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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책 크리틱/ 윤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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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21회 작성일 11-05-2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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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이지엽 시집,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고요아침, 2010)
54개의 등이 켜진 나무의 사원
윤향기|시인




금강산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금강송이다. 겉치레의 장식과 표정 그리고 몸체에 남을 수 있는 세월의 옹이마저 들어내 버리고 시선에 방해가 될 만 한 것은 생략해 버린다. 하늘 향해 찌를 듯이 군락을 이룬 천년은 살며 쪼였던 태양빛을 토해 겨울이면 누렇게 떨어지는 나무들의 애도기간을 따뜻이 감싸준다.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 숲속에 들어오니 시 68편에 ‘나무’라는 단어가 무려 54번이나 반복된다. 왜 이런 반복이 가능했을까? 나무는 삶의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詩를 살게 하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길을 두고 질감이 풍성하거나, 벼락을 맞거나, 서로 접촉한 적 없되 항시 서로의 흔들림을 견지해주는 장욱진, 김만옥, 운보 김기창 화백, 기생 논개의 결기 높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시골 간이 역사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어룽어룽 눈물짓던 무명도 있다. 그래서 나무의 이야기는 개별자의 논리에서 울림과 전체라는 심리학적 통찰로 건너가 버린다. 나무에 관한 묘사와 진술은 그러나 나무를 덮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주로 자코메티가 가늘고 긴 인체를 빌려 극한적인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형상화한 것처럼, 앙상한 뼈대만을 지닌/저 가늘고 긴 앙상한/실존! 「자코메티를 위하여」 이지엽의 시는 ‘나무가 곧 사람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나는 오늘 보았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이르는 길
(……)

둘 중에 어느 누가 죽어도
저리 한 몸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
―「벼락나무」 부분

비가시적인 것을 시로 보여주는 시인을 일러 들뢰즈는 힘이 센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너를 갖고 싶다고 고백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평등한 너와 나로 만나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경계를 지우면서까지 타인에게 연민의 눈빛을 쏟아 붓는 이타적 실존, 즉 힘을 다 뺀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 내면에는 가장 위대한 텍스트가 자연이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벼락 맞은 전주향교 대성전 앞뜰 은행나무위에 오동나무 새잎이 나는 것을 보며 이지엽 시인은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이처럼 시의 효용중 하나는 가시성에 덮혀 있는 존재의 일상적 껍질을 벗기고 파헤쳐 정화해나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또한 시적 치유와 초월을 위해 존재의 부조리를 뚫고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읽으며 공적 기억이나 사회문화적 차원의 사유체계로서 자의식 규정, 자의식 구획을 떠 받쳐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바뀌는 찰나의 침묵을 느끼겠다. 존재의 가시성 뒤에 숨어 있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를 떠난 의미론적 완결성을 요청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배롱나무를 통해 드러낸다.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
우듬지 위로 받쳐 올리고
나무들은 혼신으로 몸 바깥에 길을 내면서
여름 한낮은 짱짱해지고 짱짱해져서는
이윽고 보여지는 한 틈으로
시원하게 소나기 한 줄금 뿌리기도 하는 것이니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몸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알면서도
(……)
―「배롱나무 그늘아래」 부분

여기 화폭에 그려진 삶이라는 그림이 있다. 서양 중세미술이 오래도록 음악적 테마를 다뤄왔듯이 위의 시는 장대 같은 소나기 소리가 겹쳐 비비다가 갈라지고 떨어져 내리면서 완성하는 아름다운 생이다. 그러면서 이상화된 모델로 구현되는 배롱나무 그늘을 밀어내고 그 아래 우수수 쏟아진 목숨들이란 과연 완전한 사랑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주체인가 묻고, 또  답한다.
나무에 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졌을 때 가시권에서 사라졌던 나무는 나타난다. 각각의 나무로 홀로 있지만 그의 나무들은 홀로 있지 않다. 사이와 공백, 간격이란 여백을 표표히 지님으로서 격정과 혼돈의 숲을 걸어 나무는 이제 그의 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나무를 닮은 그의 품은 다종한 세계와 거침없는 개진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몸의 경계를 깨끗이 지운 나무의 코나투스conatus는 그의 오래된 미래를 지속적으로 수여받고 실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마음을 닦고 동백나무를 그린다.

1. (……)
2.
동백 숲, 나무 이파리에는
우항리 남쪽 바닷가
백악기 쯤의 큰 새들 울음
바다를 울리고 우주를 울린  큰 울음이
잎잎마다 반짝거린다
저 은백銀白에로의 놀라운 투신
햇살은 잎잎마다 죽어

초록의 생생한 눈짓으로
찬란하게 다시 태어난다
네 앞에 고꾸라지는
지상의 온갖 거짓말들
동백나무 이파리에는 그래서
아이들 해말간 조잘거림이
해종일 떠날 줄을 모른다

3. (……)
―「동백 숲, 동백 꽃」 부분

여수 오동도에 가면 하늘만 보이는 꽃방이 있다. 시누대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이 방에는 파도소리가 손님이다. 그곳에서라면 알몸으로 손님을 맞이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하여  엑스터시에 등이 푸르도록 멍드는 파도소리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이들의 해말간 웃음소리가 해종일 떠날 줄을 모르는 동백 숲의 배경은 백악기쯤의 우주를 울린  큰 새의 울음소리와  지상의 온갖 거짓말을 고꾸라뜨리는 파도소리가 반짝였던 잎잎이다. 궁극을 지향하는 이지엽 시인의 저 은백銀白에로의 고양된 시간이란 역설적으로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시간에 다름 아니며, 동백 숲을 환하게 물들이는 가난한 등불, 그 어린 날의 해말간 詩, 그 뒤에 담긴 정신이다.

(……)
이제 너와 나는 한 그루의 나무라면 좋겠다
산에 물빛,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붉어가는 가을날은
순은純銀의 목풍금 소리로
우리들 마른 잠의 이파리 다 울리고 가는
저 욕심 없는 노을에 물들어
가진 것 없어도 슬프지 않는
나무라면 좋겠다
―「산으로 드는 나무」 부분

이지엽 시인이 여행 중에 사용하는 패스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강송이다. 심상, 전이, 함축과 같은 심리기제에 강박적으로 몰입함으로서 자신의 억압된 고통이나 질풍노도 식 격정과 칼날 같은 바람이 혼재했던 트라우마를 넘어선 것이다. 자기방어기제라는 조망과 옹호의 힘으로 사물과 기억 사이에서 곧게 일어서는 나무, 이지엽시인의 나무 독법이다. 이미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붉어지고 가진 것 없어도 슬프지 않는 나무가 된 것이다. 따라서 평화처럼 눈이 내린 이 숲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의식적 기억을 환기시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동일시되는 그 순간, 누구나 자신의 가슴속에 한그루의 금강송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지하철 편지>가 일본인을 구하려다 죽은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씨를 비롯해, 골수 이식 수술을 하다 먼저 세상을 뜬 수연이, 대구 지하철 참사로 세상을 떠난 호룡 씨에게 약혼녀가 보낸 편지 그리고 친구들을 살리고 죽은 유준영 고등학생 등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을 실었던 것처럼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에서도 소외된 자들을 껴안는 나무들의 귀는 슬픔이 닿지 않는 곳으로 기울어 진채 밤새워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있다.

윤향기∙1991년 ≪문학예술≫로 시 등단.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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