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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특집/리토피아 시인들/최향란/김사람/황성일/장재원/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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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78회 작성일 11-12-2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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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란

물풀나무에게 바침 외 1편



노란 꽃핀을 꽂은 사랑요양병원 할머니가 밥상을 받고서 하는 말 ‘와, 고기다’ 밥숟가락에 생선살 발라 한 입 떠먹이는 할아버지 하는 말 ‘괴기다’ 스무 살 새색시 목소리로 ‘아이, 아니야 고기’ 한 입 더 떠먹이고 장난스레 웃는 할아버지 ‘괴기’ 꽃들이 마구 피어 사랑해, 봄입니다


나 그들처럼 한 올인 듯 휘감기는 물풀나무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운명의 눈 하나 밝히면

눈멀어도 심장 두근거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개울 건너는 돌 위에서 잠시 쉬어가는 법 그들에게 배워

오래도록 장대비 내리는 날에도

넘치는 개울 온몸 잠겨도

서두르지도 않고 길 잃어도 아프게 흔들리지 않지요

지나온 생애 꽃 환하게 핀 날 그리울 땐

그들이 부르던 노래로 뒤척이는 몸 쉬게 하고

그래도 정박하지 못한 배가 되는 밤에는

생의 배반이라 생각하지 않고 용서의 잔도 미리 준비합니다

나 이미 물풀이니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 압니다

마른 물풀 여름을 이겨내는 것처럼

빈 틈 많은 줄기 물살 따라 몸 길게 뻗습니다

가끔은 햇빛 비치는 그 쯤에 누워

얼마나 먼 길 왔는지 침묵하기도 하면서

출렁출렁 꽃송이 떨어지는 봄밤도

뿌리를 더 길게 내리고 환히 사는 게지요






슬픈 재산



하필 그 사람 곳곳에 꽃피는 봄날 누웠을까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가난한 그가 남기고 간

남에게는 줄 수 없는 슬픈 재산을 묻는다

빈 소주잔 꽉 움켜쥐던 나이보다 더 늙은 그의 손등

죽음이 이토록 쉬운 것이었을까 하염없이 꽃들이 피고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지만 스스로 등져야만 했냐고

쉰 목소리로 묻는 술잔들이 탁, 탁 부딪친다

얼마나 더 부딪쳐야

가파른 곳에 피는 꽃도 꽃답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그것도 운명이라면 마지막 술 한 잔 하고

꽃답게 아름다이 가시게

우리는 함께 낮술 마신다

바다 위에 낮게 흔들리는 차마 웃지 못하는 하현달

그렇게 가난했던 그 사람은

슬픔이 모두에게 공동분배 되는 곳에 서 있는가*

창밖 아직 환하여 아무도 생 마친 봄 꽃 하나 보지 못하고 있다

* 박삼중 스님의 말씀 중






황성일

향유고래 외 1편



고래가 파도 위로 뛰어오른다

그것은 5200만 년 전 육지에 대한 몸의 기억

숨을 쉬기 위해 한 생 동안 수 천 번을 뛰어오르지만

바다가 좋다

바다에서 살아갈 숙명으로

육지에서 태어난 고래의 조상은

모두 풀이 무성한 땅에 묻혔다

지금은 굳게 입을 닫은 침묵의 땅

마른 바람만이 죽은 고래의 발목을 매만져주곤 했으리라

죽어서도 바다로 흐르던 풍파를 견디며

폐선처럼 앙상하게 해체되었을 뼈들,

두터운 살들과 함께 썩어가던 땅은

지각변동으로 산이 되었다가

물 뿜듯 마그마를 뿜어보다가

지진으로 갈라져 무너졌다가

밑으로 꺼져 웅덩이가 되었다

그 위로 짜디 짠 바다가 흐르고

고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

물을 뿜는 침묵의 외딴섬 하나

예나 지금이나

이 작은 육지에도 바람은 불고

파도는 수도 없이 태어났다 죽는다

그것은 5200만 년 전 몸에 대한 바다의 기억

스쳐가듯 허파에 한 삶 가득 채운 고래가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만류인력



바닷물이 빠진다

소리 소문도 없이,


어느 갯벌에서도 지구는 돌고

노을을 보는 사람의 피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중력을 거스른다


인체의 70퍼센트는

소금물이라는데


세상 모든 소금물은

걸어서 삶의 이면으로 향하고

간혹 발이 빠지는 어둠 속에도

심장이 뛰듯,

지구는 돌고

돌 것이고


소리 소문 없이,

별을 보는 사람의 뼈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빛이 바랜다


오늘도 가루가 되어 흩어진 별들, 어디선가

사람은 잠들고

시는 태어나고


그 자리에 다시

물이 차오르고

차오를 것이고

소리 소문도 없이,






김사람

영원을 부르는 벨칸토 창법 외 1편



하드커버가 들썩거려요 마스께라!

무거운 뜻을 가진 가지가 우거지고

하늘보다 커다란 잎이 자라

활보하는 새들과 구름의 길을

모두 가려버리고 있어요

잎이 울음의 고체형이란 걸 안다면 마스께라!

나무에 기대어 울 자격이 있어요

울음에도 기교가 필요하단 걸 아나요

꽃이 죽고 새가 죽고 바람이 죽고

소리만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내 귀는 늘 젖어 있지만 아무도 몰라요

뼈가 흔들려요 폐가처럼 텅 빈 생각에도 흔들려요

나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어요

미래는 딱딱하지 않았으므로 마스께라!

현재로 공명되지 않아요

내 마른 몸은 그림자로 채워져 있어요

호흡을 할 때마다 들락날락 나를 찌르는

딱딱한 그림자가 무서워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날 이용하죠

나는 곧 버림받을 것을 예감해요

몸을 부비는 소리로 유혹하면 마스께라!

촛대에 검은 불이 붙어요

긴 시간을 흐르는 미성으로

당신이 오고, 떠나는 방식대로

내가 미쳐가고 있어요 마스께라!






실종하는 시간



날아다니는 것들은 지상을 기어 다녔다

나는 뱀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파리가 창에 달라붙어

돌아갈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사막에서 얼어 죽은

날개 없는 새를 생각하며

차창 밖으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늘 냄새를 좋아했을지 모른다

다물지 않던 그녀의 입에서는

청량한 바람이 불었고

구름에 알 놓는 새의 노래가 들렸다

마지막 내뱉은 호흡

붙잡으려 차를 탔을까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죽었다

나는 바람의 근원지를 도려내

고운 흙을 채웠다

구름이 무덤으로 내려오자

새들이 한참을 앓았고

세상에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저귀 차고 또 어딜 가셨는지






장재원

진경마당도 외 1편



평화로운 외암 민속마을 여름 오후

시원한 고택 한 쪽 마당 위에

몸뚱이가 그대로 붓인 화가가

무수히 오체투지하여

꼬물꼬물한 잔금 같은 고랑과 이랑으로

오묘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려 놓았다


개구쟁이의 낙서처럼,

혹은 고뇌하는 뉴런처럼

눈에 띄지 않던 미물의 시간이

보란 듯

흙 위에 살아 있는 흔적으로 남겨 놓은

진경 중의 진경 한 컷






가벼운 안녕



엉킨 얼레의 줄이 끊기자 연은

천리 밖으로 날아가서

말라죽은 버드나무 가지에 얹혀

가을벌레 신음소리만 냈다

이건아니잖아오해야다시생각해줘잘할게제발……


쥐들마저 떠나버린 한밤중

베갯잇에 연잎 이슬도 떨구다

은총처럼 찾아온 꿈속 재회에

따뜻한 봄 무논 속에 잠긴 개구리처럼

행복하다가


도로 절망한 연은

외진 모래펄에 박힌 우렁이 껍질처럼

서러웠다

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






김영희

매직파마 외 1편



혼혈로 시작된 나의 시조는 가야국의 왕 수로 씨.

인도 공주의 배를 빌어

김 씨 허 씨 자손 나눠가진 올곧게 뻗지 못한 아리송한 신화.

왕이었다가, 역적이었다가, 노비로 떨어지던 혼란의 자손.

김해 김 씨 안경공파 이십 몇 대 손.

뿌리부터 갈라져 뒤엉키던 몹쓸 내 족보처럼

나올 때부터 굽신거리는 내 머리칼

시조가 왕이면 어떻고, 노비면 어떠랴!

눈속임으로 양반 족보 팔고 사는 세상, 나도 단군의 자손이라고.

백의민족 올곧은 역사, 곰도 사람이 되는 단군신화

뿌리부터 뜨겁게 달궈 펼치면 나도 단일민족의 후손.






나를 벗어보다



낡은 입간판 하나 나부상裸婦象으로 서 있다.

최음제를 마신 듯 수치심 없이 사내 앞에 벌거벗는 나.

향내가 아찔한 중년 사내는 내 알몸을 기다린다.

옷고름처럼 나이를 풀어, 태어난 시간을 벗어놓고, 마지막 속옷처럼

이름 석 자를 벗어놓으라는,

몽유처럼 사내 앞에 손을 내민다.

어쩌자고 낯모르는 사내 앞에 나부裸婦가 되어가고 있는지,

내 손을 더듬는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두 눈이 손바닥을 지나 얼굴을 더듬는다. 

양미간을, 눈을, 코를, 입을, 그리고 무너지기 시작한 턱 선까지,

이리 오너라 다시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춘향가의 한 대목처럼 그의 눈이 얼굴을 돌려 내 귀를 질겅거린다.

뜨거운 혀끝으로 나의 운명을 벌거벗겨 내동댕이치는,

노상에 앉아, 흔들리는 마음 유혹하는 저 남자.

―손금, 관상, 사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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