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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흐름 진단 시/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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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79회 작성일 11-12-2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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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몸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잘 만든다

박찬일|시인




∙이성혜, 「아담의 성기」(≪예술가≫, 2010. 겨울)

∙이성혜, 「밑줄 긋기」(≪리토피아≫, 2010. 겨울) 

∙강희근, 「오늘」(≪리토피아≫, 2010. 겨울)

∙이승훈, 「아방가르드냐 선이냐」(≪시와사상≫, 2010. 겨울)

∙조수림, 「동생을 부르려다 멈춰선다」(≪시와사상≫, 2010. 겨울)

조수림, 「욕의 푸가―첼란에게 꼬리를 밟히다」(작가세계, 2010. 봄)

∙김안, 「일요일의 혀」(≪리토피아≫, 2010. 겨울)

∙천외자, 「달맞이꽃」(≪예술가≫, 2010. 봄)


스피노자의 ‘삶에 대한 의지’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힘에의 의지] 중에서 어려운 것은 권력에의 의지다. 삶에 대한 의지는 기쁨을 주는 타자를 만나면 된다. ‘내’가 기쁨을 주는 타자가 되면 된다. 권력에의 의지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은 ‘독존의식’의 경지와 관계있다. 문제는 혼자다. 종교적 거처나 형이상학적 거처가 없는 ‘혼자’다. 혼자를 견디는 힘이다. 힘을 권력이라고 해도 되는 것은 ‘권력과 같은 힘’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동정을 용납하지 않고, 도덕·양심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은 또한 스스로 존재하는 것, 스스로가 원인인 존재다.


‘관찰의 힘’!이란 말은 플로베르, 모파상, 졸라, 하우프트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저자연주의로 유명한 홀츠에게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노향림, 김기택 또한 언급할 수 있다. 물론 로댕과 로댕에게 영향 받은 릴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홀츠는 유명한 공식 art=nature-x를 만들어냈다. x는-홀츠의 역시 유명한 역저 <예술-그 본질과 법칙들>을 참조하면 - 작가의 주관성 및 생산수단(이를테면 붓, 물감 등)으로 치환되는 것. 작가의 주관성과 ‘생산수단’이 최소값이 되면 자연은[nature] 예술[art]과 가까워진다. 최후의 목표는 사진 같은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관찰의 힘’은 조각가들에게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로댕의 「지옥문」 위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관찰의 힘의 소산이었다. 릴케의 자주 거론되는 시 「표범」이 관찰의 소산이었듯이. 로댕의 「지옥문」 말고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도 말할 수 있다. 6명의 시민들의 얼굴을 보라. 그들의 무거운 얼굴을 봐 보라.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의 시민들의 표정을 독자 관객이 잘 관찰할 수 있도록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을 독자 관객의 눈높이에 모셨다.

관찰의 힘은 객관성과 관계한다. 객관성 대신에 객관적 모사[묘사]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다시 강조하자. 작가의 객관적 관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 관객의 객관적 관찰도 있다. 독자 관객의 객관적 관찰의 내용은 물론 각각 다르다. ‘모두 다르게 본다[읽는다].’ 「생각하는 사람」을 거창하게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와 관련시킬 수 있다. 여성 시인 이성혜는 「생각하는 사람」의 ‘남자’에서 남자의 성기가 왼쪽 사타구니 위쪽이 아닌, 오른쪽 사타구니 위쪽에 놓인 것을 ‘발견’하였다.


사워하고 나오는 그에게 내가 한 부탁은 어려운 게 아니다.


오른발 앞부분으로 낮은 화장대 의자를 딛고 무릎을 굽혀봐라

왼팔은 가슴을 지나 오른쪽 굽힌 무릎을 잡고 왼쪽 얼굴을

어깨에 기대라, 오른팔은 집게손가락만 펴서 내려트리고

그 자세로 잠시 더 있어달라는 것뿐


지옥 입구에 서 있으라는 게 아니다, 집게손가락으로 신의 영감을

받으라는 것도, 고통과 고뇌어린 미묘한 표정을 표현해

보라는 것도, 온 몸에 힘을 줘 터질 듯한 근육을

만들라는 것도 아니다


―그만 버티고 로댕조각전에서 본 ‘아담’ 포즈 좀 취해 주라


난, 로댕의 조각 ‘아담’의 자세로 서면 오른쪽 사타구니 위쪽에 성기가 놓이는지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다. 

―이성혜, 「아담의 성기」 전문


역시 관찰의 힘이다. 특히 두 번째 연이 주목된다. 로댕 갤러리를 다시 한 번 가봐야겠다. 아니면 로댕 화첩을 확인해보던지. 아니, 내가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취해보아야겠다. 이성혜의 ‘예술’은 나에게 할 일을 선사하였다. 할 일은 즐거움과 관계한다. ‘삶에 대한 의지’와 관계한다.    


중국 저나라엔 인어 아저씨가 있었는데, 왜 인어 하면

아가씨만 생각하나, 문화 편식의 결과다


네가 말한다

―편식이라는 거, 아침 거울 매일 보는 것과 같은 거?

역사박물관에서 중국신화 듣기 전엔 인어 성별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봤다, 인어도 이 바다로 저 육지로 교류하고 혼인하며

글로벌하게 살았으려니 생각했다


우주를 생성하고 신들을 창조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두개골 속

상상들, 내해를 배회하다 흘러나왔던 근원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정처 없는 시간과 장소들을 떠돌다, 편서풍에 흐르는 황사처럼

잿빛 기억의 골짜기에 덮여가고 쌓여도 가겠지

―「밑줄 긋기」 앞부분


역시 이성혜의 시다. 주목되는 부분은 셋째 연. 물론 첫째 연, 둘째 연을 참조해야겠지만. “인어 아저씨”가 되기도 하고 “인어 […] 아가씨”가 되기도 하는 것. “아침 거울 매일 보”지 않는 이가 있다. 물론 ‘보는 이’가 더 많을 것. 처음 인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지 않았을 것. 매일 아침 거울 보지 않는 것으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될 수 있다. 셋째 연을 자세히 보자. “흘러나왔던 근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정처 없는 시간과 장소들을 떠”돈다고 하였다. “정처 없는 시간과 장소들을 떠돌다, 편서풍에 흐르는 황사처럼/잿빛 기억의 골짜기에 덮여가고 쌓여도 가겠지”라고 한 것은 묵시론적 상상력. ‘잿빛 기억’은 기억해줄 종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은유. ‘황사에 덮힌 문명’으로부터 황사를 걷어낼 종이 없다고 한 것. 인류가 기억이 안되는데 ‘인류의 인어’가 기억될 리 없다. 인류와 인어가 별로 다르지 않다. 백 년 전에도 없었고, 백년 후에도 없을 너를 백억 년 전에도 없었고, 백억 년 후에도 없을 너라고 고쳐 말하면 어떨까. 지구의 역사가 46억년이다. 그만큼 또 존속할 거라고 한다.


오늘은 왜 두자미 생각이 나는가

그가 올라가 시를 지은

그 다락에 올라가 동정호를 바라볼 때마다

더 짙은 그늘 내 이마에 드리워지는데

그가 외로운 배라면

나는 그 배에 오른 사공이라 하겠는데

그런데 나는 어디로 저어갈지 막막한 사공일 뿐

하루가 머얼리 땅으로 내려와 감도는 구름 근처

흐르고 있다

친구는 손 닿지 않는 곳에 있고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 뿔뿔이 자기 생각에 젖어

스스로의 배를 띄우거나 어디론가

저어간다

아, 갈 것들은 다 가고뜰 것들은 다 뜨고

오늘은 왜 지지리 가난했던

지지리 아득했던

그 두자미 생각이 나는가

―강희근, 「오늘」 전문


들어갈 것이 다 들어있다. 바로 외로움과 가난이다. 외로움에 에피세트를 붙이면 막막한 외로움이다. 혹은 고향을 상실한 외로움이다. 외로운 자는 열려있는 자가 아니다. “다락”, “동정호”, “배”, “땅”, “구름”들에게 열려있는 자가 아니다. 다락에 닫혀있고, 동정호에 닫혀있고, 배에 닫혀있고, 땅에 닫혀있고, 구름에 닫혀있다. 인간은 본래 개방된 존재다. 다락, 동정호, 배, 땅, 구름에 개방된 존재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을 대상화시켜 인식하는 존재였다.

외로운 존재는 화자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 뿔뿔이 자기 생각에 젖어/스스로의 배를 띄우거나 어디론가/저어간다”고 하였다. 외로움으로 치면 가난만한 외로움이 없다. ‘가난+외로움’은 말 그대로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만약 ‘분하다’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이때이리라. 하나 더: ‘가난+외로움+병’으로 죽어갈 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또 ‘분하다’라고 말해야 할까.

화자는 실의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두자미”[두보]를 생각나게 하였다. 두자미가 삶에 대한 의지를 주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권력에 의 의지를 주었으면 좋겠다.


禪이 지향하는 게 그래요. 나와 세계에 무슨 본질, 실체, 자성이 없다는 거야. 그럼 선도 사기입니까? 예술의 무의미는 생의 무의를 깨닫는 방편이죠. 본질이 없으니까 몸도 허깨비 마음도 허깨비야 이 허깨비를 없애고 다시 없애고 마침내 허깨비를 없앤다는 것도 없애면 허깨비 아닌 것만 남죠. 예술은 이 허깨비 아닌 것 자성청정심과 만나야 하고 자성청정심이 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시쓰기는 수행입니다

― 이승훈, 「아방가르드냐 선이냐」 부분


제목 「아방가르드냐 선이냐」는 ‘entweder∼oder∼’ 틀이다. 내용을 보면 ‘아방가르드이고 선이다’, 즉 ‘nicht nur∼sondern auch∼’ 틀이다. 아방가르드가 선이고 선이 아방가르드라고 말하면 ‘und’ 틀이지만. 김춘수가 허무주의로 무의미를 구조하였다면 이승훈이 “禪”으로 무의미를 구조하였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하나의 현상학적 장르라면, 이승훈에 의한 무의미에 대한 인식에 의해 쓰여진 시는 장르를 지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의 무의미까지 얘기하는 자가 ‘언제’ 장르를 짜겠는가. 이점에서 이승훈의 무의미(혹은 허무주의)가 김춘수의 무의미(혹은 허무주의)를 한 걸음 앞서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은 끝에서 더구나 시를 말하지 않고 “시쓰기”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시가 없고 시쓰기가 있다는 것이다. 시쓰기라는 “수행”만 있다는 것이다.

수행은 왜 하는가. ‘허무주의의 부정’이라는 말이 있다. 허무주의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주의·주장에는 ‘허무주의의 부정’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힘이 세다는 말이다. 허무주의가 수행하도록 한다. 성철이 왜 수행을 했겠나. 오현이 왜 수행을 하겠나.

조수림은 여자다. “말(言)”, “혀끝”, “피”, “혈당”, “시신경”, “왼편 날개”, “목구멍”, “머리칼”, “마른침”, “입술”, “몸”, 그리고 “밥”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박찬일은 남자다. 박찬일은 좀처럼 몸을, 혹은 몸의 부속품을, 얘기하지 않는다. 밥을 얘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조수림의 「동생을 부르려다 멈춰선다」에 대해 말하려는 첫 번째 동기. 여자의 몸(혹은 밥)에 대한 관심이 인류를 진화하게 하였다. 진화의 고비마다 여자가 있었다. 진화가 좋은 것? 삶에 대한 의지가 좋은 것이라면 진화가 좋은 것이다. 몸에 대한 관심이 좋은 것이다. 좋은 몸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잘 만든다.

 

꿈속에서 말을 하면 돌아가지 못할까 혀끝에 걸린 말을 꿀꺽 삼킨다 삼킨 말이 풀어져 복숭아 넥타처럼 피를 타고 흐르고, 혈당이 마음에 걸린다 시신경이 손상될지 모르고 Y의 아내는 눈이 멀어 산에서 목을 맸다는데 나뭇가지는 오후처럼 휘청거렸을까 다시 새가 날아와 앉았을까 그놈의 새를 잡아야 하는데


왼편 날개를 다치고부터 비닐봉지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지 자른 머릿카락을 담은 십일월의 검은 비닐봉지는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목구멍에 자꾸만 머리칼이 걸려 카악카악 마른침을 뱉고, 입술이 저려온다 돌아가신 엄마가 밥 먹으라고 흔들어 깨우는데 시퍼런 가위에 눌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조수림, 「동생을 부르려다 멈춰선다」 전문

 

두 번째는 ‘구조’에 대한 것이다. “꿈속에서 말을 하면 돌아가지 못할까 혀끝에 걸린 말을 꿀꺽 삼킨다”로 시작해서 “돌아가신 엄마가 밥 먹으라고 흔들어 깨우는데 시퍼런 가위에 눌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라고 끝내고 있다. ‘처음’을 기억하고 있다. 처음을 기억하는 것도 작가의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다.

세 번째는 두 번째의 연장에 있는 것으로 ‘연상’에 대한 것이다. “말”이 “피”가 되고, 피가 “혈당”이 된다. 혈당이 당뇨에 흔히 등장하는 “시신경”이 된다. 시신경은-역시 당뇨와 관계있는-“눈” 먼 “Y의 아내”가 되고, 눈 먼 Y의 아내가 “목”을 맨 “나뭇가지”가 된다. 나뭇가지는 “새”가 된다. “그놈의 새를 잡아야 하는데”로 첫 연을 끝내고, “왼편 날개를 다치고부터”로 둘째 연을 시작한 것도 주목된다.

푸가는 연상보다 반복과 관계있다. 비슷한 것이 계속 도망간다. “문제는 똑같지 않게 도망가는 것. 똑같으면 잡힌다. 끝난다. 비슷하게 계속 도망친다, 살아서, 살아남으려고.”(박찬일, 「김현신론 참조)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다 수도꼭지를 비틀자 욕이 흘러나오다 바가지로 욕을 퍼 목욕을 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밥을 지어 먹다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욕이 넘쳐흘러 에셔의 계단을 구르다 계단에 갇힌 돼지들이 떠내려가다 날것과 익힌 것들이 짝을 지어 떠내려가다 너의 로마가 깊은 모욕에 잠기다

욕 위를 떠도는 노아의 방주

바닥에 구멍이 났다고

하늘에 대고

욕을

욕을 하다

―조수림, 「욕의 푸가―첼란에게 꼬리를 밟히다」


비슷한 단락이 두 번 더 계속된다. 전형적인 푸가 양식의 시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다”, “욕이 흘러나오다”, “목욕을 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 “욕이 넘쳐흘러 에셔의 계단을 구르다”, “로마가 깊은 모욕에 잠기다” “욕 위를 떠도는 노아의 방주”, “하늘에 대고/욕을/욕을 하다”들도 푸가 양식에 의한 기표의 연쇄다. 주목되는 것은


욕 위를 떠도는 노아의 방주

바닥에 구멍이 났다고

하늘에 대고

욕을

욕을 하다


라는 구절이 산문형식이 아닌 운문형식으로 두 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 운문형식이 이 부분을 중요하게 간주하게 한다는 것. ‘욕 위를 떠도는 노아의 방주’가 신성모독적이고, ‘하늘에 대고/욕을/욕을 하다’가 신성모독적이라는 것. 신성모독이 권력에의 의지와 관계있다.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스스로가 원인인 존재. 신성을 모독하는 화자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스스로가 원인인 존재와 맞장 뜨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화자라고 할만하다.


당신은 나에게 90도로 인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진실과 나의 진실은 다르지만, 다르다는 사실에 멈춘다면 다를 바 없습니다. 대중들은 적이 존재해야 성스러움을 느끼기 마련이기에, 세상의 모든 판관들의 주된 업무는 적을 심어주는 것. 적이 사람다움을 박탈하면 할수록 모두가 고르게 성스러워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적해서는 성스러울 수 없습니다.

―김안, 「일요일의 혀」 부분


적이 있고, 그 적이 전율하게 한다면 그 적이야말로 삶에 대한 의지를 주는 중요한 타자. 김안은 “90도로 인사”하는 타자도 삶에 대한 의지(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주고 “내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타자도 삶에 대한 의지를 주는 것을 안다. 이중에서도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타자가 더 많은 코나투스[삶에 대한 의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의지를 “성스러움”에 비유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판관들의 임무는 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사람다움을 박탈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갈 것을 촉구하는 듯.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상호인정투쟁이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상호인정투쟁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지금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호젓한 산길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귀

별과 초승달을 바라보는

가늘고 긴 목


내 목숨에, 내 죽음에 무엇이 부족하지

푸른 빛도 붉은 빛도 사양


나는 노랑만을 가진다

―천외자, 「달맞이꽃」 전문


압권은 셋째 연에서 “내 목숨에, 내 죽음에 무엇이 부족하지”라고 한 것. 죽음에 부족한 것이 정말 없는 것 같다. 정말 없는 것일까. ‘회한’, ‘후회’ 들은 뭐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없다는 말이다. ‘부족’이 완성이라는 말이다. “별과 초승달을 바라보는/가늘고 긴 목”과 “나는 노랑만을 가진다”고 한 것은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 현재에 대한 전면적 긍정. 죽음에 대한 전면적 긍정. 권력에의 의지! 별도 노랑, 초승달도 노랑. 노랑도 노랑; 노랑이 가볍다. 가볍게 생을 넘어가겠다.


박찬일∙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시단 데뷔. 시집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등.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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