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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호(봄호)/신작시/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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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저녁밥을 먹는 시간 외 1편
저녁밥상을 차리고 그는 양손에 물과 침묵을 든 채 서 있습니다 식탁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이렇게 밥을 먹으며 밤이 오면 나는 그가 바닥에 흘리는 물처럼 차갑고 굶주립니다 모든 시간을 버리고 단 하나의 요일만 있는 순간에
그는 가장 무거운 자신을 내려놓으려고 해요 천천히 물을 삼키고 그릇을 닦습니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식탁에 기댑니다 골목의 개들이 잔뜩 이빨을 세우며 어슬렁거립니다 굶주릴 때 가장 아름다워지는 법 서슬 퍼렇게 빛나는 입속 그는 울면서 침묵합니다 이 소금기란……
나는 그의 몸을 안고 싶어요 눈물은 신의 어느 한쪽일 것입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내내 걸어왔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죽지 않고 자라기만 하는 날들을 세면서, 마지막 밥상 같은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는 중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공장에서 유리창 같은 것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나는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의 몸을 안고 싶습니다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 두 손 잡고 흔들다 헤어진 사람, 비슷한 이빨을 가지고 어슬렁거리던 사람, 그만 마주쳤음 하는 사람, 그들을 전부 안고 이 세계 밖으로 내던져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투명한 유리창이 되고 싶습니다
개의 푸른 이빨에서 두꺼운 침이 떨어지고…… 그는 침묵까지 내려놓고 사라집니다
소금기 묻은 텅 빈 식탁 모든 것이 굶주릴 때
오래된 연인
너는 불을 꺼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마치 깊은 숲속에서 홀로 사냥을 하는 노인처럼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책장을 문지른다
보이지 않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침대에 누워서 너는 홀로 달린다
그것은 다른 대륙에 있어
아프리카 산족의 말은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웅덩이에서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녀
흘러가지 않고 흙탕물 밑으로 가라앉는 얼굴을
바라보는 한 사내의 이름은 ‘꿈’이라는 뜻을 가졌다
우리는 모두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골목을 걷다가 자꾸만 땅을 보는 습관
산에서 움직이지 않고 소녀를 바라보다 나무가 된 사람
그는 다른 대륙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살과 피를 가지고 공중을 흘러가는 계절풍은
모든 계절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데
우리의 침대는 서로 다른 곳에 놓여 있다
바닥으로 눈을 떨어뜨리며
너는 가장 오래된 문서를 뒤적인다
불을 끈 채
꿈의 얼굴을 만지려다
떨어뜨린 나뭇잎
세 번째 생물이 우리 사이에 누워 있다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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