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1호(봄호)책 크리틱/진순애/윤향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4회 작성일 11-12-20 23:07

본문

 

소박함을 위한 발걸음

진순애|문학평론가



■서규정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신생, 2010)

■설정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시와사람, 2010)


1 ‘집’에 대한 성찰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과 설정환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진 면은 ‘집’에 대한 성찰이다. 집은 ‘사람, 여자, 마을, 고향, 조국’ 등에 대한 메타포로 우리가 출발한 처소이자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집’에 대한 성찰을 서규정과 설정환이 시의 중심에 두고 있는 까닭은 소박함을 위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인간의 삶은 소박함과 멀어지고 문명적 찬란함과 친밀해졌다. 문명적 인간의 정체성은 소박함을 뒤로 하고 문명적 찬란함을 전면에 내세운 근대성의 한 면모로 뒤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성을 뒤로 하면, 시인의 집은 그 시인이 걷는 발걸음에 따라서 소박함의 메타포로 성의 메타포로 문명적 메타포로도 작용하면서 그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의 세계를 내포한다.

서규정의 집에 대한 성찰은 ‘외로운 발걸음’으로 설정환의 집에 대한 성찰은 ‘그리운 발걸음’으로 특화되는데, 양 시인이 지은 외로운 집과 그리운 집은 성과 속의 변주 속에서 문명인의 출발지인 소박함을 꿈꾸면서도 문명적 세속을 포함한다. 문명적 세속은 근대인의 근거지인 까닭이다. 이때 외로움과 그리움은 양성구유와 같아서 외로운 집과 그리운 집은 동일하게 성으로도 속으로도 작용한다. 외로움의 이음동의어가 그리움이며, 그리움의 이음동의어가 외로움인 까닭이다. ‘외로움이 싫다면 그리워하지 말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나, 그리워하는 것은 문명인의 무의식적 작동이자 인간인 우리가 시간의 존재라는 증거이므로,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문명적 인간인 우리의 존재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분리할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동일시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는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은 ‘외로운 대상’에 대한 묘사가 중심을 이루고, 설정환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는 시적 화자가 ‘그리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은 시적 화자가 ‘외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규정의 발걸음에 포착된 외로운 세상살이가 주된 세계여서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설정환의 주관적인 말하기에 비해 객관적이다. 때문에 설정환의 그리움의 이면은 외로움이나, 서규정의 외로움의 이면은 언제나 그리움은 아니다. 서규정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혹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그리고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각각 작동한다. 


2.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 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 보다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탱자나무 여인숙」 전문


세상살이를 외롭게 포착하는 까닭은 시인의 시선이 그와 같이 작동하는 데 있다. ‘쓰러져 누운 폐선이 있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에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의 풍경이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서규정의 시선이 그러한 까닭이며, 그러므로 그의 발걸음이 그와 같은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이르게 된다. ‘탱자나무 여인숙’ 혹은 ‘여인숙’의 유랑의 이미지와 그를 바라보는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결합하여 탄생한 「탱자나무 여인숙」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 보다/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어서”라고 여인숙 안주인의 외로운 내면까지 통찰한다.

‘여인숙’이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외로운 집인 것이 ‘들고 나는 손님이 머무는 곳’이므로 그러하며, ‘들고 나는 손님과 함께하는 안주인’이므로 그러하다. 비록 안주인의 상처가 아니어도 여인숙의 안주인은 ‘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여인숙의 안주인’이므로 외로운 집의 외로운 주인이며, ‘들고 나는 손님’ 또한 집주인이 아니라 ‘머물다 가는 객’이므로 외로운 집의 외로운 객이다. 정체성 형성의 근원지로서 집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외로운 대상들에 동화된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탱자나무 여인숙」을 더욱더 외로운 집으로 짓고 있다.

그러나 외로운 풍경에 결합된 시인의 외로운 발걸음 뒤에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모래 위엔 발자국//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는 그리움이 배어난다. 시적 화자의 그리움이 아니라 여인숙의 안주인의 그리움을 대변하는 화자이나, 양자는 분리되었으면서도 결국 화자의 그리움이 여인숙의 안주인에게 이입된 것이므로 양자의 분리는 분리를 초월한다. ‘탱자나무 여인숙의 안주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서규정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대변하는 소박한 풍경인 것이다. 


길거리 군방장수가, 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장한다면

가볍게 바닥을 치는 개그일까요

재벌들이 비자금을 비축해 놓고 수평선처럼 입을 다문 건

광안대교가 털썩 주저앉을 저급한 코미디 아닌가요

아침에 뜬 태양이 정오를 건너 어둠의 숲으로 들기까지

축 쳐진 사람들을 고실고실 말리다 보면

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시퍼렇게 우는 그늘

그러면서도 화려하게, 참기름처럼 반짝이는 눈빛의 기교와

해결이 안 되는 곳에서의 해체의 실마리일까요

물 묻은 손으로 전깃줄을 낚아 채 생 밤톨 같은 눈을

노릿노릿 군밤으로 마저 구워버릴지도 모를

저기 외딴 집

움 하면 열렸다 막 하고 닫히는 움막도 아닙니다

곧 헐릴 남의 집에 좀도둑처럼 든

군밤장수에겐 운신도 못하는 노인과 아이도 있네요, 딸려 있어

―「외딴 집」 전문


「외딴 집」의 외로움은 「탱자나무 여인숙」의 외로움과 격을 달리 한다. ‘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곧 헐릴 남의 집에 좀도둑처럼 든, 운신도 못하는 노인과 아이도 딸려있는 군밤장수’가 머물고 있는 외딴 집의 외로움은 그리움을 은닉한 외로움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 묻은 손으로 전깃줄을 낚아 채 생 밤톨 같은 눈을/노릿노릿 군밤으로 마저 구워버릴지도 모를”, 곧 헐릴 남의 집이자 빈 집인 외딴 집의 풍경은 ‘외딴 집’이 지닌 외로움을 넘어선 고통의 집이다. “아침에 뜬 태양이 정오를 건너 어둠의 숲으로 들기까지/축 쳐진 사람들을 고실고실 말리다 보면/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시퍼렇게 우는” 사람들이 어둠을 가리는 외딴 집의 풍경은 소박한 삶을 염원하는 상처입은 사람의 집이자 문명의 이기가 남긴 어둠의 풍경이다. 이는 개인적인 외로움을 넘어선 사회적이고 문명적인 외로움이며,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을 멈추도록 유인한 소외된 세상살이인 것이다.


낙서로 담벼락을 빙 둘러친 집, 그 집에 한 사람이 살았네

마치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보다

밀룽밀룽 미농지가 먼지처럼 자욱이 덮여 있는

그 한 장을 차마 넘길 수가 없어

책표지만 읽고 밑줄 한번 그어보지 못했으나

사랑도 혁명도 처음엔 낙서로 시작하듯이

지나간 세월들은 깊은 강물처럼

그 많은 이슬방울을 받아 마셔왔다면

이봐요 이봐 이제 비로소 목이 타

사람이 사람을 쪽쪽 빨아 마셔야할 만큼 하도 목이 말라서

화석으로 굳어진 얼굴 빼고는,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

해바라기처럼 나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네, 그림자로 타오르네

―「빈집」 전문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바닷가의 여인숙’에 이른 서규정의 발걸음도 아니고, ‘곧 헐릴 빈 집인 외딴 집’에 이른 발걸음도 아닌 ‘빈집’은 서규정의 과거의 집, 곧 무의식을 은유한다. ‘빈집’은 외로운 세상살이의 외적 풍경에 다다른 서규정의 발걸음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머문 집이다. 그러므로 ‘탱자나무 여인숙의 안주인’에 이입된 외로움과 그리움과 같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아니라 서규정의 외롭고 그리운 내면 세계 그 자체를 은유하는, 곧 그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빈집’이다.     

“낙서로 담벼락을 빙 둘러친 집, 그 집에 한 사람이 살았네”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지나간 세월들은 깊은 강물처럼/그 많은 이슬방울을 받아 마셔왔다”고 과거를 비유한다. 또한 “마치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보는 것”과 같은 태도로, 그리고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해바라기처럼 나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네, 그림자로 타오르네”와 같은 태도로 묵은 과거를 회상한다. 지금 여기에 서서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 해바라기처럼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며 그림자’처럼 외로운 그리움을 토하고 있는 서규정의 무의식의 세계를 확인한다. ‘빈집’에 이르러 외로운 발걸음은 더욱더 깊은 외로움이 되며 그리움 또한 그러하다. 소박한 처소로 돌아갈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이 깊은 그리움을 낳고 있다. 


3. 설정환의 그리운 발걸음


아귀 맞지 않는

양은 반찬통 같은

흑석골 사람들은

뚜껑을 잘 닫아도

한숨이 김치 국물처럼

새어나오는 사람들끼리

나직나직 모여 산다


은행을 퇴직한 중년의 구두닦이 사내에게

닳은 구구 밑창을 높이 들어 보이며 웃는 사람들


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

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낸다.     

―「민들레 씨앗-흑석골 편지·1」 전문


흑석골은 가상의 마을이기도 실제하는 마을이기도 하겠으나, 특히 “은행을 퇴직한 중년의 구두닦이 사내에게/닳은 구구 밑창을 높이 들어 보이며 웃는 사람들//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낸다”는 풍경은 가상의 마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귀 맞지 않는/양은 반찬통 같은/흑석골 사람들은/뚜껑을 잘 닫아도/한숨이 김치 국물처럼/새어나오는 사람들끼리/나직나직 모여 산다”는 풍경은 실제하는 마을인 흑석골로 보이기도 한다.

흑석골이 가상의 마을이건 실제하는 마을이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흑석골 풍경이 쓸쓸한 세상살이의 풍경을 대변한다는 점이며, 그와 같은 쓸쓸한 세상살이의 풍경이 설정환을 외롭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외로운 흑석골에 이른 설정환의 발걸음에도 그리움이 환기되는데, 그것은 “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내는” 풍경에 있다. 그것은 외로움을 그리움에 닿게 하여 과거를 환기하는 모티프로 작용하며, 현재는 부재한 그리운 풍경이므로 가상의 풍경이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풍경일 것이나, ‘민들레 씨앗’에 실려보내는 가난한 삶이므로 가상이 아니라 실제했던 소박한 삶의 뒤안이다. 비록 가난했을 지라도 휴머니티가 살아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설정환의 외로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입동立冬 밑 가랑비에

수북수북 은행잎 무너지는

간판 불 꺼진 길을 돌아옵니다

허리 낮은 문패 없는 집에

젖 빨다 잠든 갓난아이의

솜털 같은 숨소리 말갛게 들여다보는

이불솜 같은 불 켜진 창에 대고

문 두드리고 싶습니다

무작정 부르고 싶습니다

나예요!


발이 따뜻한 집이 그립습니다.

―「발이 따뜻한 집」 전문


민들레 씨앗이 가져온 흑석골의 소박한 편지에 대한 그리움처럼 설정환이 그리워하는 집은 ‘발이 따뜻한 집’과 같다. 시는 “입동立冬 밑 가랑비에/수북수북 은행잎 무너지는/간판 불 꺼진 길을 돌아옵니다”라고 외로움을 호소하면서 출발하여, “허리 낮은 문패 없는 집에/젖 빨다 잠든 갓난아이의/솜털 같은 숨소리 말갛게 들여다보는/이불솜 같은 불 켜진 창에 대고/문 두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발이 따뜻한 소박한 집’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외로움이며,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낳은 외로움이다.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외로움을 깊게 하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또한 그리움을 깊게 한다. 비록 깊은 그리움이 시적 은밀성을 약화시키면서 시인의 말을 돌출시키고도 있으나, 그렇다고 소박함을 그리는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메주 뜬 내 가득한

메주 뜨는 집

메주 뜬 내 진해질수록

제 몸을 깨뜨려

고뇌를 삭혀 빚은

묵묵한 청동종 소리는

소리 없는 향

댕댕댕 터트린다

가벼워지며 익어가는,

그러다 비로소 소리를 잃어버린

을 맛깔나게 하는

청동종은 물기를 다한 인생처럼

뽀얀 아기웃음 가루들을

속으로 속으로 터트린다

―「메주 뜨는 집」 일부

  

또한 설정환이 그리워하는 집은 ‘발이 따뜻한 소박한 집’이자 ‘민들레 씨앗이 날려온 흑석골’과 같은 소박한 사람의 마을이며 ‘메주 뜨는 소박한 집’이다. ‘메주 뜨는 집’의 소박한 풍경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우리네 과거의 집으로 우리의 무의식의 풍경이다. 사라진 것들을 향한 설정환의 그리운 발걸음 뒤에는 ‘지금 나는 외롭다’는 침묵이 소리 죽이고 있다.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외로움을 깊게 한 것이다. 과거를 향한 그리움의 일방통로는 시의 노선을 평면적이게 하면서도 오히려 과거의 풍경을 부각시키고도 있다.


들짐 한 짐 싣고 툴툴투루 마을로 들어오는 낡은 경운기 소리를

고추꽃 핀 방죽안 고추밭 속에서 듣고 있다가 허리 펴 고추꽃처럼 웃는 당신

고추잎 팔아 새 옷 한 벌 사 오기로 한 장날 장짐들러 마중나갔다가

뒤안 감나무에 마른 감잎처럼 팔랑팔랑 걸어와도 어느새 꼬리치는 당신

―「동전리銅田里」 전문


‘동전리’를 의인화한 위 시는 그 마을 사람들과 그 마을의 집들과 그 마을의 풍경이 하나로 엮여 있다. ‘들짐 한 짐 싣고 마을로 들어오는 낡은 경운기 소리’의 동전리, ‘고추꽃 핀 방죽안 고추밭 속에서 경운기 소리 듣고 허리 펴 고추꽃처럼 웃는 당신’, ‘뒤안 감나무에 마른 감잎처럼 팔랑팔랑 걸어와도 꼬리치는 당신’이 마을 앞으로 나오는 강아지를 각각 지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묘사된 풍경은 모두 ‘동전리’를 통합하는 이미지로 모아진다. 화자는 ‘그립다’고 말하지 않으나, 시는 소박한 ‘동전리’의 삶을 향한 그리움의 언어들로 뭉쳐있다. 특히 ‘장날 장짐들러 마중가는’ 풍경은 오늘날은 찾기 힘든 그리운 과거의 풍경이라는 점이 그 그리운 풍경 뒤에 은폐된 설정환의 깊은 외로움을 대변한다. 

한 때는 있었으나 지금은 부재중인 것들, 더욱이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은 지금 여기 우리 근대인의 외로움을 깊게 하면서 문명적 근대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부재중이고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과거라는 시간으로 묶일 수도, 그 과거가 안고 있는 소박함으로 묶일 수도 있는 문명적 인간인 근대인의 무의식의 정체성인 것이다. 문명의 바벨탑 밑에서 상기해야 하는 근대인의 잃어버린 소박한 근원이며 성의 세계인 것이다. 이를 위한 서규정과 설정환의 발걸음이 쓸쓸한 까닭은 찬란한 문명적 세속이 야기한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EMB00007c540001.jpg1)

크리틱






54개의 등이 켜진 나무의 사원

윤향기|시인


■이지엽 시집,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고요아침, 2010)



금강산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금강송이다. 겉치레의 장식과 표정 그리고 몸체에 남을 수 있는 세월의 옹이마저 들어내 버리고 시선에 방해가 될 만 한 것은 생략해 버린다. 하늘 향해 찌를 듯이 군락을 이룬 천년은 살며 쪼였던 태양빛을 토해 겨울이면 누렇게 떨어지는 나무들의 애도기간을 따뜻이 감싸준다.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숲속에 들어오니 시 68편에 ‘나무’라는 단어가 무려 54번이나 반복된다. 왜 이런 반복이 가능했을까? 나무는 삶의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詩를 살게 하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길을 두고 질감이 풍성하거나, 벼락을 맞거나, 서로 접촉한 적 없되 항시 서로의 흔들림을 견지해주는 장욱진, 김만옥, 운보 김기창 화백, 기생 논개의 결기 높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시골 간이 역사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어룽어룽 눈물짓던 무명도 있다. 그래서 나무의 이야기는 개별자의 논리에서 울림과 전체라는 심리학적 통찰로 건너가 버린다. 나무에 관한 묘사와 진술은 그러나 나무를 덮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주로 자코메티가 가늘고 긴 인체를 빌려 극한적인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형상화한 것처럼, 앙상한 뼈대만을 지닌/저 가늘고 긴 앙상한/실존! 「자코메티를 위하여」 이지엽의 시는 ‘나무가 곧 사람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나는 오늘 보았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이르는 길

 (……)


둘 중에 어느 누가 죽어도

저리 한 몸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

―「벼락나무」 부분


비가시적인 것을 시로 보여주는 시인을 일러 들뢰즈는 힘이 센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너를 갖고 싶다고 고백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평등한 너와 나로 만나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경계를 지우면서까지 타인에게 연민의 눈빛을 쏟아 붓는 이타적 실존, 즉 힘을 다 뺀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 내면에는 가장 위대한 텍스트가 자연이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벼락 맞은 전주향교 대성전 앞뜰 은행나무위에 오동나무 새잎이 나는 것을 보며 이지엽 시인은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이처럼 시의 효용중 하나는 가시성에 덮혀 있는 존재의 일상적 껍질을 벗기고 파헤쳐 정화해나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또한 시적 치유와 초월을 위해 존재의 부조리를 뚫고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읽으며 공적 기억이나 사회문화적 차원의 사유체계로서 자의식 규정, 자의식 구획을 떠 받쳐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바뀌는 찰나의 침묵을 느끼겠다. 존재의 가시성 뒤에 숨어 있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를 떠난 의미론적 완결성을 요청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배롱나무를 통해 드러낸다.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

우듬지 위로 받쳐 올리고

나무들은 혼신으로 몸 바깥에 길을 내면서

여름 한낮은 짱짱해지고 짱짱해져서는

이윽고 보여지는 한 틈으로

시원하게 소나기 한 줄금 뿌리기도 하는 것이니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몸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알면서도

(……)

―「배롱나무 그늘아래」 부분


여기 화폭에 그려진 삶이라는 그림이 있다. 서양 중세미술이 오래도록 음악적 테마를 다뤄왔듯이 위의 시는 장대 같은 소나기 소리가 겹쳐 비비다가 갈라지고 떨어져 내리면서 완성하는 아름다운 생이다. 그러면서 이상화된 모델로 구현되는 배롱나무 그늘을 밀어내고 그 아래 우수수 쏟아진 목숨들이란 과연 완전한 사랑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주체인가 묻고, 또  답한다.

나무에 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졌을 때 가시권에서 사라졌던 나무는 나타난다. 각각의 나무로 홀로 있지만 그의 나무들은 홀로 있지 않다. 사이와 공백, 간격이란 여백을 표표히 지님으로서 격정과 혼돈의 숲을 걸어 나무는 이제 그의 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나무를 닮은 그의 품은 다종한 세계와 거침없는 개진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몸의 경계를 깨끗이 지운 나무의 코나투스conatus는 그의 오래된 미래를 지속적으로 수여받고 실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마음을 닦고 동백나무를 그린다.


1. (……)

2.

동백 숲, 나무 이파리에는

우항리 남쪽 바닷가

백악기 쯤의 큰 새들 울음

바다를 울리고 우주를 울린  큰 울음이

잎잎마다 반짝거린다

저 은백銀白에로의 놀라운 투신

햇살은 잎잎마다 죽어


초록의 생생한 눈짓으로

찬란하게 다시 태어난다

네 앞에 고꾸라지는

지상의 온갖 거짓말들

동백나무 이파리에는 그래서

아이들 해말간 조잘거림이

해종일 떠날 줄을 모른다


3. (……)

―「동백 숲, 동백 꽃」 부분


여수 오동도에 가면 하늘만 보이는 꽃방이 있다. 시누대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이 방에는 파도소리가 손님이다. 그곳에서라면 알몸으로 손님을 맞이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하여  엑스터시에 등이 푸르도록 멍드는 파도소리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이들의 해말간 웃음소리가 해종일 떠날 줄을 모르는 동백 숲의 배경은 백악기쯤의 우주를 울린  큰 새의 울음소리와  지상의 온갖 거짓말을 고꾸라뜨리는 파도소리가 반짝였던 잎잎이다. 궁극을 지향하는 이지엽 시인의 저 은백銀白에로의 고양된 시간이란 역설적으로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시간에 다름 아니며, 동백 숲을 환하게 물들이는 가난한 등불, 그 어린 날의 해말간 詩, 그 뒤에 담긴 정신이다.


(……)

이제 너와 나는 한 그루의 나무라면 좋겠다

산에 물빛,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붉어가는 가을날은

순은純銀의 목풍금 소리로

우리들 마른 잠의 이파리 다 울리고 가는

저 욕심 없는 노을에 물들어

가진 것 없어도 슬프지 않는

나무라면 좋겠다

―「산으로 드는 나무」 부분


이지엽 시인이 여행 중에 사용하는 패스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강송이다. 심상, 전이, 함축과 같은 심리기제에 강박적으로 몰입함으로서 자신의 억압된 고통이나 질풍노도 식 격정과 칼날 같은 바람이 혼재했던 트라우마를 넘어선 것이다. 자기방어기제라는 조망과 옹호의 힘으로 사물과 기억 사이에서 곧게 일어서는 나무, 이지엽시인의 나무 독법이다. 이미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붉어지고 가진 것 없어도 슬프지 않는 나무가 된 것이다. 따라서 평화처럼 눈이 내린 이 숲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의식적 기억을 환기시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동일시되는 그 순간, 누구나 자신의 가슴속에 한그루의 금강송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지하철 편지가 일본인을 구하려다 죽은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씨를 비롯해, 골수 이식 수술을 하다 먼저 세상을 뜬 수연이, 대구 지하철 참사로 세상을 떠난 호룡 씨에게 약혼녀가 보낸 편지 그리고 친구들을 살리고 죽은 유준영 고등학생 등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을 실었던 것처럼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에서도 소외된 자들을 껴안는 나무들의 귀는 슬픔이 닿지 않는 곳으로 기울어 진채 밤새워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