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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윤의섭의 포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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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과 얼
언젠가 앨런 긴즈버그가 방한했을 때 기타를 치면서 시를 읊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무척이나 긴 시였고, 언어는 당연히 영어였는데 그것도 요즘의 랩처럼 빠르게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의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처음엔 그저 미국 시인들은 저렇게 시를 낭송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의 리듬이 귀에 들어오고, 시의 감정이 음의 고저에 따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 듣고 나서는 마치 장구한 서사시의 폭풍이 내 귀를 훑고 지나간 듯한 감동에 흥분되었을 정도였다. 그 강렬한 경험은 곧바로 이런 생각을 낳았다. 아무리 자유시라 하더라도 시는 역시 운율이 있고 리듬이 있으며, 시의 율조에서 오는 감동은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앨런 긴즈버그의 낭송에서도 느꼈지만 음악성이 내재되어 있는 시는 흥을 일으킨다. 분명 좋은 시는 알게 모르게 음악적이다. 누군가는 어떤 시를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교향악이 들렸다고 말한 적도 있다. 좋은 시가 감흥을 불러오고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될 때 시는 노래가 된다.
‘흥얼거리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뜻은 ‘흥에 겨워 계속 입속으로 노래를 부르다’인데 보다 흥미로운 점은 ‘흥얼’이라는 어근이다. 바르트 식으로 되새겨 보면 원래의 의미와는 크게 상관없이 ‘흥’과 ‘얼’로 따로 떼어놓고, 나름의 의미부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흥’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고 ‘얼’은 정신이나 영혼을 뜻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를 흥얼거리게 하는 시는 바로 이 흥겨운 감정으로 영혼을 노래하고 그것을 같이 느끼게 하는 시가 아닐까. 시인의 입장에서 시는 흥겨운 영혼의 감정을 드러내는 노래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시는 영혼이 흥겨워지는 노래이다. 흥얼은 그런 의미이다.
2. 시와 노래
시와 노래와의 학문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밝힐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여기서는 우선 영혼이 흥겨워지는 노래로서의 시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한 편의 시가 절로 노래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막상은 그게 간단치 않다. 다만 나는 시를 쓰기 전에 흥을 북돋는 방법을 한 가지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음악의 종류는 다양하다. 가요, 팝송, 클래식, 국악, 각종 악기 연주 등등. 그 중에서도 나는 팝송을 즐겨 듣는다. 다른 지면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대개 영미권의 노래인 팝송의 가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가사를 해석하며 듣다가는 노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자체가 곤욕이 되어 버린다. 사실 우리는 문명의 발전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저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게 되었다. 노래방에 가서 자막을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가사를 외우지 못하게 되었다. 텔레비전 자막을 따라 읽으면서 우리는 듣기 능력을 상실하였고, 독자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시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팝송 듣기는 가사의 의미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자율성이 있다. 그저 팝송의 리듬과 흥겨움에 귀와 몸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여차하면 팝송의 원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름의 해석과 나름의 상상과 나름의 세계를 꿈꿀 수 있다. 한번 귀에 꽂힌 팝송을 반복해서 듣다 시를 쓰게 되면 시도 그 팝송의 감각과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시에 팝송의 흥겨움이 배어든다.
얼마 전에 가수 게리 무어가 사망하였다. 새삼 그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Still Got The Blues」, 「Parisienne Walkways」, 「Always Gonna Love You」와 같은 노래는 즐거움이나 재미로서의 흥이 아니라 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정을 솟게 하고, 지평선 너머의 아득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것도 흥이다. 우리는 슬픈 일이 있을 때 예상 밖으로 슬픈 노래를 더 찾게 된다. 게리 무어의 노래를 한창 들을 때도 그랬다. 일이 안 풀리고, 앞날이 답답하고, 시가 안 써질 때 오히려 무겁고, 느리고, 둔중한 노래가 어울린다는 역설적인 현상을 카타르시스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그런 우울한 감정을 시에 담아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되고, 그래서 감정이 흥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노래의 음악적 분위기가 시에 스미게 될 때, 노래와 시는 하나가 된다.
버블 시스터즈가 부른 「It's Raining Man」은 신나고 흥겨운 노래이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내려와 할렐루야를 외친다. 중독성이 있는 이 팝송을 들으면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게 되고 기분까지 경쾌해진다. 김왕노 시인의 시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는 이 팝송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시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이처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 든 팝송이 시에 영향을 준 경우가 적지 않다. 김태형 시인의 시집 <로큰롤 헤븐>은 전반적으로 로큰롤 음악이 가져다주는 감성과 강렬한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흔히 로큰롤이라고 하면 찢어질 듯한 고음과 깨질 듯한 비트를 떠올리지만 그런 헤비메탈만이 아니라 블루스가 가미된 진중한 사운드와 음색을 들려주는 노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시에서 팝송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경우는 직접적인 언질이 시에 드러날 때 뿐이다. 장정일의 시 <하숙>에는 비슷한 성향으로 묶일 수 있는 팝송 가수들이 나온다. 시의 분위기도 그들의 노래를 닮았다.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 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차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 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시의 창작과정을 시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시를 쓰는 가운데 어떠한 팝송이 영향을 주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팝송의 영향으로 시에 그 음악의 흥과 감성이 묻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스틴 비버가 부른 「Baby」와 같은 노래는 단조롭지만 귀에 감기는 고운 음색으로 편안해 지는 팝송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와 연결 시키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 OST이기도 한 Israel Kamakawiwo'ole이 부른 「Somewhere Over The Rainbow」는 「What A Wonderful World」를 리믹스한 노래이다. 영화를 보고 이노래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구하기 힘든 앨범을 간신히 샀던 기억이 있다. 하와이 출신인 이 가수는 나이 사십에 요절했는데, 엄청난 비만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음색은 깊이가 있다. 그의 노래는 시에 가깝다. 노래를 듣다보면 영혼이 반응한다. 만약 이 노래를 듣고 그 감성을 담고자 한다면, 어떤 시에든 어울릴 수 있는 그런 팝송이다.
시와 노래의 결합은 흥과 얼의 결합이다. 다만 시는 언어로 채워지므로 언어가 갖는 의미가 노래의 음조와 리듬과 강약과 고저를 대신하려면 시의 행간에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형성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가 전개되는 동안 감정의 파동이 절정으로 치닫고 다시 장중한 결말을 이끌어야 한다. 이쯤 되면 독자도 그 시를 통해 노래를 듣게 된다. 노래처럼 시를 읽게 되고 시의 감정이 리듬을 타고 전달된다. 시에 귀를 기울이면 그 시에 스며든 노래를 들을 수가 있다. 시인의 흥과 얼이 독자의 흥, 얼과 만나는 순간이다.
3. 시로 흥얼거리다
나는 내가 쓴 시를 어떠한 걸림돌이 없이 매끄럽게 읽힐 때 까지 반복해서 읽는 습관이 있다. 그 사이에 시는 다듬어진다. 조사 한 글자라도, 모난 단어 한 마디라도, 뾰족 솟은 문장 한 줄이라도 손을 보고 다시 읽기를 거듭해서 시가 내 입에 딱 달라붙을 때 시가 완성된다. 물론 그런 작업이 잘 되는 때도 있고, 미흡하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잘 다듬어진 시는 그것을 낭송할 때 술술 읽히고 리듬까지 타게 된다. 그것은 시이자 노래이다. 다른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입에 착 달라붙는 시는 한 구절 한 구절 읽는 사이 저절로 외워지고,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시를 읽으면 마치 흥얼거리듯 읽게 된다. 시로 흥얼거린다는 것은 시로 인해 영혼이 흥겨워진다는 것이다. 거창한 교향악의 연주나 빼어난 음정의 노래가 없더라도, 또 시에 음표를 붙이디 않더라도 흥얼거리듯, 콧노래를 부르듯, 리듬을 타는 시, 레너드 코헨의「I'm Your Man」같이 간결하고 편안하면서도 강렬한 시로 흥얼거리기.
궁극적으로 시는 이렇게 흥과 영혼이 만나는 흥얼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시가 세상에 펼쳐져 있으니, 세상을 읊조리면 곧 시가되고, 시를 노래하면 세상을 노래하는 자가 되고, 시를 보면 세상을 듣는 자가 되고, 아름다운 노래 한 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펼치는 가인이 될 것이다.
윤의섭 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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