다.

가파른 내 몸속에 배밭을 일군 그녀는

늘 배꽃처럼 아팠으나

난세亂世에 난세亂歲

내가 얻은 것 중 나의 것은 오직 그뿐

내가 없어도 세상은 거기 있을 것이지만

한 번 뿐인 사랑은 옥쇄玉碎와 같은 것

눈 먼 자여, 읽어라

등 뒤에 강물을 둔 그곳에서

나의 혁명은 백지유서처럼 끝났다.

―「패왕별곡」 부분


혁명이란 거대 담론의 배후에 깔린 정치적 욕망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느 시대이건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공산주의가 서구에서 몰락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의 내부에서 맑시즘의 순수한 정신이 더 그립지 않은가? 최상위 계층에게만 쏠리는 부의 위력 앞에 나약하게 흔들리는 중산층의 번민은 깊어만 간다. 경제적이건 정치적이건 간에 욕망의 표출 이면에는 개인의 권력에 대한 의지도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김유석은 낭만적인 시인답게 “사랑은 내게 혁명 같은 것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이토록 열렬한 연애편지를 그가 다시 쓸 수 있을까? 피 한 톨 흘리지 않는 무혈혁명이지만, 영혼과 몸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사랑의 열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들여다보고 싶은 안이 생겼다.”라는 시어는 자신의 내면의 열정인 동시에 여성의 몸에 대한 관음적 시선도 읽혀진다. 남성이 갖는 시각 욕동에 대한 강한 충동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사랑 또한 백지유서처럼 허무한 끝에 이른다는 시적화자의 고백이 커다란 울림을 준다. 거대 서사에 몰두한 혁명보다도 어쩌면 개인의 사소한 사랑이 삶을 더 크게 출렁거려 변화시키지만, 그것 역시 백지 유서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성적 욕망과 죽음의 욕망이 둘이 아닐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김유석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선택할 때, 사물의 배후에 깔린 어둠과 냉소적 기운을 전달하는 마력을 지닌다. 저음의 무게감을 지닌 남성적 어조를 묵직하게 전해준다. 「물꽃」에서는 흰 나비와 소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교차시켜 나비의 가벼움과 소의 무거움을 대비시킨다. 나비처럼 가벼운 리듬과 수레를 끄는 지친 소의 무거움이 동시에 공존한다. 봄바람에 목마른 흰나비가 마시는 물은 소 발자국에 고인 더러운 물이다. 번뇌가 질척거리는 진창 같은 물을 삼켜야하는 삶의 이중적 모습이다. 날개를 달고 봄빛 하늘을 찬란하게 자유롭게 날고픈 의지와 두 발을 땅에 붙이고 견뎌야 하는 무거운 의무의 세계에서 어쩔 줄 모르는 시적화자의 내면이 담겨있다.


봄바람에 목마른 흰나비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을 빨아먹는다.

무거운 길을 끌고 간

소의 생각을 알기나 한다는 듯

소가 걸어간 쪽으로

팔랑거리다

다시 내려앉아

구정물에 비친 제 모습을 빨아먹는다.

―「물꽃」 전문


현대 사회에서 시인은 어쩌면 가장 자학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본과 물질의 가치가 중심에 놓인 시대에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면서 현실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비틀거린다. 마치 낚싯줄에 끌려오는 하얀 은빛의 갈치처럼. 시인은 영혼을 훔치는 도둑을 꿈꾼다. 자신이 창조한 언어의 집이 그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생존하기를 꿈꾸는 은근한 욕망이 팽배한 이상한 도둑들이다. 그 낯선 세계를 향한 마약처럼 집요한 글쓰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살을 물어뜯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동족의 살조차 잔혹하게 물어뜯는 괴물일 수 있음을 포착한 냉철한 시각이 「갈치의 편린」에서 돋보인다.


줄줄이 낚시에 끌려 오르는 갈치들, 집어등에 비치는 은백의 빛깔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한데

족히 사지四指는 됨직한 몸뚱이를 비틀어 제 몸 칠 때가 있다.

미늘에 꿰인 고통인 듯싶지만 하찮은 밑밥에 홀린 자신에 대한 채질인 것, 실은 그 순간의 빛깔이 가장 아름답다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동족을 물어뜯을 만큼 가학적인 갈치가 갈치의 꼬리를 물고 끌리는 경우도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갈치낚시의 미끼로는 그 무엇보다 갈치의 생살이 제격이라 한다.

실은, 갈치는 비늘이 없다.

―「갈치의 편린」 전문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자유에의 의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진입하는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은 욕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불안하다. 혁명처럼 뜨거운 여인과 시대를 관통한 이념조차도 시의 그물에 사로잡힌 미끼이다. 자본과 물질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시인은 자학적일 정도로 자신의 운명을 저 바깥의 세계로 밀어낸다. 순수한 서정의 세계에 몰두한 시인조차도 사디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고통 자체를 즐기면서 성적 쾌락을 향유하는 매조키스트처럼 글쓰기의 욕망에 사로잡힌 시인의 이상한 욕망 구조이다. 시 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난무하지만, 삶의 뜰 안에서는 황폐하고 척박한 경우가 많다. 반면 거친 내면을 토로한 시인은 시와 반대로 삶이 오히려 따스하고 배려가 넘치는 경우도 있다. 이상한 모순이다. 독자는 척박하게 내동댕이쳐진 시인의 삶에 열광한다. 시인의 패배가 그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이 되는 잔인한 관음충동이 아닐까? 시가 아름다워 만나본 시인이 오히려 더 차갑고 냉랭해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가끔 있다. “갈치낚시의 미끼로는 그 무엇보다 갈치의 생살이 제격이라 한다.”라는 구절에서, 자학적인 욕망과 매조키즘적 욕동을 스스로 관찰하고 통제하면서, 고통과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면모를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사디스트적인 욕망이 팽배한 현대 사회의 단면을 투계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중의 욕망구조를 「모호한 독백」이란 시에서 압축하고 있다. 다섯 마리의 투계를 관찰하면서, 삶의 곳곳에 잠재된 경쟁과 권력의 구조에서 희생당한 자와 살아남은 자의 울음을 신랄하게 전해준다. 온 지구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극한 상황은 투계들의 싸움판이다. 작은 조직의 갈등이 사무실 밖을 나가면 더 큰 조직의 갈등과 닿아 있고, 더 나아가 국가적 이해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 자본과 권력이 교묘히 얽혀 있어 그 어디에서도 그것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속세를 떠난 수도자조차 자본의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이다. 사디스트가 욕망의 대상을 공격하고 학대하는 데서 쾌락을 얻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 타자를 물어뜯어 굴복시켜야만 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다섯 마리의 투계鬪鷄를 한 우리에 넣는다.

모두가 적인,

제각각 4대1이 되어 싸워야 하는 다자간의 투쟁

맞장에 길들여진 것들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선택이란 그들 몫이 아니었으므로

먹이가 던져지고

맨 먼저 배고픔을 떠올리는 녀석의 발톱이 허공을 할퀼 때쯤

학습된 싸움의 맹목적성 속에서

공중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본능들이 뛰쳐나온다.

하나의 먹이를 두고 여럿이 벌이는 사투

싸움의 진수는

피아 구별 없는 난장에 몰입하는 것,

끝까지 살아남을 한 마리를 가리기 위해

모두의 상처를 지켜보는 동안

힘 센 놈보다 잔꾀부릴 줄 아는 놈, 그 놈보다

오래 굶주려 본 적 있는 녀석이 살아남았을 때

생은 도박이 되었다는 걸 아는지, 하여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는

피투성이 울음 속에는,

쓰러진 네 마리의 울음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모호한 독백」 전문


김유석의 시가 빚어내는 독특한 빛깔은 낚시꾼과 사냥꾼을 닮은 기질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말랑말랑하거나 유순하지 않은 거친 남성의 시선과 체취가 시에 묻어난다. 구멍에 대한 매혹, 그것은 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존재의 틈에 대한 포착이다. 상징적 언어 질서에 포섭될 수 없는 실재의 세계를 잠시 환기시킨다. 우아한 상상의 세계에서 포용할 수도 없는 그 너머의 세계, 경계선에서 화자를 매혹시키고 달아나는 틈과 얼룩을 「조금 열려 있는」 시에서 날렵하게 잡아챈다.


비긋이 방문을 밀어 놓고 집을 비우던 아버지

밖으로 채워진 자물쇠를 볼 때마다 나는 기어이 열고 싶다.

엿보고 싶은 은밀함을 단호하게 차단한 그 안은 이미 관심 밖

모름지기 열쇠만 따놓고 싶어진다.

지켜야 할 것들에 골몰하는 이들은 이미 잃어버린 자

큰 도둑은

불안만을 훔친다.

사랑이 뭐 대단한 위세라고

안으로 닫아걸고 들어앉은 당신 맘 참, 대책 없다.

―「조금 열려 있는」 부분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이면에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여백은 틈의 세계이다. 조금 열려 있는 그 틈새로 혁명 같은 연인이 쳐들어오기도 하고, 집을 비우는 방랑자 같은 아버지도 찾아들고, 불안을 훔치는 도둑도 담장을 넘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 소리와 의미 사이의 미끄러지는 흔적을 낚아채는 낚시꾼의 손맛에서 전율을 느끼듯 시를 낡아 챈다. 낚싯줄에 낚여 올라오는 갈치가 하얀 빛의 맨살을 드러내듯 언어의 맨몸을 포착하고픈 그의 욕망은 강렬하다. 혁명처럼 붉은 울음이기도 하고, 흰 나비의 허무한 몸짓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오랜 굶주림 속에서 살아남고픈 배고픈 울음처럼, 불안을 훔치는 도둑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몰래 훔치려한다. 하얀 종이 위에서, 야릇하고 매혹적인 틈새에서, 치명적인 시로 독자의 불안을 훔치려는 욕망이 집요하다. 그 욕망을 훔쳐보는 나의 심장에 폭풍이 잠시 일렁인다. 곧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들이닥칠 것이다.


김혜영∙199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애지문학상 수상. ≪시와사상≫ 편집위원. 부산대 강사.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