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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호(봄호)/신작시/천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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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16회 작성일 11-06-2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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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자
단풍 외 1편


고독마저 뚝뚝 부러트리는 상수리나무 밑동
베레모를 눌러 쓴 가을이 캠퍼스를 펼치고 있다.
찬바람이 불쑥 찾아와 서성거리는 언덕 위
대문이 없는 집들이 햇발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경계를 따라 쌓아 놓은 크고 작은 돌들이
층을 이루며 작은 돌이 큰 돌에 안겨 있고
큰 돌이 작은 돌을 품고 있는 돌담에 
듬성듬성하게 박힌 흰 돌의 말간 웃음 길로 
메아리를 부르고 산새들을 부르고 청솔모를 부르고 
꽃을 피운 여름 산이 실수로 쏟아버린 붉은 물감, 
푸른 능선을 징그럽게 물들인다.






외톨이


몸집이 왜소하고 귀가 짧은 토끼가 머리를 들이밀고 먹이를 먹으려고 한다. 귀가 긴 토끼들이 그를 막는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빈 그릇을 핥는다. 지난여름 멋지게 파 놓은 굴을 내주며 귀를 쫑긋 세운다. 귀가 긴 토끼들이 자리를 옮긴다. 그림자놀이에 지친 귀가 짧은 토끼는 귀가하지 못하고 무료한 햇살이 토끼의 눈 속으로 기울어진다.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귀가 짧은 토끼의 털이 한 움큼 빠져있다. 목덜미 위로부터 정수리 아래까지 빠진 털이 수북하다. 귀가 긴 토끼 한 마리가 피를 흘린다. 귀가 잘려나간 귀가 긴 토끼 두 마리가 겁에 질려있다. 밤마다 조금씩 사라지는 귀.

뒷산 쪽으로 시시티비를 설치한다. 하늘에 걸린 달덩이가 토끼장을 비추고 영상에 잡힌다. 토끼의 항변이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귀를 가지고 있어요. 이 귀로는 들을 수 없어요. 볼 수도 없어요. 혼자인 고통은 빛도 없어요. 계절도 없어요. 오직, 어둠뿐인 무덤 속에는 고뇌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해골의 눈구멍에서 보랏빛 관목이 자라나요. 무성한 잎을 잘라도 우듬지를 잘라내도 자꾸 자라나요. 보랏빛 관목의 숲을 지나면 고독의 푸른 성이 보랏빛 손을 내밀어요. 담쟁이 넝쿨에 달린 입들이 말을 걸어와요. 길을 잃은 무음의 언어들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타박타박 걸어서 고리를 잡아당기면 어긋난 척추들이 무너져 내려요. 나를 키운 보랏빛 관목이 부패한 뼈 조각들을 부둥켜안고 슬픈 블루스를 추어요. 귀가 가장 긴 토끼의 귀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귀가 짧은 토끼. 

천선자∙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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