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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흐름진단소설/이종호/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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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소설|
이 시절의 잉여인간들, 아니 초과인간들
이종호|문학평론가
∙천명관의 「봄, 사자死者의 서書」(≪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
∙최옥정의 「나일라」(≪리토피아≫, 2010년 가을호)
∙배상민의 「유글레나」(≪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
∙박민규의 「끝까지 이럴래?」(≪현대문학≫, 2010년 9월호)
∙김성중의 「버디」(≪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
1. 소설보다 부조리한 현실의 삶, 그 어디쯤에서
2010년 가을과 겨울 그 사이. 지구제국의 귀족집단이 임박한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아시아의 한 변방으로 집결한다. 변방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검은 제복의 ‘공권력’은 지상과 지하 그리고 공중을 누비며 엄중한 치안 상태를 연출한다. 그 집결에 대한 비판적 시위는 물론 토론과 회합은 모두 금지된다. 집결을 찬양하는 벽보를 풍자한 사람들은 ‘음모죄’로 구속되고, 반대 의견을 담은 벽보들은 모두 철거된다. 검은 제복들은 거리의 비루한 삶들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보이지 않는 장소로 추방한다. 오랜 전부터 비밀경찰들은 체류허가를 받지 못한 이주노동자를 색출해 왔으며, 불만을 터뜨리는 민중과 노동자들의 일상을 감시해 왔다. 치안과 체제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일반인들을 제거하고 예방하기 위해 고성능 신무기가 등장하고, 매스미디어는 이 집결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다. 거리는 매끄럽게 봉합되며 청소가 이루어진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렇게 보인다. 균열은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실업자와 부랑자로 전전하고, 노인네들은 새벽부터 고물을 수집하기 위해 지하철과 거리를 떠돈다. 또다시 한 노동자가 파업 중에 분신을 하고, 시인은 시쓰기를 멈추고 거리와 공장에서 그리고 포클레인에 올라가 투사가 된다. 잠재하는 불만과 저항은 계속 증식 중이다.
이쯤 되면 어딘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극적’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성싶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인터넷 포털 메인 뉴스난을 장식하는 이 시절. 현실의 부조리와 극적인 상황은 소설 속의 허구와 대동소이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훌쩍 뛰어 넘기도 한다. 또 한편, 이러한 상황은 낯설게 느껴지기보다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다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목도한 광경일 것이다. 유년 시절 종종 밤을 새워 탐닉했던 SF 소설이나 영화 등이 묘사한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상황과 쉽게 오버랩 된다. 가령 세계정부가 등장하고 위계적인 계급적 분화가 고착화되며, 끊임없는 지배계급의 감시와 통제, 배제와 축출이 이루어진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선행하는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삶이 전개된다는, 이제는 다소 익숙하지만 여전히 ‘소설적인’ 설정 및 전제가 오늘날 ‘현실’의 삶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시절, 소설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하는 시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시 읽어내야 하는 것일까?
2. 불안과 공포는 삶을 잠식한다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종교가 아닌 이상, 죽은 자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필시 삶의 이야기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을 둘러싼 모든 문제는 바로 삶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형식은 곧 삶의 형식을 의미하는 셈이다. 천명관의 「봄, 사자死者의 서書」에 등장하는 ‘사내’가 맞이한 죽음의 형식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가장 적실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이다. 사내의 죽음은 화려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평범한 부고 기사가 아니라 사건․사고를 알리는 텔레비전 뉴스 보도 기사를 통해 세간에 전달된다. 그의 죽음은 여기자의 목소리를 통해 “술에 취한 채 공원에서 잠들었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한 취객”(280)이라는 서술로 규정되며, 그의 삶은 “동사한 오십대 남자는 삼년 전 실직한 이후 가족과 떨어져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해오던 중 변을 당했다는 소식”(280)으로 정리된다. 사내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화려한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여느 보통 사람들처럼 지인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영면한 것도 아니다. 사내의 죽음은 평범하지 않은 그리고 비루한 사고사事故死이다. 그렇다, 만인의 삶이 평등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만인의 평등은 허락되지 않는다. 죽음이 사회화되는 방식은 그 삶의 궤적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이다.
사내는 사고사라는 다소 특별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그 충격과 진동은 텔레비전의 “젊음과 섹시한 육체, 액션히어로와 해피엔딩”(280)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현실과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자들의 사고사는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한다. 이제 그러한 죽음은 아주 익숙한 사건이 되어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그러한 죽음의 진면인 삶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그리고 사내는 “고귀하게 태어난 자”(262)이지만 “죽음의 시간”(28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죽음이 부여하는 자유로움의 크기와 비례하는 삶의 고통과 속박을 상기시킨다. 사내에게 삶이란 “아무리 힘주어 밀어내봐야 단 일밀리미터도 도망칠 수 없는! 매일 되풀이되는 절망과 무기력”(263)으로 점철되어, “고통을 웃음으로 대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264)은 현실이다. 이는 비단 사내 한 개인에게 한정되는 현실이 아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자기 몸무게의 스무 배가 넘는 쇳덩어리를 힘겹게 끌고 가는, 정체도 모르는 공포에 영혼을 빼앗긴, 좀비들의 거대한 행렬!”(272)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실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사내’는 한 개인 인격체에 대한 지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 시절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군집명사인 셈이다).
‘좀비’라는 비유처럼 이들의 의식과 정신은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에 잠식당한다. “사내는 이제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사랑을 믿지도 않는다. 꿈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다. 그저 세상살이에 씹히고 짓밟히고 찢겼을 뿐이다.”(273) 그리하여 “아직 젊은 나이지만 지친 눈빛에선 아무런 열정도 아무런 희망도 읽을 수가 없다.”(272)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지 않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인 시대가 불어넣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삶은 무기력하고 처연하다. 대부분의 사내들(사람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일탈을 꿈꾸지만 그 대열을 벗어나는 순간 닥쳐올 경제적 궁핍과 삶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반복적인 일상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해고통지를 받은 사내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그나마 가까스로 유지되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는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은 또 다른 불안과 공포를 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좀비들의 거대한 행렬에서 벗어나는 일은 영혼이 거세된 육체마저 온전히 보존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더 이상 현실에서 또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사내는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거세하는 좀비가 되거나, 영혼의 자유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택해야 하는 이중구속의 상태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진혼곡인 셈이다.
3. 경계에 선 존재들
최옥정의 「나일라」는 추방과 배제가 작동하는 양식들을 보여준다. 근래 해외입양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를 상기시키기도 하는, 「나일라」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로 입양되어 성장한 한 여성이 다시 한국을 찾는 이야기이다.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가 그 추방의 기원과 원인을 찾기 위해 그 공동체를 다시 돌아온다는 다소 익숙한 서사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30대에 접어든, 외양은 한국인에 가깝고 언어는 미국인에 가까운 이 여성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국에서 부여받은 “K80-1409 오선미”(105)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양부모가 붙인 “나일라Nyla”(105)라는 이름이다. 그녀는 정체성은 시카고 공항과 인천 공항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혹은 ‘오선미’와 ‘나일라’라는 두 이름이 지니는 거리만큼이나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질감, 소외감, 남다름”(118)의 근원을 찾기 위한 이 도정은 “그녀의 성장을 방해한” “그녀의 출생”(118)을 넘어서기 위한 “통과의례”(111)처럼 형상화된다.
단일 인종이 아니라 이주민의 역사로 건설된 미국에서도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몸과 마음을 편하게 누일 공간은 발견되지 않는다. 두드러진 신체적 차이는 입양된 가족집단 내에서도 이질적인 요소이며, 여타 다른 사회집단 내에서도 그녀의 정주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낙인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소외감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3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모국母國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토종 한국인의 얼굴과 이국적인 발음의 부조화”(107)는 동일한 귀속감을 유발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그녀가 그녀의 생모를 만났을 때 신체적․유전적 유사성은 동질감을 부여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는 생모와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녀는 미국인이 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될 수도 없는 경계의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로 형상화된다. 그녀는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존재로, 그리하여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녀가 사회에서 학습한 감각은 “조금 다른 것, 많이 다른 것, 아주 많이 다른 것”(107)을 재빠르게 간파하는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에 기대어 그녀는 30년 내내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 “왜 다른 냄새와 색깔의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잘 때 눈을 뜨는 걸까. 왜 나는 그들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숨 쉴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다른 것을 느끼는 걸까. 왜 나는 100%가 아닌가. 왜 나는 90, 80 때로 50%의 사람처럼 느껴지는가.”(106)라고. 이처럼 차이를 간파해 내는 그녀의 감각은, 차이 그 자체의 특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온전히 만개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준과 척도에 대한 감각으로 포섭된다. 그녀에게 차이는 불충분함의 또 다른 표현이며, 그 기준과 척도는 변화불가능한 절대적 요소로 인식된다. 이 척도에 대한 감각은 외부 세계가 그녀에게 투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녀가 그 외부 세계로부터 주입받은 것이기도 하다.
금발 백인의 미국인과는 다른 피부색과 문화적 감각은 그녀를 가짜 미국인으로 규정하는 요소로 작동하며, 어눌하고 어색한 언어는 그녀를 불충분한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그리하여 그녀를 비롯하여 그녀와 동일한 운명을 짊어진 다른 친구들은 해외 입양 관련 서류철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기원이 된 생모와 생부에게도 그들은 “실패의 인장 같은 존재”(113)들이다.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공간에서는 배제와 차별의 선이 그들을 가로지르며, 기원은 그들을 부정한다.
존재를 척도로 규정하는 세상에서 그 척도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이 택하는 방식은 각각 상이하다. ‘신시아’는 미혼모가 되어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증식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택하고, ‘제레미’는 추방과 배제의 상처에 압도되어 자신을 절멸시킨다. ‘그렉’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영원히 가 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원과 신체적 동질성에 기대는 방식을 선택한다. ‘오선미/나일라’는 “당분간은” “사진처럼 찍어두기만 하고 해석하지”(112) 않음으로써 선택을 유보한다. 그녀는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과잉된 절망이나 섣부른 낙관으로 빠져들지 않고, 현재의 사태를 “괜찮을 거”(119)라고 다독이면서 아마도 30년 내내 그녀에게 부과된 척도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 중일 것이다.
4. 이 시대 청춘송가
배상민의 「유글레나」는 이 시대의 청춘연애보고서이다. 그런데 ‘청춘’과 ‘연애’라는 두 단어에 주목하여 빛나는 낭만적 사랑과 피 끓는 젊음을 기대했다가는 그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을 당할 것이다. ‘무성 생식’을 상징하는 표제가 암시하듯이, 그들의 청춘과 연애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버겁고 외롭다. 고도 성장기를 지나 IMF와 금융위기라는 두 차례의 환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삶에 대한 불안정성뿐이다. 이 파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완전히 뒤흔들었고, 그리하여 그에 기반을 둔 정서와 감정의 염기 배열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던 시절은 끝이 났다. 대학은 선택도 필수도 아니고, 모두가 다 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포스트-고등학교’가 되어 버린 지 오래며, 다만 철저하게 서열화된 신新골품제도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세칭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를 겨우 벗어나 수도권 대학에 겨우 안착한 소설 속의 두 남녀들에게 미래란 그 정해진 코스를 거부하거나 이탈하지 않는 이상,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결정되어 버린 셈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태어나는 순간 그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다 수긍하듯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여자주인공 ‘소라’는 “어학연수는커녕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안에 보태야 하는 처지”(657)고, 남자주인공 ‘나’는 “지방에서 공무원을 하는 아버지를 둔 덕에”(660) 조금 나은 형편이지만 엎어 치나 매치나 매한가지인 상황이다.
이 두 남녀 대학생은 “그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의 회사원”(657)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지만,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혁명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실현하기 어려운 소망이다. 일찍부터 모의면접을 준비하고,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스펙’ 쌓기에 분주한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학생”(658)이 되어보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이 청춘남녀의 연애도 끝이 난다.
더군다나 이 연애라는 것도 “‘현실’이라는 두 글자”(667)가 제시하는 ‘통계’ 앞에서 무력하다. “통계적으로 평균적인 결혼을 하기 위해서”(663), 통계적으로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필요한 평균적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669)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 그리고 ‘유성 생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달콤한 “낭만보다는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663)기지 않으면 안 되는 평범한 현실 앞에서, 낭만적 연애는 사치에 가깝고 선택받은 소수 계층에게나 가능한 옵션이다.
취업과 연애 모두에서 소망(생존을 위한 탈출구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을 이루지 못한 ‘소라’는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대신, 가정에 취업하기 위해 선을 보는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도 끝이 아니다. “직장이 안 잡히니까 불안해서 선택한 결혼”이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또 직장이 필요”(662)한 순환하는 폐쇄 회로 속에서 갈등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회로를 빠져나올 탈출구는 마련되지 않을 듯하다. ‘소라’에게 차인 ‘나’의 삶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속되는 청년 백수의 삶은 그 끝이 보이지 않으며, 그런 현실을 위무하는 것은 고작해야 디지털 포르노그래피 속의 나신裸身 정도이다. 도달 불능점에 가까운 ‘통계적 평균’에 닿기 전에 그 ‘무성 생식’이 멈출 가능성은 요원하다. “연애戀愛하기가 연대連帶하기보다 어렵다”는 이 시절. 소설 속의 두 남녀 주인공들처럼,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취업과 연애가 해결되거나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스펙 쌓기를 강요하는 기업과 사회는 쌓인 스펙이 발휘할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애초부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배제와 추방 속에서 남아도는 ‘잉여’를 어떤 식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장치가 필요했을 뿐이고, 그것을 위해 스펙 쌓기라는 회로가 고안된 것이다. 사회 불만 세력으로 쉽게 변신할 수 ‘잉여’들을 스펙 쌓기라는 회로 속으로 포섭함으로써 그 불만을 잠재운다. 회로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그러한 스펙을 쌓지 못한 개인 자신에 대한 비난과 자학으로 변용된다. 그리하여 잉여를 잉여 그 자체로 머무르게 하는 악성코드에 감염되는 것이다. 반전의 기회는 차단된다.
5. 이 따위로 할 거면 그냥 관두든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152)는 한 철학자의 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민규의 「끝까지 이럴래?」는, “인류의 마지막 날”(146)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인간 집단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다. 내일이 바로 인류 절멸의 날로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아래층과 위층에 거주하는 ‘애덤스’와 ‘에드워드 창’은 층간소음 문제를 둘러싸고 목숨을 내건 신경전을 펼친다. 작가는 인류라는 녀석들이 언제쯤 철이 들까 하는 심정으로 한심스럽다는 시선을 좀처럼 거두지 않는다.
이 소설의 전제는 인류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관한 것이다. 종말예언서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했던 혜성 충돌이 현실화되면서, 인류는 급속도로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달의 1/6 크기의 혜성이 다가오는 가운데, 세계 각국의 정부는 충돌로켓을 발사하여 혜성의 궤도를 수정할 것이라는 둥, 아니면 달이 방패막이가 되거나 지구를 비켜갈 것이라는 둥의 찬란한 거짓말을 늘어놓아 상황을 통제하고 위기를 지연하려고 한다. 허나 혜성의 지구충돌이 기정사실화되면서 혜성은 “레퍼리referee” 즉 심판자로 등장한다. 혜성은 구제불능의 인류를 절멸시키고, 지구의 신체적 변형을 통해 기껏해야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그런 놈들”(160)만 남겨놓겠다는 심산이다.
이러한 설정을 SF적 독법으로만 해석할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얼핏 보면 ‘혜성 충돌’의 비유는 인류멸망이라는 위기의 진원을 외부에 놓음으로써, 그 위기의 성격을 초월적으로 처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숙명, 신이 내리는 처벌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로 그 위기가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혹은 어떤 프로세스가 그렇게 여겨지도록 만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가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얼마간의 고통과 어려움은 감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성 충돌로 상징되는 그 위기는 인류의 역능과는 무관하게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인간에겐 아직” 그 위기를 극복할 “그만한 힘이 없”(147)다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사와 출퇴근…… 고작해야 투표가 전부”(146)인 그런 식으로는 (지금과 같은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전언이다.
혜성이 충돌하기 전에 “인류는 이미 파산했다”(148)는 ‘에드워드 창’의 생각처럼 위기는 차라리 내재적으로 작동한다. 혜성 충돌은 파멸 직전의 인류에게 가하는 확인사살에 지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한 두어 차례 언급될 뿐이지만 오래 전에 발생한 “모기지 파동”(154)은 (인류 종말을 하루 앞 둔 날 층간소음이나 일으켜 분쟁을 일삼는) 작금의 인간말종 ‘애덤스’를 산출한 결정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다. 배관공인 애덤스는 9가구의 작은 아파트를 손수 정성스럽게 녹물이 나오지 않도록 설비하고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어 소유주가 되지만 그 중산층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모기지 파동으로 인해 “돈을 …(중략)… 물론 다 날리고 이 꼴”(155)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젊은 배관공과 그의 아내, 아들과 딸이 환하게 웃”는 “행복한 모습”은 모기지 파동 이전의 “색 바랜 풍경”(156)에 지나지 않는다. 파동이 불러온 파산 선고는 단지 경제적 파산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그리하여 인간성에 대한 완전한 파산 선고를 의미했다. 중산층의 행복한 가장이었던 애덤스는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죽여 거실 시멘트 벽 속에 묻어 버리는 엽기적인 살인자로 변모하고, 자신의 친딸을 성추행하는 파렴치한 아버지로 전락한다.
하늘에서는 종말의 신이 강림하는 가운데 땅에서는 “무분별한 약탈과 폭동이 일상사가 된 지 오래”(147)이다. 소설에서는, 전체 삶의 영역에서 파산한 자들은 그 위기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를 구성하기보다는 파괴와 죽음이라는 악순환적 회로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형상화된다. 그리하여 편재하는 위기 속에서 붕괴한 주권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것은 새로운 생성의 형상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 발목 잡힌 낡은 부패의 형상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파산자들은 비루하고 수동적인 잉여인간에서 낡은 질서로는 도저히 측정 불가능한 초과의 형상으로 전화되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끔직한 악마의 형상에 멈춰 있다. 박민규의 인류에 대한 진단 역시도 딱 그 지점에 멈춰 있다. 그의 냉소는 그 지점에 머물러서는 절멸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내일이 종말인데 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채근(끝까지 이럴래?)처럼 들린다.
5. 척도를 초과하는 측정 불가능한 삶
박민규의 냉소가 던지는 채근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한 걸음을 더 내딛어야 할 듯하다. 김성중의 「버디」는 이 시대의 ‘노인 문제’를 SF적 기법을 통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과 형식 모두 흥미롭다. 소수의 마니아들에 의해 상찬되곤 했던 ‘SF 소설’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히 ‘본격 소설’ 속으로 잠입해 들어왔는데, 이는 단지 장르문학이 지닌 대중성이 문학의 한 영역을 확보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SF 혹은 판타지가 현실 영역에서 더 이상 낯선 것(밑도 끝도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실 세계 자체가 이미 SF적이고 판타지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사족과도 같은 ‘SF론’을 거들먹거리면서 지면을 낭비할 수는 없다. 다시 「버디」로 돌아오자.)
인류 지성의 진전에 따라 인간의 수명 역시도 증가되었는데, 이는 또한 노인 문제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노인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인류사에서 항상 존재해 왔고, 다만 근래 들어 그 수가 늘어나면서 가시적인 문제로 부상한 셈이다. 노인들의 시간은 사회 활동을 하는 여느 다른 세대들의 시간과는 다르다. 일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은 동이 트기 전에 거리와 골목을 오가며 고물을 수집하고, 붐비는 출퇴근 시간을 피해 지하철에 오른다. 그나마 이러한 일도 활동력이 담보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들 가운데 쇠잔해 진 자들은 바깥출입이 쉽지 않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인구주택총조사 등과 같은 서류상에서만 그들의 생존을 입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행정 영역에서는 인간으로 기입되어 있지만, 실제 삶의 영역에서 이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지니지 못한다. 투명인간이 되고 잉여인간이 된다. 노인 범죄나 혹은 노인 비행 문제, 아니면 독거노인의 비참한 삶들이 간혹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아닌 듯하다. 정작 이들이 주목받는 경우는 연금생활 문제와 관련될 때이다. 고령 연금 생활자가 증가하면서 전세계 국가들은 이들을 처치 곤란한 문제 집단으로 인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국무총리라는 작자의 노인 폄하 발언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가와 체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인들은 비생산적인 잉여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은 육체적인 쇠퇴로 인해 여타 다른 세대들에 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버디」에서 도입되는 SF적 장치는 이러한 조건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 지성 혹은 과학․의료 기술의 발달이라는 SF적 장치는 낡은 육체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 넣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역동적인 주체성으로 거듭나게 한다. 근미래, “평균 수명이 백사십에 달하는 이 시대에”(634) “최고의 장비와 인력이 투입될 때 재생되지 않는 세포, 살아나지 않는 환자는 거의 없”(635)는 상황이며, 늙지 않는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이런 삶과 조건이 모든 인간들에게 평등하게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돈과 유전자에 의해” 세분화된 “MG7라고 불리는 의료등급 프로그램”(634)에 따라 차등적으로 제공된다.
‘나’는 이 의료등급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병원의 말단 남성 직원인데,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만신창이로 부서진 채 실려 온 ‘버디’라는 남성을 사랑하게 된다. F등급의 ‘버디’가 제공받을 수 있는 “치료는 최소한의 봉합과 3000씨씨의 수혈”(635)이 전부였고, 사고로 “왼쪽 눈꺼풀을 절반 이상 밀어 올리지 못하”(636)는 후유증이 남게 된다. ‘나’와 ‘버디’는 동거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 다시 “갑작스런 발병 때문에 추락한 상류층 환자”(639) 여성 ‘R’이 들어온다. R은 나를 좋아하고, 나는 버디를 좋아하며, 버디는 R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 사람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처럼 맞물”(637)린다. 기묘한 노인들의 동거가 이루어지고 ‘나’는 MG7의 균열을 해킹하여 생활비를 마련한다(가히 새로운 가족 형태의 탄생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돈만 있으면 이백 년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74세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하고, ‘R’이 새로운 전염병에 감염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신종 전염병이 널리 확산되는 가운데 치료제가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일정한 등급의 젊은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령 인구 조절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부에서는 인위적인 변종 바이러스를 유포함으로써 불필요한 잉여인간 노인들을 제거하고, 제약회사는 독점적인 치료제를 선택적으로 지급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인다. 물론 이 커넥션에 정경유착이 빠지려야 빠질 수가 없다. ‘나’와 ‘버디’는 ‘R’을 살리기 위해 병원을 습격하여 신약을 강탈하고, 관련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에게 차례로 테러를 가한다. 생존과 삶을 연장하기 위한 모방 연쇄테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에서는 “실버 갱이나 노인 테러리스트”(649)가 넘쳐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버디’의 신체에서는 이상이 발견되고, 그는 “투병을 생략하기 위한 자살”(649)을 택하여 생을 마감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죽은 ‘버디’를 보내면서 결정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죽은 버디의 왼쪽 눈은 반쯤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버디의 왼쪽 눈은 열리지 않은 게 아니라, 감기지 않는 것이었다”(650)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관점의 역전은 소설의 복잡다단한 설정과 구성을 한 번에 꿰뚫는 ‘붉은 실’과도 같은 것이다. 사고로 인해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결핍되고 불충분하며 비정상적인 눈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을 때조차 항상 현실을 응시하고 경계하는 초인적인 눈으로 새롭게 의미화 된다. 이와 같은 관점의 역전은 매우 급진적인 정치성을 담아내는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잉여인간의 ‘잉여’는 관점의 역전을 통해 사회의 일반적인 척도로는 측정 불가능한 ‘초과’의 문제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성의 위치는 완전히 역전된다. 바로 그 때 ‘초과’는 비상한 창조적인 힘으로 간주되며, 낡은 질서를 위협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출하는 존재론적 힘으로 재구성된다. 바야흐로 ‘잉여인간’이 ‘초과인간’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순간, 새로운 정치와 삶이 열리는 결정의 시간이 도래한다.
이종호∙<연구공간 L> 연구회원으로 활동하며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를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공저) 등이 있다.
|흐름․진단/시|
허위의식과 문학, 그리고 문학(주의)
장이지|시인
∙박소란, 「아현동 블루스」(≪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진은영, 「멸치의 아이러니」 부분(≪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나희덕, 「조롱의 문제」(≪문학과사회≫, 2010년 가을호)
∙정진규, 「율려집·11」(≪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고은, 「철」(≪세계의문학≫, 2010년 가을호)
1. 머리말
‘문학’하면 독일문학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에는 헤르만 헤세가 꽤 널리 읽혔는데, 문학소년·소녀치고 '수레바퀴 밑에서'를 안 읽은 사람은 드물었다. 그 시기의 문학청년들은 저마다 인생을 진지한 눈으로 관조하려고 했고 종교와 같은 열도로 문학에 매달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학 문학동아리에는 흔히 폐인과도 같은 몰골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쳐가면서 문학을 하겠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좀 한심한 선배들도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사회에 발을 내딛을 무렵 전향하다시피 문학과 절연하거나 신춘문예 같은 데 계속 떨어지면서 문학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더러는 무슨 순교자처럼 자신의 비재非才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문학의 길을 걷겠노라 하는 치들도 있었다. 그런 치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허위의식이 못 마땅해서 문학보다 인생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지만, 요즘 들어 그런 허위의식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더 이상 문학이 인생보다 중요하다거나 인생 자체가 문학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시를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일 년에 얼마씩이나 버는지 시집 한 권에 인세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할뿐 시와 인생, 소설과 인간을 결부시켜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문학을 ‘소비’하고 있다는 식인데, 이제 문학청년은 일부 작가들밖에 남지 않은 천연기념물쯤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문학이 술을 마시고 깽판을 칠 수 없는 시대, 문학이 폼을 잡을 수 없는 시대인데, 여전히 문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문득 김민정의 “시 쓴답시고”(「피해라는 이름의 해피」)가 생각난다.
2. 문학의 유령, 조숙성과 스테레오타입
≪창작과비평≫ 가을호 시란詩欄은 신인특집으로 꾸며졌다. 최정진, 박준, 민구, 김승일, 박시하, 주하림, 박소란 등 신예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이 이미 신인의 티를 벗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민구, 김승일 등은 이미 특유의 어조를 확립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쩌면 이는 그들의 언어에 우리가 벌써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창작과비평≫ 신인특집에서 가장 좋은 시를 꼽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가령 박소란의 「아현동 블루스」는 한편으로 시대에 맞지 않게 촌스러우면서도 그 주제가 쇄말적인 데 치우치지 않은 작품으로 읽을 만했다. 박소란은 왜 이렇게 촌스러운가. 왜 촌스러움을 밀고 나가는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우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나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벌
쇼윈도우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박소란, 「아현동 블루스」(≪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아현동 블루스」는 허위의식으로서의 문학에 대해 노래한 시로 여겨진다. 시적 자아는 자신도 한번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자칫 ‘비련의’에 방점을 찍어 잘못 읽을 수도 있는데, 시적 자아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영화’에 있다.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역시 ‘주목 받는 삶’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현동 블루스」는 ‘비련의’와 ‘영화’를 의도적으로 도착함으로써 이야기를 풀어간다. 시적 자아는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가고 싶다고 “거짓말처럼” 고백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박소란은 ‘거짓말’로서의 문학, ‘영화’에의 욕망을 감추고 ‘비련의’에 방점을 찍는 방식으로서의 허위의식에 가 닿는다. 시적 자아는 ‘아현동’으로 시작하는, 그러나 결국은 허위의식으로 귀착하게 될 시를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현동’으로 시작하는 시는 결코 시작되지 못 하리라고 덧붙인다. 박소란은 문학이 왜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바로 그 지점에서 발설하고 있다. 문학이 불가능한 지점으로서의 도시는 원천적으로 욕망이 두색된, 따라서 ‘비련의’가 ‘영화’로 이어질 수 없는 세계임이 시 쓰기의 불가능성으로 표현된 것이다. 시 쓰기가 불가능한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노래한 시가 쓰여지고 있는 형국이거니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의 문학이란 무엇이겠는가 하는 난처한 물음이 박소란에게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아현동 블루스」에서 박소란은 그것을 ‘혼령’이라고 답해 놓고 있다. 치사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쇼윈도 너머의 세계를 질시하면서 우두커니 서 있는 ‘혼령’의 이미지는 문학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여전히 문학이기를 고집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시’의 난처한 현주소를 대변해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장지구’라든지 ‘오천련’이라든지 하는 코드는 어쩐지 1981년생인 박소란으로서는 다소 노숙한 느낌이지 않나 하는 불만도 있다. 그런 시대 코드는 학습에 의해 개입된 것일까. ‘아현동’을 호명하는 방식도 안현미나 그 윗세대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거니와, 박소란의 직유 편향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너무 무난하게 시상을 엮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모로 박소란의 시는 조숙하면서도 스테레오타입이 된 감이 있으나, 지나치게 세련된 여타의 신인들과는 변별되는 고집이 있어 보인다는 데에서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시였다.
3. 결여에 대한 욕망, 부재를 견디는 정신주의
욕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욕망이며, 그 ‘무엇’은 항상 주체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다. 문학이 일종의 허위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 허위의식은 결여나 부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없는 것을 향한 욕망을 통어할 수 없는 의식의 한 양태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 자체가 이 결여에 대한 욕망이기에, 주체가 그 욕망과 합접合接하는가 이접離接하는가로 문학 작품을 분석할 수 있다고까지 그레마스 기호학에서는 설파되지만, 그만큼 ‘결여에 대한 욕망’이 ‘문학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소란이 “90년대식 비련의 신부”를 꿈꾸며 시를 써왔듯이 진은영도 ‘멸치 반찬’(「멸치의 아이러니」)으로 표상되는 생활의식과 미적 감각의 괴리 속에서 고민을 거듭해왔다. 생활의식을 배반한 문학이 어머니의 “멸치도 안 먹는 년”이라는 핀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허위의식으로 떨어지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의식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미적 감각이 요청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진은영은 별다른 수사적 장치의 도움 없이 일상적 진술의 형태로 드러낸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 달 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 닿을 수 없다는 반찬칸을 뛰어넘어 언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고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진은영, 「멸치의 아이러니」 부분(≪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지난계절 진은영의 시를 두 편 보았는데, '우리는 매일매일'(2008)의 팬시적인 양상과는 사뭇 다른 편향이 눈에 띄었다. 「그 머나먼」(≪현대문학≫ 9월호)과 「멸치의 아이러니」는 모두 자신의 실존과는 동떨어진 것에 대한, 혹은 결여된 것에 대한 욕망에서 문학의 근원을 탐색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세계는 가령 ‘모슬린 잠옷’ ‘우기의 사바나’ ‘소금기린’(「아름답다」), ‘검게 탄 빵’ ‘자줏빛 날개’(「바람의 노래」), ‘노란 양털담요’ ‘검은 물방울무늬 원피스’(「네가 소년이었을 때」) 등 약간은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목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그것이 진은영의 한 개성이고 매력이었다면, 「그 머나먼」의 “너의 노래가 좋았다/멀리 있으니까”와 같은 진술의 세계를 경유하여 「멸치의 아이러니」의 변설辨說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과감한 행보로 비치는 면이 있다.
물론 「멸치의 아이러니」에 펼쳐진 세계관이 진은영의 시 세계에서 전혀 낯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각’의 세계를 압도하는 생활의식이 더욱 솔직하게, 날것으로 표출되어 있다고 이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본연의 계급의식과 나중에 얻은 계급의식 간의 갈등은 진은영 자신의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시의 ‘아이러니’는 ‘진정성’이 묻어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지난계절 보여준 진은영의 행보를 '우리는 매일매일'의 감각적인 세계에 포개어 보고 싶은 욕심은 버릴 수 없는데, 「멸치의 아이러니」가 진은영에게는 최상의 길도, 결코 쉬운 길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 아는 것이 아니고 진은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면, 문학(시)이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녀는 바로 이 질문에 직면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니와, 이 질문 이후 그녀가 어떻게 더 성숙해져갈 것인지 그 귀추를 기대하게 한다.
박소란에게 ‘오천련’적인 것, 진은영에게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 혹은 ‘멸치’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이 문학에의 동력으로서 기능을 했다면, 그런 스노비즘적인 것에 대한 경계를 문학에의 동력으로 삼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가령 「수레의 용도」(≪문학과사회≫, 가을호)의 나희덕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의 적당히 따뜻한 사연으로 시를 만드는 일에 대한 나희덕의 경계는 사뭇 철저하다. 그것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교활함, 그 삶의 간지奸智를 가만히 지켜보는 그녀의 시선을 더욱 내밀하게 한다. 그녀는 있어야 할 세계로서의 동화보다는 실체적 현실을 깊이 있게 읽어내려고 한다. 걷지 못하는 노모를 수레에 태우고 구걸을 하며 돌아다니는 소년의 비밀을, 사실 노모는 걸을 수 있다는 그 비밀을 독자들이 알았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배신감이 아니라 그 간지로 더욱 똘똘 뭉쳐진 모자간의 애정에 대한 동정과 모자에 대한 공모의 심정일 것이다. 「수레의 용도」는 그 동정과 공모의 심정을 언외언의 여백으로 밀어둠으로써 실체적 현실에 한발짝 다가선 작품이거니와, 이 철저성의 이면에 놓여 있는 난경이 「조롱의 문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망 사이의 공기 함량이 너무 적었다
조롱의 문제는 무거움보다 조밀함에 있었다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두른 조롱은
새의 눈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동안 조금씩 녹슬어갔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조롱은 녹슨 방주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새가 가진 것은 조롱 속의 허공,
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소리를 흘려보내
조롱 안과 밖의 공기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다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었다
물론 조롱에게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조롱 밖의 권한이었다
물과 모이를 갈아주는 손은
이내 문을 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닫힌 문으로 절망은 더 잘 들어왔지만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들을 견디게 했다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희덕, 「조롱의 문제」(≪문학과사회≫, 2010년 가을호)
「조롱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오래된 수틀」('어두워진다는 것', 2001)로부터 이어져 온 주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틀’이나 ‘조롱’이 하나의 세계라면 이 두 편의 시에서는 세계 바깥의 초월적인 ‘손’이 전제되고 있다. 수를 놓다가 사라진 손, 조롱의 문을 여닫고 물과 모이를 주는, 그러나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손은 시적 자아가 속해 있는 세계 바깥에서 시적 자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들 시는 하이데거의 「횔덜린과 시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수틀’이나 ‘조롱’을 ‘문학(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그 ‘문학(시)’ 안에 시인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조롱의 문제」는 어떤 신성神性의 부재 속에서 “궁핍한 시대”를 겪어야 하는 존재의 수난을 노래한 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롱의 문제」의 중요성은 「오래된 수틀」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조롱의 문제」에서 ‘새의 눈’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조롱’은 녹슬어간다. 그것은 ‘수繡’가 미완의 상태로 방치되었던 「오래된 수틀」의 문제보다 일층 심각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조롱’으로 대변되는 문학이 더 이상 ‘방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더 쉽게 말해서 문학(시)이 더 이상 시인에게 삶의 의미나 위로가 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것이거니와, 문학(‘조롱’)에서 도망칠 수도 없이 ‘절망’을 견디는 일만이 뒤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난경은 이 시에 쓰인 환유를 거슬러 추적하면 ‘가늘고 촘촘한 정신’ 혹은 ‘조밀한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더욱 근원적으로는 절대적 존재의 부재가 ‘조롱의 문제’를 낳았겠으나 그 문제는 「오래된 수틀」의 시기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그 정신주의적 철저성이 자아내는 부담감이 ‘공기’를 더 희박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시)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으로 둘러싸인 삶이 참으로 지난하다는 것을 새삼 「조롱의 문제」에서 읽는다.
4. 노래가 된 문학(주의), 자연이 된 문학(주의)
문학으로 둘러싸인 삶의 지난함은 아마도 거의 모든 작가가 경험하는 것일 터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야 오히려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세계를 향해 감관을 열어두어야 하고 원고지 앞에서 언제나 외롭게 앉아 있어야 하는 삶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지난함 중에 어떤 것은 소위 ‘문학을 한다’ 하는 허위의식을 떨쳐낸 다음에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회의 속에서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문학을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문학이 오르는 물가를 잡을 수 없고 양질의 직장을 새롭게 창출하지도 못한다는 자괴감은 작가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 일평생 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 문학의 맨얼굴을 못 본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 반半의 의문도 있는 것이다.
문학(시)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노래’로 되는 경우도 있을까. 그렇게 심상하고도 평온한 마음가짐으로도 문학(시)은 가능한 것일까. 혹은 ‘문학으로 둘러싸인 삶’과 같은 것이 아니라 문학 그 자체가 삶이 되는 경우도 있을까. 그런 삶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문학의 종교(경지)’는 문학주의적 신념을 관철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정진규나 고은의 경우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봄직도 하다.
모든 것엔 반드시 別種이 있다 모든 책엔 異本이 있다 烈女春香守節歌도 이본異本이 있다 눈물마저 눈물의 이본異本이 있다 그렇다 눈물의 女帝,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은 별종의 눈물 흘릴 수 있는 淚腺을 지니고 있다 공기는 세상을 언제나 한꺼번에 껴안아 멍든 살들로 푸른 살들로 온통 살찌고 있다고 일찍이 내가 내린 청승살에 대한 定義를 청승살에도 異本이 있다고 붉은 연필로 보완 수정하면서 전혀 무관한 듯하지만 내가 정의한 <단번의 마무리>에 대해서도 다시 할 말이 달리 떠올랐다 모든 완성의 순간은 번개다 몸이다 절대 틈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들어보시게나 멍들의 결, 공기의 골짜기로 흐르는 꽃 피워낸 흔적들을 보았다 꽃 피워낸 힘, 멍들을 보았다 마무리는 단번에 둥글게 찍는 새까만 점만이 아니다 그냥 단번이 아니다 우려냄의 끝에서 발효의 끝에서 단번에 결을 내는 단번의 길, 그런 단번이다 넘치는 술항아리들 속에서 익은 술들이 또록또록 눈을 뜨고 있었다 괴고 있었다 그럴 때 단번에 떠내라는 뜻이다 모든 것엔 別種이 있어 실로 다행이다 사람의 異本인 나도 다행이다 단번이 아니어서 여기까지 왔다
―정진규, 「율려집·11」(≪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정진규는 무엇을 말해도 이미 노래가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가령 「율려집·11」에서 「열녀춘향수절가」를 끌어오는 능란함이라든지, 거기에 ‘눈물의 이본異本’을 슬쩍 가져다부치는 의뭉스러움은 언어의 결을 다스리는 시장詩匠의 솜씨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청승살’이라든지 ‘단번의 마무리’에 대한 재귀적 언어인데, 이와 같은 재귀적 언어들은 한편으로 이 시와 정진규의 다른 시들을 지형학적으로 이어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기 문학세계를 수정·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비결을 설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번의 마무리’라는 기존의 시론을 ‘우려냄 끝’의 ‘단번’이라는 식으로 상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진규가 말하는 ‘발효’나 ‘우려냄’이란 짐작컨대 원래의 시상으로부터의 거리를 말하는 듯하다. 그것만으로는 역시 설명이 부족할 듯한데, 그 거리는 시인 당자가 삶을 겪어낸 그 세월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좋은 시란, 좋은 단번의 마무리란 재기才氣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율려집」 연작 전체가 이 삶의 묘리를 깨우치는 장면들의 연쇄라고 한다면, 이 인간사의 깨우침이 문학 속에서의 깨우침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진규는 이 ‘발효’와 ‘우려냄’을 통해 과거의 생각들을 되짚어보고 수정하거나 보완하면서 현명해지는, 다시 말해 문학 속에서 현명해지는 그 과정을 노래했던 셈이다. 무엇을 말해도 도道에 어긋남이 없다는 유가儒家의 경지가 이 현명함을 무기로 하는 시의 경지에 비길 수 있을까.
정진규의 ‘단번’은 고은의 「철」에서도 볼 수 있다. 정진규의 능란함에 대해, 고은의 파격을 맞세워도 재미있는 구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치 떨리는 연두였느니라 밤에는 늘 소쩍새 혼령이었느니라
연초록
진초록이었느니라
다 큰 제 자식 찾아다 놓고
뻐꾸기 에미나이 천년만년 울어 옜느니라
저녁 이르게
귀뚜리 귀뚜리 씨 뿌려 대며 지새워 울어 옜느니라
그러므로 가을이 우르르 와
온통 단풍 산천이었느니라
저 아줌씨하고
저 아줌씨 만삭의 배 속 아기하고
단둘이서 느런히 내다보는 단풍 산천이었느니라
눈 퍼붓는 날 난산으로 태어난 아기 새된 첫 울음 사품져 울어 옜느니라
이상以上
―고은, 「철」(≪세계의문학≫, 2010년 가을호)
「철」은 제목대로 계절에 관한 노래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연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계절의 변전에 인간의 삶을 겹쳐보게 하고 있는 작품이다. 흔히 역사history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고은은 자연을 여자들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뻐꾸기 에미나이’나 ‘아줌씨’의 사연이 계절의 변전과 맞물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 여성들의 기구한 팔자에 대해 시는 아무것도 발설하고 있지 않지만, 여성들의 울음이나 그 “느런히 내다보는” 시선을 통해 그 삶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특히 제3연의 인간사에 대비되는 원색의 산천은 어떤 숭고함마저 불러일으킨다.
「철」은 기존의 계절의 변전에 관한 시들이 밟아온 ‘순환’의 주제에서 조금은 빗겨나 있다. 이 시는 겨울의 ‘난산難産’으로 끝을 맺는다. 사계 중에서 겨울은 순환의 한 주기를 완성하면서 식물신화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계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난산 끝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로 겨울을 짝지어 놓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에 삶이 한 겹 더 겹치게 되면서 또 한 주기의 계절이 시작되리라는 점에서 ‘순환’의 의미가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순환’ 그 자체가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하려는 속내가 이 시에서는 엿보인다. 가령 이 시의 마지막 “이상以上”이라는 일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상”이야말로 어떤 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갈처럼 여겨진다. ‘-느니라’투와 이 “이상”이라는 일성은 이 시 전체를 불가佛家의 화두 같은 것으로 만드는 느낌이 있다. 그러면서도 미당 서정주식式의 윤회담이라든지 희랍신화의 식물신화가 지닌 부활과 반복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의 일회성과 후대로 이어져 지속되는 생명의 면면함이 부각되는 효과가 그 “이상”이라는 마지막 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읽었다. 그 일회성과 생명의 면면함을 깨닫는 것이 곧 ‘철’이 든다는 것의 함의인지도 모르겠거니와, 그 “이상”이라는 일갈에서 이상하게 떳떳함과 당당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일까.
5. 노벨문학상에 대한 단상:결론을 대신하여
우리 시간으로 지난 10월 7일 늦은 여덟 시에 201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발표되었다. 올해의 수상자는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였다. 우리나라 작가의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도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만인보'의 중량감이나 시인 당자가 살아온 삶의 내력이 노벨문학상 감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역시 언어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들렀는데, 거기에는 발 빠르게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이 별도의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고은의 작품집들도 몇 권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것도 노벨문학상 수상 불발에 대한 아쉬움이나 허탈감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겠지 하는 마음 한편으로는 노벨문학상이라는 것이 전 세계 작가와 독자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되기보다는 왠지 출판자본가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도 따라왔다.
문학(시)이 불가능한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작가들은 결여와 부재와 씨름하면서 문학을 일평생 종교로 떠받들고 살아가는데, 독자들은 과연 작가들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의 규모가 세계적 수준이라는 것이 노벨문학상이 나올 수 있는 충분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말들을 하지만 책이 몇 권 팔리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학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문득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2007), 편저 '이수복 시 전집'(2009)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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