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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호(봄호)/신작시/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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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태풍에게 묻다 외 1편
―아버지
세 번의 질문에 세 번 다 아버지를 부정했다
그가 아버지가 아니길 빌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와 나의 인연이 잘못 연결된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바다 건너 태풍이 오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그가 혼자 태풍 맞이를 하며 뛰어다닐 때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조그만 태풍 하나에도 우왕좌왕했다.
조그만 언덕 위, 초가집은 튼튼해 보였다
그러나 해마다 엮어 올리는 초가집에 물이 새고 흙벽이 바스라져 내렸다
어떻게 집 한 채 없는 인생이 있단 말인가
태풍이 몰려오는 바다……
그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농삿일로 검게 타오른 등어리를 나에게 돌리고
검은 절망이 가득찬 눈빛으로 먼 바다를 내다보고 있을 때
이제 더 이상 어떤 움직임도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태풍의 눈 안에서 우리는 잠시 평안했다
멀리 물러났던 바닷물이 거대한 검은 벽이 되어 돌아올 때
우리가 서 있던 언덕이 휩쓸려 내려갈 때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를 품었다
그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집
어떻게 집 한 채 없는 인생이 있단 말인가?
백두산 가는 길·1
―라면 집 연가
이렇게 맛있는 라면 처음 먹어 보네라고 웃는 그대여
눈발은 날려라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 시간
탱탱하게 씹히는 면발의 아름다운 살 떨림
우리의 웃음은 라면으로 시작하여 라면으로 끝나네
몇 생을 더 기다림으로 고행하여야
그렇게 맛있는 라면 처음 먹어 봤네라며 다시 웃을 수 있을까
겨우 라면 하나 끓여서 먹을 정도의 시간
그 시간 동안이라도
나의 추억은 배부르게 행복했다
그래, 이제는 집도 사라져버린
라면집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
라면 하나 끓일 정도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은 곳
추억은 날려라
하얀 눈꽃이 피어날 때마다
따뜻한 라면 국물이 생각날 적마다
이야기해 보자
나에게도 백두산처럼
뿜어 올릴 마그마가 아직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라면은 끓어라
라면 한 그릇 먹을 시간이여
이렇게 맛있는 라면 처음 먹어 보네라며
웃어보는 탱탱함이여
강수∙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바움문학상 작품상 수상. 반년간 시전문지 ≪빛과 숲≫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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