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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책 크리틱/ 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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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서규정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신생, 2010)
■설정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시와사람, 2010)
소박함을 위한 발걸음
진순애|문학평론가
1. ‘집’에 대한 성찰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과 설정환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진 면은 ‘집’에 대한 성찰이다. 집은 ‘사람, 여자, 마을, 고향, 조국’ 등에 대한 메타포로 우리가 출발한 처소이자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집’에 대한 성찰을 서규정과 설정환이 시의 중심에 두고 있는 까닭은 소박함을 위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인간의 삶은 소박함과 멀어지고 문명적 찬란함과 친밀해졌다. 문명적 인간의 정체성은 소박함을 뒤로 하고 문명적 찬란함을 전면에 내세운 근대성의 한 면모로 뒤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성을 뒤로 하면, 시인의 집은 그 시인이 걷는 발걸음에 따라서 소박함의 메타포로 성聖의 메타포로 문명적 메타포로도 작용하면서 그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의 세계를 내포한다.
서규정의 집에 대한 성찰은 ‘외로운 발걸음’으로 설정환의 집에 대한 성찰은 ‘그리운 발걸음’으로 특화되는데, 양 시인이 지은 외로운 집과 그리운 집은 성과 속의 변주 속에서 문명인의 출발지인 소박함을 꿈꾸면서도 문명적 세속을 포함한다. 문명적 세속은 근대인의 근거지인 까닭이다. 이때 외로움과 그리움은 양성구유와 같아서 외로운 집과 그리운 집은 동일하게 성으로도 속으로도 작용한다. 외로움의 이음동의어가 그리움이며, 그리움의 이음동의어가 외로움인 까닭이다. ‘외로움이 싫다면 그리워하지 말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나, 그리워하는 것은 문명인의 무의식적 작동이자 인간인 우리가 시간의 존재라는 증거이므로,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문명적 인간인 우리의 존재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분리할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동일시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는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은 ‘외로운 대상’에 대한 묘사가 중심을 이루고, 설정환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는 시적 화자가 ‘그리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규정의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은 시적 화자가 ‘외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규정의 발걸음에 포착된 외로운 세상살이가 주된 세계여서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설정환의 주관적인 말하기에 비해 객관적이다. 때문에 설정환의 그리움의 이면은 외로움이나, 서규정의 외로움의 이면은 언제나 그리움은 아니다. 서규정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혹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그리고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각각 작동한다.
2.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 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 보다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탱자나무 여인숙」 전문
세상살이를 외롭게 포착하는 까닭은 시인의 시선이 그와 같이 작동하는 데 있다. ‘쓰러져 누운 폐선이 있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에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의 풍경이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서규정의 시선이 그러한 까닭이며, 그러므로 그의 발걸음이 그와 같은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이르게 된다. ‘탱자나무 여인숙’ 혹은 ‘여인숙’의 유랑의 이미지와 그를 바라보는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결합하여 탄생한 「탱자나무 여인숙」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 보다/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어서”라고 여인숙 안주인의 외로운 내면까지 통찰한다.
‘여인숙’이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외로운 집인 것이 ‘들고 나는 손님이 머무는 곳’이므로 그러하며, ‘들고 나는 손님과 함께하는 안주인’이므로 그러하다. 비록 안주인의 상처가 아니어도 여인숙의 안주인은 ‘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여인숙의 안주인’이므로 외로운 집의 외로운 주인이며, ‘들고 나는 손님’ 또한 집주인이 아니라 ‘머물다 가는 객’이므로 외로운 집의 외로운 객이다. 정체성 형성의 근원지로서 집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외로운 대상들에 동화된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탱자나무 여인숙」을 더욱더 외로운 집으로 짓고 있다.
그러나 외로운 풍경에 결합된 시인의 외로운 발걸음 뒤에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모래 위엔 발자국//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는 그리움이 배어난다. 시적 화자의 그리움이 아니라 여인숙의 안주인의 그리움을 대변하는 화자이나, 양자는 분리되었으면서도 결국 화자의 그리움이 여인숙의 안주인에게 이입된 것이므로 양자의 분리는 분리를 초월한다. ‘탱자나무 여인숙의 안주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서규정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대변하는 소박한 풍경인 것이다.
길거리 군방장수가, 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장한다면
가볍게 바닥을 치는 개그일까요
재벌들이 비자금을 비축해 놓고 수평선처럼 입을 다문 건
광안대교가 털썩 주저앉을 저급한 코미디 아닌가요
아침에 뜬 태양이 정오를 건너 어둠의 숲으로 들기까지
축 쳐진 사람들을 고실고실 말리다 보면
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시퍼렇게 우는 그늘
그러면서도 화려하게, 참기름처럼 반짝이는 눈빛의 기교와
해결이 안 되는 곳에서의 해체의 실마리일까요
물 묻은 손으로 전깃줄을 낚아 채 생 밤톨 같은 눈을
노릿노릿 군밤으로 마저 구워버릴지도 모를
저기 외딴 집
움 하면 열렸다 막 하고 닫히는 움막도 아닙니다
곧 헐릴 남의 집에 좀도둑처럼 든
군밤장수에겐 운신도 못하는 노인과 아이도 있네요, 딸려 있어
―「외딴 집」 전문
「외딴 집」의 외로움은 「탱자나무 여인숙」의 외로움과 격을 달리 한다. ‘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곧 헐릴 남의 집에 좀도둑처럼 든, 운신도 못하는 노인과 아이도 딸려있는 군밤장수’가 머물고 있는 외딴 집의 외로움은 그리움을 은닉한 외로움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 묻은 손으로 전깃줄을 낚아 채 생 밤톨 같은 눈을/노릿노릿 군밤으로 마저 구워버릴지도 모를”, 곧 헐릴 남의 집이자 빈 집인 외딴 집의 풍경은 ‘외딴 집’이 지닌 외로움을 넘어선 고통의 집이다. “아침에 뜬 태양이 정오를 건너 어둠의 숲으로 들기까지/축 쳐진 사람들을 고실고실 말리다 보면/고장 난 생활을 붙들고 시퍼렇게 우는” 사람들이 어둠을 가리는 외딴 집의 풍경은 소박한 삶을 염원하는 상처입은 사람의 집이자 문명의 이기가 남긴 어둠의 풍경이다. 이는 개인적인 외로움을 넘어선 사회적이고 문명적인 외로움이며,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을 멈추도록 유인한 소외된 세상살이인 것이다.
낙서로 담벼락을 빙 둘러친 집, 그 집에 한 사람이 살았네
마치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보다
밀룽밀룽 미농지가 먼지처럼 자욱이 덮여 있는
그 한 장을 차마 넘길 수가 없어
책표지만 읽고 밑줄 한번 그어보지 못했으나
사랑도 혁명도 처음엔 낙서로 시작하듯이
지나간 세월들은 깊은 강물처럼
그 많은 이슬방울을 받아 마셔왔다면
이봐요 이봐 이제 비로소 목이 타
사람이 사람을 쪽쪽 빨아 마셔야할 만큼 하도 목이 말라서
화석으로 굳어진 얼굴 빼고는,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
해바라기처럼 나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네, 그림자로 타오르네
―「빈집」 전문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바닷가의 여인숙’에 이른 서규정의 발걸음도 아니고, ‘곧 헐릴 빈 집인 외딴 집’에 이른 발걸음도 아닌 ‘빈집’은 서규정의 과거의 집, 곧 무의식을 은유한다. ‘빈집’은 외로운 세상살이의 외적 풍경에 다다른 서규정의 발걸음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서규정의 외로운 발걸음이 머문 집이다. 그러므로 ‘탱자나무 여인숙의 안주인’에 이입된 외로움과 그리움과 같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아니라 서규정의 외롭고 그리운 내면 세계 그 자체를 은유하는, 곧 그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빈집’이다.
“낙서로 담벼락을 빙 둘러친 집, 그 집에 한 사람이 살았네”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지나간 세월들은 깊은 강물처럼/그 많은 이슬방울을 받아 마셔왔다”고 과거를 비유한다. 또한 “마치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꺼내보는 것”과 같은 태도로, 그리고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해바라기처럼 나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네, 그림자로 타오르네”와 같은 태도로 묵은 과거를 회상한다. 지금 여기에 서서 ‘뿌리까지가 다 목구멍인 해바라기처럼 그 집 마당을 기웃거리며 그림자’처럼 외로운 그리움을 토하고 있는 서규정의 무의식의 세계를 확인한다. ‘빈집’에 이르러 외로운 발걸음은 더욱더 깊은 외로움이 되며 그리움 또한 그러하다. 소박한 처소로 돌아갈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이 깊은 그리움을 낳고 있다.
3. 설정환의 그리운 발걸음
아귀 맞지 않는
양은 반찬통 같은
흑석골 사람들은
뚜껑을 잘 닫아도
한숨이 김치 국물처럼
새어나오는 사람들끼리
나직나직 모여 산다
은행을 퇴직한 중년의 구두닦이 사내에게
닳은 구구 밑창을 높이 들어 보이며 웃는 사람들
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
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낸다.
―「민들레 씨앗-흑석골 편지·1」 전문
흑석골은 가상의 마을이기도 실제하는 마을이기도 하겠으나, 특히 “은행을 퇴직한 중년의 구두닦이 사내에게/닳은 구구 밑창을 높이 들어 보이며 웃는 사람들//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낸다”는 풍경은 가상의 마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귀 맞지 않는/양은 반찬통 같은/흑석골 사람들은/뚜껑을 잘 닫아도/한숨이 김치 국물처럼/새어나오는 사람들끼리/나직나직 모여 산다”는 풍경은 실제하는 마을인 흑석골로 보이기도 한다.
흑석골이 가상의 마을이건 실제하는 마을이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흑석골 풍경이 쓸쓸한 세상살이의 풍경을 대변한다는 점이며, 그와 같은 쓸쓸한 세상살이의 풍경이 설정환을 외롭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외로운 흑석골에 이른 설정환의 발걸음에도 그리움이 환기되는데, 그것은 “닦을 구두가 없는 날이면 구둣방에 모여 우산을 고쳐/하늘로 쫙 펼쳐보고는 민들레 씨앗을 후후 불어 띄워 보내는” 풍경에 있다. 그것은 외로움을 그리움에 닿게 하여 과거를 환기하는 모티프로 작용하며, 현재는 부재한 그리운 풍경이므로 가상의 풍경이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풍경일 것이나, ‘민들레 씨앗’에 실려보내는 가난한 삶이므로 가상이 아니라 실제했던 소박한 삶의 뒤안이다. 비록 가난했을 지라도 휴머니티가 살아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설정환의 외로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입동立冬 밑 가랑비에
수북수북 은행잎 무너지는
간판 불 꺼진 길을 돌아옵니다
허리 낮은 문패 없는 집에
젖 빨다 잠든 갓난아이의
솜털 같은 숨소리 말갛게 들여다보는
이불솜 같은 불 켜진 창에 대고
문 두드리고 싶습니다
무작정 부르고 싶습니다
나예요!
발이 따뜻한 집이 그립습니다.
―「발이 따뜻한 집」 전문
민들레 씨앗이 가져온 흑석골의 소박한 편지에 대한 그리움처럼 설정환이 그리워하는 집은 ‘발이 따뜻한 집’과 같다. 시는 “입동立冬 밑 가랑비에/수북수북 은행잎 무너지는/간판 불 꺼진 길을 돌아옵니다”라고 외로움을 호소하면서 출발하여, “허리 낮은 문패 없는 집에/젖 빨다 잠든 갓난아이의/솜털 같은 숨소리 말갛게 들여다보는/이불솜 같은 불 켜진 창에 대고/문 두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발이 따뜻한 소박한 집’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외로움이며,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낳은 외로움이다.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외로움을 깊게 하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또한 그리움을 깊게 한다. 비록 깊은 그리움이 시적 은밀성을 약화시키면서 시인의 말을 돌출시키고도 있으나, 그렇다고 소박함을 그리는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메주 뜬 내 가득한
메주 뜨는 집
메주 뜬 내 진해질수록
제 몸을 깨뜨려
고뇌를 삭혀 빚은
묵묵한 청동종 소리는
소리 없는 향香을
댕댕댕 터트린다
가벼워지며 익어가는,
그러다 비로소 소리를 잃어버린
생生을 맛깔나게 하는
청동종은 물기를 다한 인생처럼
뽀얀 아기웃음 가루들을
속으로 속으로 터트린다
―「메주 뜨는 집」 일부
또한 설정환이 그리워하는 집은 ‘발이 따뜻한 소박한 집’이자 ‘민들레 씨앗이 날려온 흑석골’과 같은 소박한 사람의 마을이며 ‘메주 뜨는 소박한 집’이다. ‘메주 뜨는 집’의 소박한 풍경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우리네 과거의 집으로 우리의 무의식의 풍경이다. 사라진 것들을 향한 설정환의 그리운 발걸음 뒤에는 ‘지금 나는 외롭다’는 침묵이 소리 죽이고 있다.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외로움을 깊게 한 것이다. 과거를 향한 그리움의 일방통로는 시의 노선을 평면적이게 하면서도 오히려 과거의 풍경을 부각시키고도 있다.
들짐 한 짐 싣고 툴툴투루 마을로 들어오는 낡은 경운기 소리를
고추꽃 핀 방죽안 고추밭 속에서 듣고 있다가 허리 펴 고추꽃처럼 웃는 당신
고추잎 팔아 새 옷 한 벌 사 오기로 한 장날 장짐들러 마중나갔다가
뒤안 감나무에 마른 감잎처럼 팔랑팔랑 걸어와도 어느새 꼬리치는 당신
―「동전리銅田里」 전문
‘동전리’를 의인화한 위 시는 그 마을 사람들과 그 마을의 집들과 그 마을의 풍경이 하나로 엮여 있다. ‘들짐 한 짐 싣고 마을로 들어오는 낡은 경운기 소리’의 동전리, ‘고추꽃 핀 방죽안 고추밭 속에서 경운기 소리 듣고 허리 펴 고추꽃처럼 웃는 당신’, ‘뒤안 감나무에 마른 감잎처럼 팔랑팔랑 걸어와도 꼬리치는 당신’이 마을 앞으로 나오는 강아지를 각각 지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묘사된 풍경은 모두 ‘동전리’를 통합하는 이미지로 모아진다. 화자는 ‘그립다’고 말하지 않으나, 시는 소박한 ‘동전리’의 삶을 향한 그리움의 언어들로 뭉쳐있다. 특히 ‘장날 장짐들러 마중가는’ 풍경은 오늘날은 찾기 힘든 그리운 과거의 풍경이라는 점이 그 그리운 풍경 뒤에 은폐된 설정환의 깊은 외로움을 대변한다.
한 때는 있었으나 지금은 부재중인 것들, 더욱이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은 지금 여기 우리 근대인의 외로움을 깊게 하면서 문명적 근대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부재중이고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과거라는 시간으로 묶일 수도, 그 과거가 안고 있는 소박함으로 묶일 수도 있는 문명적 인간인 근대인의 무의식의 정체성인 것이다. 문명의 바벨탑 밑에서 상기해야 하는 근대인의 잃어버린 소박한 근원이며 성聖의 세계인 것이다. 이를 위한 서규정과 설정환의 발걸음이 쓸쓸한 까닭은 찬란한 문명적 세속이 야기한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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