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2호(여름호)특집 리토피아 시인들/최명진/오정자/구회남/고우란/박섭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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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진
후두둑 외 1편
장구벌레가, 소금쟁이 발바닥이
위아래 서로 거슬림 여린 뿌리보다 투명함
마른 고목이, 단단한 벌레가
쥐죽은 듯 조용함 계속 붙어있음
눅눅한 검은 흙이, 자글자글한 것들이
한데 뒤엉켜있음 어디쯤 또 썩어가는 허물
가끔 번개가 내리침
나무 끝에 매달린 허연 몽달귀신과 밤잠 없는 부엉이
열 그루, 백 그루, 휘날리는 이파리들
날벌레처럼 따갑게 수선스러움 금방 시들해짐
어떤 짐승이 오간 적 있음
망가진 거미줄이, 축 늘어진 이슬방울이
차갑게 식어있음
작은 새가, 작은 새가 내려앉고 올라가고
모래 한 알이 떼구루루 옆으로 굴러감
매달린 꽃잎이, 더듬대는 촉수가
바람 속에서 우왕좌왕 흔들림
안간힘보다는 얇음
어떤 열매는 색깔이 과히 붉고
캄캄한 열매는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짐
멍청해질 대로 멍청해져서
후두둑 날아가자 그냥 툭, 떨어짐
삼겹살
동창들이 만나 한다는 얘기가 다 그렇지
한 놈은 들으면 들을수록 참 우습고
한 놈은 듣지 않아도 뻔히 우습고
한 놈은 괜스레 심각해서 우습고
그걸 지켜보는 백수 놈은 그들이 그냥 우습다
오래 같이 삼겹살을 먹었다
집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삼겹살을 먹는다
이건 좀 슬프지만 고기가 먹고 싶었다
까맣게 몇 주가 흘렀을까
친구들은 한 동안 연락이 없다
이천십일 년의 봄
나는 남산도서관 야외벤치에서 커피를 홀짝인다
개나리 진달래라는 아름다운 이름 밑에 앉아
두툼하게 접힌 내 뱃살을 바라본다
돼지는 왜 세 겹의 배를 갖게 됐을까
지구상엔 수많은 돼지들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돼지들은 잔인한 인간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지짐과 볶음을 당해 왔나
푸른 들판을 뛰놀아야 할 돼지들인데
가축이라는 일관성에 방심하고 있는 불쌍한 돼지들
지금도 세상 수많은 돼지들은 자기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혼자 먹긴 과하고 둘이 먹긴 꿀꿀한 일에 골몰하고 있을게다
친구들도 그런 돼지의 유머를 잘 안다
거대한 머리에 비해 앙증맞은 쥐꼬리를 달고 있는 돼지
메뉴판 옆에서 자신의 고급 부위를 소개하며 활짝 웃고 있는 돼지
밤새 우스운 얘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유쾌한 돼지
돼지의 기적은 이렇다
어느 날 불판 위에, 웃는 머리맡에,
그 분이 바다를 가르듯 강림하실지 모를 일
돼지여 이제 일어나 혁명하라
너희의 족발은 승리의 V자이니…….
돼지들도 희망은 있다
기적의 삼겹살이 언제 어디서 오픈하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오정자
家畜 외 1편
보리죽도 못 먹는 부모형제 배고픔이나 덜겠다고
월남전 피 팔러 갔다가 죽은 손주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애비 쥐약 먹고
죽었을 때에도 이렇게 눈물이 나왔을까?
이눔아! 이눔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렇게 멍에를 벗고 싶었냐?
며칠 동안 뼈 빠지게 일하면서
헉헉 대더니 그리도 배가 고팠더냐
주는 콩이나 먹을 일이지
아예 배 터져 죽으려고 콩바가지를
뒤집어썼다는 말이냐 그의 넋두리
무거운 쟁기 보습
반생을 동고동락하며 식구들의 생계를
이어주고 줄줄이 자식놈들 학비 대어주던
업이었던 너!
때로는, 자식들 등록금 걱정에 돼지 한 마리에도
목숨 걸던 부모들 있었다
殺처분 殺처분, 땅이 핏물을 물고 운다
江
녹스는 시간 4대강 비명소리에
구멍 뚫리는 옆구리가 시리다
제몸 부딪쳐 울음 터트릴 곳 잃어버린 강
흐르는 길 잃고 갈 곳 없어 발을 멈췄다
때마다 철새들 불러들이던 갈대숲
넘실대던 강물 물고기와
삶을 섞던 사람들 육중한 준설기 소리에
하나, 둘, 어디로 가야 하나
구회남
M 9.0 외 1편
용은 입을 벌리고 닥치는 대로 삼킵니다
아!, 마비된 마음은 할 말 없음
2011년 14시 46분 스스로의 분노
양치기 소년은 충분하게 다녀갔고 전진이 있었지만
후진하면서도 때리는 영포의 용의 꼬리
작고 날카로운 상형문자를 당할 수 없어 길은 사라지고
열 개의 판이 부딪쳐 만든 형이상학적인 괴물
바슐라르의 사원소가 섞여 만든 카오스의 계절에
공포와 전율의 날은 흉포해져 보석가루들은 흩어진다
시뻘건 것은 흐르다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며 끓고
새의 날개는 꺾이고 팔다리는 무너지고
성큼성큼 뚜벅뚜벅 넘어오는 검은 파도가 밀고 가는 가벼운 장난감들
영화인 듯 지켜보는 플라스틱 거울은 뜨거워 녹습니다
산다는 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신과 시 앞에 무릎을 꿇은 무기력
‘꽃핀 섬’은 패닉에 프로작을 꿀꺽 삼키고 처절하게 차분한데
바람에 날아오르는 세슘은 어쩝니까?
허공에서 노래하는 까마귀여!
용서
사이렌 소리가 들이닥칠 때마다
꽃의 안부가 궁금해진 귀들의 허파가 쪼그라들 때
세상으로 향한 눈꺼풀을 닫습니다
꽃이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러 문장실로 들어간 후
수술실 옆 화장실에 들어선 내게 알아서 터진 소낙비
하늘 문 활짝 열고 단비는 내리고
뭉쳐 있던 피눈물이 산을 넘을 때
들이닥친 주먹은 나의 고막을 찢지만
용서한다!
단 문장으로 足합니다
당신이 대신 해준 일
꽃의 발을 까 준 질투에 대하여 고맙습니다
변기 속으로 달아난 안개
꽃의 선물인 카타르시스 때문에 코스모스 세상입니다
코가 잘생긴 태양의 바스러진 평형사다리 뼈를 이어 놓고
주먹으로 문질러 멍을 씻고 나오니
창밖은 노랑과 파랑 사이
고우란
얼굴이 없다 외 1편
나는 그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이 들여다보였다 의아한 나는 다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었다 그러자 코에다 돋보기안경을 걸친 늙은 남자가 보였다 그의 할아버지일 것 같았다 다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자 상투를 틀고 흰 수염을 너풀거리는 이가 있었다 그의 증조이거나 그 윗대의 누구일까 나는 또 그의 얼굴 가죽을 벗겨 나갔다 양파 껍질인 듯 잘도 벗겨지는 그의 얼굴 가죽을 계속해서 벗겨도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울고 싶어진 나는 그의 얼굴이 나올 때까지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길 생각으로 내내 그 일만 하고 있었다 질긴 가죽을 벗길 때마다 다른 얼굴로 태어나는 그를 보다보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거기에 보였다
초록뱀을 삼켜라·6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차귀도에 갔다가 초록뱀을 만났습니다 몸을 파는 여자가 살았다는 섬의 뒤쪽 바닷가 집은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몸이 길인 뱀과 몸 밖으로 길을 내는 내가 만났습니다
이 길이 너의 길이냐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았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갯방풍과 쑥부쟁이와 들국화는 모두가 뱀의 편이었습니다
나는 가만 길 위에 몸을 뉘어보았습니다 몸을 파는 여자가 내 몸에 들어온 듯 내 몸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도둑 같은 바람이 샅을 스쳤습니다 가죽을 벗을 수 없는 나는, 뼈대만 남은 황량한 몸으로 허물어져갔습니다
내 몸이 겨우 어두워졌습니다 다행입니다
박섭례
목포 북항 외 1편
분양은 안 되고 임대만 되는 바다이다
그 바다엔 숭어 돔 광어 농어 낙지 소라 멍게 해삼
이름도 욀 수 없는 바다것들이 좁은 바다를 유영하며
미식가를 위해 대기 중이다
미식가의 자본은 자본의 꽃이며 총구이며 칼이다
무게를 다는 저울 앞에서 바다는 격하게 출렁인다
바쁘게 재단을 준비하는 손길 위로 재물이 된 비린 생
잎새주에 입술들이 축포처럼 외치는 원샷과 함께
빛살무늬 살점들이 바다처럼 누워 미식가의 입속에서
거센 파도처럼 출렁인다 장꼭토의 시도 출렁인다
불콰한 입술들이 잎새를 주문하는 소리에
북항은 갈지자로 휘청인다 달빛도 휘청인다
자연산횟집이란 간판도 휘청인다
자본의 꽃이 양귀비꽃보다 붉은 저녁이면
북항은 온통 비린내의 서식지가 되어
비린 자본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빈집
마당에 서있는 복숭아꽃은 봄이 되면
국기를 계양하듯 조등을 걸었다가
봄이 지나면 조등을 내린다
발라먹은 생선처럼 뼈만 앙상한 문짝과
환관의 무덤처럼 등이 굽은 집
마구 버려진 질그릇과 짐승의 배설물이 썩어가는 집
어쩌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처럼
복숭아를 따먹다 뱀에 물려 죽고 나서
접근금지란 팻말도 필요 없는
슬픔마저 유배된 집
혼자 남은 복숭아꽃만 제 몸을 키우며
우물보다 더 깊은 슬픔을 삽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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