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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호(봄호)/신작시/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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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뒤집어진 게가 있는 정물 외 1편
아직 다 벗겨지진 않았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걸요. 맵고 다리가 많고 징그러울 걸요. 쉽진 않겠죠. 너무 가깝지도 않을 걸요. 소용이 있는 옷들을 걸치고 있진 않아요. 작지도 않을 걸요. 풍선껌처럼 오래 생각하다 가까스로 사라질 걸요. 울고 있진 않겠지만 조용할 순 없겠죠. 기대가 크진 않을 걸요. 가벼울 순 없어요. 노력하진 않을 거예요. 다만 당신을 꺾으려고 팔을 늘릴 순 있어요. 유리를 닮았나요? 쉽게 상하는 멜론을 좋아해요. 멍청할 순 있지만 텅 비우기는 힘들어요. 힘들어요, 멈추는 게. 이동하는 게. 12시에 잠드는 게. 당신을 몰라요. 행복할 걸요. 일흔두 개의 동그라미 속에 숨어있는 한 개의 하트가 내 기분이에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걸요. 재채기 하다 당신을 잊을 걸요. 가느다란 머리카락으로 만든 그네를 타고 내일모레로 갈 걸요. 가서 웃다가 너무 웃어서 작년으로 추방당하겠죠. 먼지 쌓인 신발을 신고 벌을 받는 기분으로 가을까지 걸어가야 할 걸요. 죄책감은 없을 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빈센트 반 고흐, 1889∼1889년 작품.
환청
새벽에 양배추를 데치며
뜨거운 물에 몸 푸는 식물을 관찰한다
식물은 비명이 없어서 좋다
색이 변하는 순간조차 고요하다
기다리는 일은
허공을 손톱으로 조심조심 긁는 일
어디까지 파였는지
상처가 깊은지
가늠할 수도 없이
이상하다
밤마다 휘어진 척추부터 꼼꼼히 흔들리는
누군가의 숨죽인 흐느낌이 들린다
오래 망설이는 사이
귀가 파래진다
박연준∙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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