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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특집 리토피아 시인들/이선임/허청미/유정임/장성혜/남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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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8회 작성일 11-12-22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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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임

유안청 폭포에 서면 외 1편



아들아!

이불 널다가 선녀옷 못 봤나?

없던데요.

구석에 차곡차곡 잘 개어 놓았다던데……

없던데요.

목욕하러 이 세상 한 번 들렀다

날개옷 때문에 네 에미 되고 말았지.


광목 한 필을 송두리째

빛바래며 내리 닿는 유안청폭포

너의 앞에 서면

나는 또 꼼짝없이 선녀가 된다.






이순耳順을 향하며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을

하늘 아래 하나뿐인 양 의기양양 살다가

억울한 이는 나 하나뿐인 양 고함질러대다가

여기저기서 던지는 칭찬에 질책에 넋을 놓다가

비로소 있는 듯 없는 듯 바위 위 석이石耳버섯 마냥 말라붙어

속도를 줄일 대로 줄여 움직이지 않는 배경으로 앉은 오늘


먹었다 하면 중풍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다는 석이 못지않게

찾아만 준다면 풀어놓을 지혜 가마니 지고 앉아

이 세상 영화부귀 손바닥 뒤집듯 보여줄 작심……

행여나 찾는 이 오나 삽짝으로 돌린 눈길 위에

쉬었다 떠나는 것은 바람난 숫놈 개 한 마리 뿐.


제 길 따라 오가던 기억마저 길을 놓쳤나?

째깍거리는 시계소리 유난히 날이 서 있고.






허청미

검은 3월 외 1편



거실 소파에서 무릎덮개를 끌어올리며

유리창 너머 겨울의 지문들을 본다


겨우내 자코메티의 부조 같던 목련가지에

수은 같은 회백색 햇살이 감긴다

노파의 구부정한 팔자걸음을 앞질러

봉인된 괴질 같은 검은 비닐봉지 굴러

이쪽과 저쪽, 이분법의 도식 같은 경계선에서 멈춘다

녹슨 철책 뾰족한 창살에 걸려 검은 깃발이 된다

퇴로가 막힌 담장 밑 군데군데

잔설 검게 웅크려 있다


스카이라이프접시에 담기는 정오 뉴스의 성찬

잡채처럼 엉킨 난기류의 메뉴가 빼곡하다

이십일 세기 투탕카멘 가면이 벗겨졌다

서쪽 검은 사막은 유혈의 雨期, 총알비 내린다

동쪽 섬나라마저 흠씬 물 먹었다

소, 돼지, 닭, 오리…… 들이 빨려드는

모국은 블랙홀,

모국어사전 속 낱말들이 빨간불을 켜고 있다

胃벽에 암각화 되는 어족과 텃밭과 초원의 種들

천년 후, 태양은 얼음덩어리이다 (○)

동그라미 치는 미래의 그대의 찬 손을 유추할 때

까치 두 마리 삭정이 물고 창문에 빗금 긋고 날아간다

내 무릎이 기억한다, 새벽 너의 상서로운 울음을


사방 바벨탑 검은 그림자가 3월을 먹고 있다







달팽이 세계지도



달팽이 선생,

차를 타고 1시간쯤 달리면 그때부터

왜 하품이 나고 머리가 아플까요

급기야 구토까지 하고 나면,

나는 아주 우울합니다


달팽이 선생,

나는 코페르니쿠스를 꼭 만나야 해요

내가 코페르니쿠스와 악수 한 번 해보자는 것은

인류가 의심치 않는 地球球形說 때문인데

당신은 내 귓속에서 나의 중심을 수호해 주지 않으니


물레방아나 돌리는 작은 물줄기에 대해서

쳇바퀴나 굴리는 다람쥐 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중해쯤에서 툰드라쯤에서 고비사막쯤에서

수평선 혹은 지평선이 활처럼 휘는 것을 봤다면

경이로운 사실을 믿었을 텐데요


달팽이 선생,

오늘 열무 단을 풀어 다듬다가 알았는데요

벌레 먹은 무 잎에 점액질 얼룩이 당신의 지도라는 걸

이슬방울 둥근 것을 제일 먼저 목격했으리라는 걸


아침마다 동쪽 달마산을 오르는 해가

저녁때면 서녘 샛강으로 스미는 궁륭의 궤적이

얼룩 속에 숨은 당신의 세계지도라는 걸

쉽사리 누구의 說에 귀기우리지 않는

내 귓속에서 고질적으로 추를 흔들어대는

달팽이 선생,

열무 단 속에 오대양 육대주를 봤다 할까 봐요

이대로 앉아서 지구는 둥글다 동의할까 봐요






유정임

고해告解 외 1편



오늘도 살았어요

또박또박 시간을 메웠지요


삼국지에 눈을 박았지만

글자는 자꾸 틀렸어요


베란다에 핀 붉은 아잘리아도 보았지요

허공이 온통 피투성이었어요


귀가 서러운 시인*도 만났지요

시에 대한 사랑을 믿을 수 없어 발밑이 자꾸 흔들렸어요


바나나도 먹고 땅콩도 먹었지요

그런데 뱃속은 어디론가 길을 떠나고 없었어요


컴에 들어가서 게임도 했지요

우린 공중에서 만나 줄타기를 잘해요

뿌리를 내리지 않아야만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거거든요


지진이 일어나 폐허가 된 일본도 보았지요

생명이, 살아있다는 게 고마운 일인데

가슴이 없어 품을 수가 없었어요


아, 그녀에게서 전화도 왔었지요

왜 걸었냐고 하니까 그냥 걸었대요

그녀도 공중에 떠 있었나봐요


저녁 밥상에서 그가 말했지요

그의 뿌리가 봄을 타는지 힘들어 한다구요

뿌리가 없어 허공에서 그냥 웃었어요


오늘도 내일처럼 살았어요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꼼짝 못하고 집안에 한 그루 나무 되었다

나무가 되어 창밖에 나무들을 보니

봄 여름 가을 애쓰다 여기저기 부러진

그들의 뼈가 보였다


남편이 날라다 주는 어설픈 햇살에서

진액을 빨아올리느라 입안이 여기저기 툭툭 부르텄다

부러진 뼈에 힘을 덜 받게 하느라

체지방 떨어내고 말을 아낀다

생각이 깊으면 마음도 무거워져

빨아올리는 수액의 길이 막힐까봐

날마다 속 비우는 몸짓, 소리 낸다


속 비워내지 못한 나무 몸에서는

아직 부스스 마른 비듬 돋는데

삼월 볕에 비춰본 X레이는

부러진 뼈에 假骨이 움트고 있다






장성혜

외 1편



향일암 백팔계단 아래

하얀 모자를 쓴 노파가 앉아 있다

가파른 계단이 뱉어버린 시간이

거북 등 같은 바위에 착 달라붙어 있다

손때 반질반질한 지팡이를 무릎 위에 눕혀놓고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돌아 오르는 길 있다 해도 손사래 치며

누군가 붙여놓은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다

땅끝까지 왔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

절벽 담아온 풍경 속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주저앉아 있다

만발한 동백 숲 등지고

단물 쪽 빠진 얼굴이

하염없이 눈앞 바다를 우물거리고 있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는

내 백팔번뇌 아래 착 달라붙어 있다






유월



어떻게 하면 고객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

저희 농원에서 해마다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선별기 구멍 크기로 왕특이 결정되기 때문에

굴러가다 빠져야 할 곳에서 빠지지 않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경우, 왕특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섞여 나가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커지는 고객님의 만족도를 채우기 위해

올봄 선별기 굴림통을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구멍 수를 늘리고 크기도 커졌습니다

작년 왕특이 상으로, 중이 토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왕특이 되려면 색도 고른 연초록이어야 합니다

흠집이 잇거나 살굿빛이 도는 놈들을 골라냅니다

첫 수확 날짜는 미루고, 마지막 날짜는 최대한 앞당겨

시간과의 전쟁으로 얻은 결실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매실만이 왕특이 됩니다

진정한 왕특이 되는 마지막 과정은 고객님의 입맛입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주실 왕특을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왕특을 맛보려면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남태식

먹튀거나 깡통이거나 외 1편

―뒷배



모래 자갈 풀 나무 물고기 새

물빛 하늘빛 별빛 달빛,


당신이 이 강에 빚으신 형상들이

죽을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강의 뒷배이신

하느님,


아시지요?


이 강에서는 이제 당신마저도

깡통입니다.






어떤 셈법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요,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다.”

그 동네에서는,

하나가 아니고 적어도 셋쯤에서 시작하는 그 동네에서는,

(번번이)

셋에 셋을 더하면 여섯에 셋이 남고,

넷에 넷을 더하면 여덟에 넷이 남아,


그 동네의 어떤 시절과,

노동으로 흘리는 땀이 없는 그 동네의 또 어떤 시절에는,

(당연히)

다섯에 다섯을 더하면 열에 다섯의 어깨가 남고,

여섯에 여섯을 더하면 열둘에 여섯의 주먹이 남아,


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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