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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특집/리토피아 시인들/김춘/고은산/권섬/천선자/정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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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88회 작성일 11-12-23 14:47

본문

김춘

강물이 발목을 묶다 외 1편



강은 귀를 열어 놓는다. 귓속에서 풀려나오는 소리들을

건져 올리던 부리가 긴 새, 강물에 발목이 걸린다.

새들은 묵음지대의 틈새를 안다. 강물과 강물 사이로

발목을 뺄 줄도 안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화인을 지닌 강물이 돌아설 때가 있다.

그 순간 익사한 소리가 강물 틈새로 떠오른다.

며칠 전 스스로 강물에 발목을 묶은 부리 긴 수컷도

강물 틈새로 떠올랐다. 화들짝 솟아오르는 암컷,

허공을 찍는 순간 발톱이 한낮을 찢는다.

쏟아지는 해의 파편, 강은 수많은 파편에 찔리고도

조용히 귀를 닫고 흘러간다.






가을, 뜨거워진다



가을이 오기 전, 그는 떠났다.


산이 내어준 길을 따라 너는 들어서고 있다. 말라서 쪼글쪼글해진 열매를 달고 있는, 지난 시간을 움켜지고 있는 산딸나무와 굴참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날다람쥐가 너를 경계하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한다. 쉿, 고요가 펴진다. 지금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미라를 만드는 공통의 시간, 허공에 세워진 계단을 딛고, 비단에 싸인 미라를 하늘에 올리면 지상에서 조용히 거둬들이는 시간.


산이 내어준 길은 거기서 끝이 난다. 너는 산의 경계선을 넘는다. 순간 팔과 다리를 거둬들이는 산, 둥글게 말리더니 중심 밖으로 굴러간다. 그 사이 너의 그림자는 촘촘한 잔가지에 걸려 긁히고 찢어진다. 너는 그림자를 벗는다. 빈 뼛속으로 스며든 바람이, 곡선을 그으며 불어간 쪽으로 너의 목은 꺾인다. 수분이 차단된 입술이 이제야 뜨거워진다.  





고은산

해몽 외 1편



돼지가 금빛 밧줄로 둘러쳐진 우리 안에서

우리 밖 소녀의 비단빛 동공을 본다

밧줄이 금빛 물결 속 노란 물감처럼 풀리고

그녀를 등에 태워 두둥실 별빛의 안내를 받으며

사향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통과한다.

얼마 후 달의 다이아몬드빛 표면에

발이 닿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를 응시하는 모습이

울금향 같다

호숫빛 잎사귀 같은 더 이상의 생각은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호숫빛 잎사귀의 숨은 서체를 해독해 본다


무서리 내린 가지 끝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마음 같은 꿈결 소녀의 에머랄드빛 외침이

나의 정수리에 닿는다

그녀는 가슴 왼쪽주머니에 지혜의 사금을 듬뿍 채운다

오른쪽 주머니는 황금빛 알을 부화하기 위해 껍질을 향한,

마지막 한 번 남은 부리의 쪼아댐 속

어미의 촉촉한 숨결 같은

진실을 가득 쓸 수 있는 금펜촉 가득 채운다

돼지는 무지개빛으로 다가와

나의 혈관을 천천히 타고 돈다


당신은 오늘 운수대통!






햇빛에 喜色이 돌다



햇살이 땅바닥에 누렇게 눌러 붙어 있다.

검은 넥타이에 매달린 목을 빳빳이 들어본다.

담배꽁초가 세차게 손을 떠난다.

꽁초를 빛나는 검은 구두 밑창이 짓이긴다.

양복 주머니에 덩그렁거리는

동전 몇 푼은 그의 얼굴 주름살이다.

몇 년 만에 입어본 신사복이

조롱 섞인 말을 한다.

엇박자 리듬으로 햇살과 정장 주머니 속

哀歡이 다가온다.

갈비뼈 사이, 시린 바람 드나들었던

시간의 등심에 달라붙은

손톱만큼의 꽃등심만을 떼어내

그는 혀끝에 놓고 살며시 씹어본다.

희누르스름한 이를 정수기의 냉수로 씻고

씹는 향내를 거울에 비춰본다.

보여진 만큼만 보여주는 거울의 본색을

떠올리며 향기 묻은 상상의 흰 뼈를 자꾸 집어넣는다.

 

길가 꽃잎들, 그의 가슴팍 울혈들이 짙게 묻어 갈 즈음,

젖은 손으로 가슴의 호수에 눈물 훔치는 물고기들을

뜰채로 담아 모두 황금어장에 옮긴다.

 

그를 감싼 햇빛 줄기마다 喜色이 돈다.






천선자

태양의 신 ‘라’ 외 1편



나는 꿈을 꾸는 목각인형이다.

사막고양이의 눈 속에서 모래바람이 인다.

사구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굽은 등이 있다.

낙타가 없는 사막, 모래장화를 신고 간다.

건조한 두 눈을 비비며 하늘을 바라본다.

검은 띠를 형성한 수리 떼가 날아오른다.

사막의 하얀 밤이 맹수의 발톱으로 자라난다.

푸석이는 꿈 덩어리는 모래무지의 꿈일 뿐이다.

질긴 꿈 덩어리는 사막여우의 한 끼 식사일 뿐이다.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매일 날개가 돋아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매일 몇 뼘씩 자라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매일 열꽃이 피어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몇 개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가느다란 수맥을 따라서 꿈눈이 움튼다.

꿈눈 속에는 협곡의 거친 숨소리가 남아있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양팔에는 꿈잎이 무성하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다리에는 꿈숲이 울창하다.

잠들지 못하는 머릿속에는 뿌리가 깊다.

무릎 위의 동그란 무늬 나이테가 선명하다.


촉촉한 구름의 눈빛이 타오른다.

오감을 자극하는 바람의 혀끝이 부드럽다.

빛을 잉태한 그림자의 젖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발등을 적시는 빗물 딱딱한 발등에서 피가 흐른다.

꽃대가 솟아오르는 자리,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내 심장이 지구에 걸린 태양을 밀고 간다.






외투 끝에 묻은 햇살을 털어내다



아버지는 지하 전세보증금을 주식으로 날리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몇 해를 구들장만 등지고 산다.

여동생은 카드빚으로 성형을 하고 연예인 기획사만 찾아다니다가

매를 맞고 동화 속 유리 구두를 찾아서 집을 나갔다.

잔소리를 하는 노모의 혀는 건기 속에서도 쑥쑥 자라났다.

고장 난 뻐꾸기시계와 단란했던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벽 사이의 그는

빗살무늬 창살의 창문을 잠그고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킨다.

한 손에는 마우스를 또 한 손에는 김밥을 먹으면서 게임을 한다.

충혈 된 눈을 비비며 콧등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외출을 한다.

규칙적인 일상을 툭 꺾어버린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를 산다.

공원에 가서 그늘 밑에 있는 옹이진 의자에 걸터앉는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손가락들을 잠시 버드나무에 걸어둔다.

허공을 향한 눈동자는 수 억 만 광년 우주정거장에 도착한다.

다크서클이 선명한 그의 눈 밑에는 외계인의 징표가 남아있다.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여자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온다.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목구멍에서 뭉클한 덩어리가 올라온다. 왜 심장이 뛰는 걸까.

저 가족의 내장 장치는 인간들에게는 없는 부품들로 차 있겠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무기가 분명해, 저 걸 사야지, 꼭 사야지.

가족들의 웃던 얼굴들을 잠시 떠 올려보다가 눈을 감는다.

빨간 우체통 안으로 쟁여지는 지로용지가 고개를 든다.

세금 독촉장을 받고 바쁜 해걸음 위에 빚더미만 쌓여간다.

더미의 집이 언덕 아래로 텅텅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더미는 비명에 가까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삼켜지지 않는 밥알이 최신형 무기를 든 적으로 몰려온다.

피씨방의 화면이 비눗방울처럼 떠다니며 울타리를 만든다.

화면 속에서 가상현실의 캐릭터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온다.

마지막 남은 몇 개의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린다.

막다른 골목 끝에 있는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서 영혼을 잡힌다.

로또의 숫자공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행운의 숫자를 가리킨다.

주머니 속에 쪼그리고 있던 웃음이 팡팡 터진다.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들이 하나둘 나타나서 말을 걸어온다.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모노드라마처럼 펼쳐지고 눈을 감아본다.

욕망의 날개를 깁는 몇 개의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려본다.

눈을 뜨는 순간, 환상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빚더미만 쌓여있다.

더미의 집이 언덕 아래로 텅텅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더미는 비명에 가까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좁은 골목 끝에 있는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서 영혼을 저당 잡힌다.

로또의 숫자공이 행운의 숫자를 가리키며 빠르게 돌아간다.

주머니 속에 있던 웃음이 팡팡 터진다.






권섬

벽 너머, 벽 외 1편



벽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

벽이 열리고 우르르 다리를 곧게 편 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시 벽 속으로 말끔한 자켓을 입은 소리들이 걸어 들어가고

벽이 닫히자 향기롭고 미끈한 소리들이 벽 속으로 사라진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벽속에서 벽이 종으로 이동하는 동안

웃는 소리 혹은 웅성거림이 벽 속에서 편집된다.


벽 너머에서 밤새 문서들과 커피를 마시고

벽 너머에서 숫자와 기호들이 전쟁을 하고

벽 너머에서 웅장한 문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벽과 벽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투명한 다리들


벽 속에서 포인트가 쌓이고

벽 속에서 세계 일주를 하고

벽 속에서 너의 존재를 확인하고

벽 속에서 너의 빨간 원피스를 상상하고

벽 속에서 너에게 중독된 광고지가 쏟아져 나오고


총총 계단이 사라진 그 벽 속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닫히고.






*의 잔치

―오늘의 메뉴는



녹차 밥에 빨강 노랑 초록 오색 김치와 간장 게장, 입맛이 당긴다.


동면을 끝낸 푸른 뱀이 거품이 뽀글거리는 게장의 말을 칭칭 감아 삼킨다. 혀의 모태에서 자생한 푸른 뱀은 뱅글뱅글 말의 똬리를 트는 법을 배운 거다. 되새김질이 필요 없는 푸른 뱀, 순간 식욕의 눈빛이 번뜩인다.


친절하게 자리를 비워 둔 식탁 위에 동강동강 잘린 말들이 진열 중이다.

만족을 모르는 푸른 혓바닥은 노련하고 숙련된 감각으로 모든 맛을 선택한다.


훈련된 혀의 말은 흥미롭고 치밀하다. 포기할 수 없는 그 서늘한 혓바닥은 바다 한가운데 말의 탑을 깎아 세워두기도 한다. 누구도 푸른 뱀의 혓바닥인 줄 눈치 채지 못한다. 싱그러운 말의 새순들이 푸른 뱀의 혓바닥을 허락하고는 무지개가 뜬 하늘을 상상한다.


그 혓바닥에 감염된 푸른 식탁 앞에서는, 말이 신이다.


* 말(=로고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신학의 기본 용어.







정치산

들꽃요양원·2 외 1편



어정어정 널브러진 그의 시간이 쓰레기를 주워 모은다. 종이박스, 신문, 꽁초가 그의 시간에 담긴다. 꽁초 하나 집어 들어 라이터를 켜고 의자에 걸터앉는다. 길게 뿜어내는 연기가 구부정하게 퍼져나가다가 은행나무 그림자에 걸린다. 더욱 긴 그림자를 만든다. 그 그림자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휠체어를 밀고 간다. 휠체어바퀴에 감겨 굴러 가던 그의 시간이 덜커덕덜커덕 멈추어 섰다가는 다시 또 굴러 간다. 덜컥, 잠깐 문틀에 걸려 멈추었던 시간이 덜커덕덜커덕 자판기로 향한다. 기계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커피 향을 삼킨다. 그의 시간이 다시 또 그림자에 떼밀리어 병동으로 간다. 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의 시간은 휠체어 바퀴에 되돌이표로 걸려 덜거덕덜거덕 돌아가고 있다.





들꽃요양원·3



몇 잔의 커피가 하루를 만든다. 모카향을 들고 밖으로 나와 흰 연기로 긴 하루를 피워 올린다. 큰 길을 구르는 시간들이 잠시 들렀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를 만나러 우편물들이 온다. 전화요금 고지서가 오고, 자동차세 고지서가 오고, 자동차 환경개선부담금 고지서가 오고, 그의 이름을 달고 많은 우편물들이 병동으로 문안 온다. 그가 있는 병동이 그의 주소다. 그가 요양원에서 병동으로 온 뒤부터 자판기의 고장이 잦다. 등급을 올려 다시 요양원으로 가야 하는 그의 초조함이 고장의 원인이다. 수가 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한두 번 옮겼다가 되돌아 와서는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자판기가 말썽이다. 요것 봐라, 돈만 좋아해. 꿀꺽 했잖아. 참았던 망치들이 자판기를 두드린다. 구시렁구시렁, 다시 또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어 원무과에 들락거리지만 아직 그의 주소는 그의 병동이다. 오늘도 전화요금 고지서가 오고, 세금 고지서가 오고, 카드 명세서가 오고, 그의 우편물들이 그의 병동으로 문안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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