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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특집 리토피아 시인들/박정규/김승기/김효선/김지연/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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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75회 작성일 11-12-2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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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제7병동 외 1편



좀 싸게싸게 보시시오. 소변통을 받쳐 든

머리숱이 미조항 거물에 올라온 은멸치 떼 같은

폐암 말기 김 노인의 간병인은 관절걸음 할머니.

응봉산 머리에서 타던 노을이 온몸으로 전이한

노래진 눈동자 실핏줄의 난동이 허물거리는 침상

평생을 뱃놀이한 주름살 과녁은 출렁이는 南島라오.

 

새끼들과 새끼들이 꿈을 찾아 꿈을 키우는

창밖에 상경한 도시의 얼굴은 낮밤이 없구나.

새참도 낮잠도 단꿈도 안개주의보에 휩싸여

부대끼는 세상살이 궁한 피복에 낡은 밥이라도

되새김질처럼 이어온 세간살이 정든 곳.

폐암을 안고라도 통통배 소리 따라 어와 넘차 가고파.

 

명치 끝 그리움은 휠체어에라도 실려

찰랑찰랑 하루들이 하얗게 덩실거리는 섬마을.

바지락 캐는 아낙, 쪽빛 바다, 강아지풀 뜯는 염소,

파닥이는 어물 5일장, 파란 마늘밭, 다랭이 타작소리,

진달래 개나리 쑥 냄새, 장독들 아궁이 가마솥,

징검다리 호흡이 안경 너머 떠가는 돛단배 항로를

건너가는 중이네.






사식이의 완장腕章론



1. 흐르는 피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이른 새벽 북한군 소대가 마을로 들어왔다. 동네 머슴을 하던 사식이가 오른쪽 팔에 그 색깔 완장을 차고 자랑스럽게 씩씩거리며 북한군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죽창을 휘두르며 주인어른들을 금굴 계곡으로 끌고 간 뒤 어른들은 영영 볼 수가 없었다. 1984년 5월 마흔일곱 아버지가 임종하면서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를 잃었다고.

 

2. 눈 덮인 산

1973년 3월 나약한 중학교 1학년 햇병아리, 교문 입구에서 뒷뜰 화장실까지 규율부 선배들이 그 색깔 완장을 두르고 사식이처럼 머리카락을, 교복을, 모자를, 가방을, 자르고 매질과 발길질을 수 없이 해댔다. 학교 가기가 겁나고 사식이가 싫었지만 선생님에게, 아버지에게, 삼촌에게, 형에게, 누나에게, 누구에게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못했다. 비굴하게 사식이에게 반항은 꿈도 꾸지 못하고.

 

3. 가면 속 빨주노초파남보

2000년 이후 더욱 성장개인주의가 영혼을 추월하여 사식이가 되었다. 유학생 아들이 부모를 난도질하고, 부모가 자식을 성추행하고, 국회가, 정부가, 민생을 외면하고, 낙동강 전투에서 오직 자신들의 승리만을 자축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시기와 질투가, 원한과, 화풀이가, 財權名이, 사식이를 넘었다. 그 색깔 완장은 언제 어디서나 가면 속에서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고.

 

4. 덧없이 흐르는 강

2010년 12월 큰아버지께서 졸지에 돌아가신 장례식장, 영원한 미소를 머금은 영정 앞에서 두 어머니의 5남 3녀 자식들이 그 색깔 완장을 두르고 울그락 불그락 상속문제를 난타하고 있다. 당골 큰 대지기는, 산골 밭은, 집은, 바늘 같은 유산에 두루마기 같은 사식이들. 덧없이 흐르는 영정 앞에서 허망한 인생들이 대판 싸움질이라.






김승기

노을 외 1편



붉기로는, 그 때 그 한숨 같이


새빨갛기로는, 그 때 그 탄식 같이


언뜻 지나가는 새 한 마리, 하릴 없이 던진 그 때 그 돌멩이 같이


옛날을 새삼 타오르다가


옛날을 새삼 앓다가






사자곡思子曲



집 앞 늙은 목련

젖은 손 내밀어

차마,

이렇게는 못 간다고

한참을 머뭇대던 꽃상여

올해도 그 때

가지마다 탐스런 목련

도지는 붉은 신음소리

다시 여윈 등 한참 떨다가

한바탕 그 자식 자랑

다 이제는 헛일이라며

힘 없이 일어서는

생 떼 같은 사월四月

형벌인 듯 울음인 듯, 사내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김효선

굿바이, 4월 외 1편



거리엔

한바탕 홍역을 치른 듯

바람에 찢긴 날개들

이봐요, 이봐요,

그렇게 바닥은 꽃을 불러 모은다.

스스로 뛰어내리는 구름을 본 적 있니?

바람만 불어 봐요,

스스럼없이 드러눕는 붉은 입술

전생에 뱀이었을지도 모를

구름이 스르르

꽃으로 뛰어내리는 젠장,


새벽녘에 앓아누운

제비꽃,

비둘기들이 느린 한 발로

구애를 한다.

꾸르륵 꾸르륵

안개가 저물고 날개는 저릿저릿

더 이상 펴지지 않는 걸요.

구석으로 내몰린 시간들 가려운,

눈물


바닥만 보고 산다,

기어서라도 살아남아야 할 이유

웅덩이에 패인 빗물처럼 철퍼덕,

눈도 귀도 닫아걸고

날아오르기 위해선 바닥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긴 꼬리의 행렬

겨우 호흡만 가진 발톱을 세우고 지상을 밟고 간 흔적

그건 너무 뻔하잖아.


굿바이, 날개

바닥만 아니라면.






제제제…… 발,



깐깐한 바람이 분다

두통이다

절름절름 거리다가 그럴 줄 알았어

밤새 창문을 쥐고 흔든

피곤한 발바닥의 냄새는 왜 맡는 거니

어디야?

숲 반대편에서 바라다 보이는

엉겅퀴 속,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이지

응, 말이라서 히이잉하고 운다

거짓말은 꽤 논리적인 단추를 갖고 있다고 봐

불편해도 우린 수다스런 꽃으로, 그래 꽃으로

궁뎅이를 실룩거리며

제제제…… 발,

서점 앞에 그렇게 고상한 척 서 있지 마

지나가던 두통이 다시,

침을 묻혀가며 책장 넘기는 소리에

내 눈이 밟힐 뻔 했잖아






김지연

나는 잘 살고 있는 거지요? 외 1편



춘분 지나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읽은 메일 한 통이

흩날리는 눈에 창을 더 흐리게 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거지요?”

저 흐린 창문 넘어 하늘은 하나일 텐데

구부정한 기호들에 익숙지 못한

그 먼 나라에서

자신을 버리며 지내는 것이 그토록

힘이든가 보다

붉은 포도주를 앞에 놓고

덜컥, 불러낸 섬세하지 못했던 시간들

울컥, 눈물을 멈추지 않고 사는 것이

불쑥, 형체를 잃어가며 살던

자신을 다시 깨우는 것이란 걸

조용히 두 손과 무릎을 모우며

소리 내지 않는 울음을 울던 기도가

이 봄에 내리는 눈발마냥 길다

발그레한 내 낯빛에 쓰여 진

붉은 문장 하나

‘나는 잘 살고 있는 거지요?’






겨울나기



들숨이 깊어지는 날이면

양손을 호주머니에 깊게 넣고

집 근처 호수공원을 걷는다

아직은 겨울인지라 물위를 뛰어 오르는

물고기를 자주는 볼 수 없지만

간혹 수평선을 넘듯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보고 있노라면

물무늬처럼 감정이 흩어지는 걸 느끼곤 한다

네가 나와 함께 걸을 수 없고

내가 너와 물 속 입맞춤을 할 수 없지만

늑대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포르르포르르 잎 진 가지를 흔들던

서로의 명상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한다는 건 서로의 흔들거림을

지켜보는 그런 것 아닐까?






정서영

눈의 기록들 외 1편



환한 햇빛, 파란 바람, 하늘, 옥상에서 내려온 케이블 선,

창문을 기웃거리는 호박넝쿨, 알프스 모텔 뒤,

소나무 꼭대기를 기어오르는 칡넝쿨, 동경수산 수족관 안,

헤엄치는 고등어, 우일꽃집, 푸른 전등, 허공,

 

네가 태어나는 것, 당신이 죽어가는 것, 

초록의 콩밭, 언덕 길, 누군가의 무덤,

놋수저, 오래된 병풍, 무쇠화로, 흙 묻은 고무신,

옥양목 앞치마, 참빗, 긴 머리카락, 깨진 거울,

얼음 먹는 여인, 종이항아리를 빚는 여인,

앵두나무, 눈깔사탕, 크라운산도, 건빵,

 

내가 본 것, 아니 보지 못한 것, 아니 본 것,

…… 보지 못한 것.






시간에 대하여



방금,

FAX. 506-0551라고 쓰여진 창문을

스치고 사라지는 “눈송이”

 

어디선가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싱싱한 영광굴비가 왔습니다!”

 

청해수산 수족관 바닥에 

아가미를 들썩이고 있는 “광어”

 

책상 위에 막 피어나는 춘란 “꽃”

 

오랫동안 투병중인 그녀에 대한

“생각”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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