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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책크리틱/ 김익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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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치, '왕인의 수염'(연인, 2010)
■고은산, '말이 은도금되다'(리토피아, 2010)
연금술 형제들의 서약과 화금석으로 탄생한 백제의 기억
김 익 균|문학평론가
시집을 펼칠 때 독자가 처음 접하는 글은 ‘자서自序’ 혹은 ‘시인의 말’일 것이다. 자칫 의례적인 말일 거라는 짐작으로 그 대목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겠지만 웬걸 ‘시인의 말’을 읽는 맛은 제법 쏠쏠하다. 시인들은 시집을 낼 때마다 자기만의 심경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때로는 ‘시인의 말’이 개성적인 한 편의 ‘시’ 혹은 ‘시론’으로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집을 펼치는 독자의 긴장을 허물어뜨리는 ‘말’의 여유야말로 개성이라는 성문을 슬쩍 열어보이는 묘미를 느끼게 한다. 그런 시인의 여유에 힘입어 상상으로나마 시인을 대면할 수 있게 될 때의 반가움은 크다. 문효치 시인의 '왕인의 수염'과 고은산 시인의 '말이 은도금되다'에서 ‘시인의 말’ 은 대기실에서 연단에 올라갈 준비를 하는 연사를 만나는 실감을 준다. 스쳐지나는 만남에서 텍스트의 비밀을 간취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왕인의 수염'의 「자서自序」를 읽으며 ‘노숙해지지 않는 노시인의 원숙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거나 '말이 은도금되다'의 「시인의 말」에서 독자와의 소통을 갈망하는 시인의 첫 마음의 청신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시를 잘 모른다.
정말 시는 어렵다, 그런데도 싫지는 않다. 이러면서 오십 년
시에 매달려 왔다. 또다시 시집을 준비한다.
괴롭지만 또한 즐거운 것이 이 작업이다.
―「自序」 부분, '왕인의 수염'
첫시집을 내게 되어 가슴이 설레인다.
시가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시인으로써
때로는 사유하고, 고뇌하며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쉰다”와 같은 시를
많이 써 보고 싶다.
―「시인의 말」 부분, '말이 은도금되다'
시적 여정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는 신인의 설레임과 평생을 매달려도 알 수 없는 시작의 비밀에 다가가고 싶은 원로‘다운’ 열의, 이 모두가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나온다. 시인이란 결국 한 권의 시집을 묶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1.
시인이라면 누구나 언어의 연금술적 비밀에 다다르려는 욕망에서 비롯한 ‘첫’시집을 갖게 될 것이다. 고은산의 '말이 은도금되다'는 그러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연금술 형제들의 서약’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근대의 시란 인류가 간직해온 연금술의 꿈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금술은 세속적 가치를 위해 금을 제련하는 것은 아닌바 연금술의 ‘위대한 작업’에 대해 에밀 졸라는 “냄새나는 흙을 일구며, 기쁨에 차 자신의 주위를 바라보고, 열매를 따고, 보석과 분수의 무지갯빛 광채와 인간의 살빛의 아름다움을 명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금술의 기술과 지혜의 비밀은 방만한 자와 슬퍼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지런한 손을 찬양하며 느낄 수 있는 능력’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금술사는 혼돈 속에 놓인 물질을 포착하여 그것을 정화시키고 되살려 ‘정신’이 배어들 수 있도록 한다. 그 물질을 형성했던 다양한 성질들을 분리하고 분배하고 활용한 후, 새로이 조화로운 전체 속에 결합시키고, 물질을 화금석으로 바꾸는 완벽한 정신성의 부여를 통해 재창조는 이루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연금술사들의 실험과 사색에 대한 어떤 입문을 보여 주며 파리 노트르담의 그 빅토르 위고에게도 연금술의 역사는 면면히 흔적을 남겼지만 과학 만능주의가 숱하게 선언되던 19세기 이래 연금술은 특히 시인들의 비전秘傳이 되어 왔다. 베를렌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라르메는 자기 시에 대한 야망을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내 젊은 시절의 산문과 시행들의 단편들과는 별도로……, 나는 항상 명작의 용광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누군가가 옛날의 자기의 가구와 자기 지붕의 대들보들을 불태우는 것처럼, 모든 자만심과 만족감을 연금술에 바칠 각오로 연금술사의 인내를 가지고서, 다른 것을 꿈꾸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랭보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언어의 연금술’이란 표제 아래 다음과 같이 쓰지 않는가.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발명했다! 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파랗고, U는 푸르다. 나는 각 자음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다 다다를 수 있는 시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 나는 번역을 보류했다.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나는 아무도 피하지 못하는 행복에/대해 경이적인 연구를 해왔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 랭보에게서 ‘삶의 변화’, 자기 자신의 풍요로움 속에서 인간을 회복시키는 유추를 받아 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있었다. 이처럼 근대의 시 쓰기는 16세기의 박학한 연금술사들의 특권적 행위와 다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표제시 「말이 은도금되다」에서 “말”은 “정의의 갈기를 거머쥔, 옹색한 철학”에 의해 “잉걸”로 타오르고 마주 선 “표적”에게 “단검”이 되어 날아가 꽂힌다. 이러한 감정, 생각이 어떻게 물질로 변환되는 것인지 그 연금술의 비밀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영육 분리를 단숨에 뛰어넘은, 영육이 하나로 융합된 우로보노스 뱀이 표상하는 연금술적 상상력은 감정과 생각에서 입자를 가진 하나의 물질을 본다. 분노의 감정 입자에 생각의 입자를 입혀 은도금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연금술의 비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는 건 불을 보듯 환한 사실이 아닌가.
연꽃 같은 말에 사내 심장은 안단테로 춤춘다. 심장 속 빛나는 눈빛은 선善의 등짝을 토닥거린다. 감정으로 금박金箔 테두리를 친 노여움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수억 광년 빛나는 별빛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지는 감각, 출렁임 사이를 그의 감정이 지난다. 감정의 틈은 공기보다 촘촘하다. 감정의 틈 사이를 그의 생각 입자가 헤집는다. 입자에 은도금을 한다. 생각의 입자 덩어리가 말이다. 말이 은도금된다.
―「말이 은도금되다」 일부
위 시에서 보듯이 고은산 시인의 시 정신은 육체를 입고 있다. 백인덕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고은산 시인은 ‘몸’을 생각을 담는 ‘그릇’이거나, 생각이 빚어지는 ‘제조 공장’ 등으로 생각하지 않고, ‘몸’ 자체로부터 ‘생각’이 발아發芽, 생장生長, 소멸消滅하는 과정에 시적 애정을 기울인다.” 이러한 특성이 연금술 실험실의 부지런한 손과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온 현대시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은 크게 강조되어도 좋다.
이런 실험실의 현황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말이 은도금되다'의 서시를 보자.
심장 끝 울음 이파리,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처럼 빽빽하게 가슴팍에 움트고 있었네. 무럭무럭 자라 목젖까지 다가와 성대 결절이 되었네. 치밀한 울음의 엽록소, 분노의 외피外皮, 화끈화끈 광합성을 하였네. 철럼철럼 울음통이 목젖 적셨네. 결절된 성대로 울먹였네. 들쑥날쑥 분노의 몸빛이 변했네. 분노는 울음 속 출렁이는 강물이었네. 바짝바짝 마르는 바닥에 울음이 비어 갔네. 텅 빈 바닥에 꽃이 피었네. 꽃이 흐드러진 강물에 쪽빛 심장이 파닥거렸네. 결절된 성대는 꾀꼬리처럼 울렸네.
분노를 꽃이라 부른다면 꽃이 될 수 있을까.
―「분노, 꽃이 될 수 있을까」 전문
연금술사는 물질에 정신을 부여하는 실험실의 작업을 신성에 닿는 기도로서 행하는 사람들이다. 고은산의 서시에 새겨진 이러한 ‘기도’를 읽으면 “근면한 이마 위에 연금술이 새겨놓은 주름살의 평화”(랭보)를 찬미하게 된다. 삶의 연금술을 발견하는 고은산 시인은 “궁창 아래 수돗가, 주물럭주물럭, 닥지닥지 때가 붙은 메리야스 빠는 아내”의 “이마의 주름 사이”에서 어김없이 금을 캐내고 있다. 그것은 연금술사의 노력이 구현된 완성품, 물질화된 ‘정신’인 화금석일 것이다.
이마의 주름 사이, 한 줄기 은바람이 마알갛게 지난다. 옆을 힐끗 보니 맨드라미꽃이 쳐다본다. 아, 단침이 고인다. 움쭉 돋은 별 속에서 볕뉘처럼, 솟대 같은 남편 생각, 빨래하는 사이, 금빛 사발 속에 머무는.
―「만정滿廷」 부분
짧은 지면에 고은산 시인의 연금술적 상상력이 캐낸 ‘금’의 시적 가치를 정위해 보았다. 이미 계획된 분량이 넘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고은산 시인의 ‘말’을 존중하여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쉰다」 전문을 소개한다.
피라미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햇살을 품고 있습니다.
물 밑 자갈들은 청아한 물길의
갈 곳을 묻고 또 묻습니다.
어린 아이가 고기를 잡으려고
물 안으로 손을 넣습니다.
반바지에 하얀 종아리, 물빛보다
반짝이는 시간을 검정고무신에 담습니다.
시냇가 버드나무는 오랜 세월 얼마나
물장난을 쳤는지 밑동이 검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버드나무 아래로는 조용한 피라미 안식처가
난장입니다.
아, 잡았다.
맑은 절집 같은 시냇가의 고막을 터트립니다.
뛰는 마음을 낚아 챈 그의 손에 숨바꼭질 놀이하며
뛰어 노는 어린이의 몸짓이 파닥거립니다.
시냇가는 태초부터 정결했습니다.
거기에 엄마젖을 뗀지 5년이 지난 어린 아이가
풍덩거립니다.
거짓말 한 번 하지 않은 피라미는 태생부터
시냇물에서만 자라왔습니다.
그는 검정고무신 속에 오늘을 담습니다.
검정고무신 한 짝이 더 검게 빛납니다.
풍덩거림은 청색 심장의 울렁임입니다.
시냇가의 허파가 파랗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2.
고은산의 '말이 은도금되다'에서 우리는 ‘시인조합’의 명부에 새겨지는 첫 마음의 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떤 증인도 필요치 않은, 그 스스로 그 자신을 증언하는, 시력 50년이 가까운 문효치 시인의 시집 '왕인의 수염'을 앞에 두고 있다.
문효치 시인은 1966년 서울신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1976년 첫 시집 '연기 속에 서서'를 시작으로 '무령왕의 나무새'(1983),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1988), '백제 가는 길'(1991), '바다의 문'(1993), '선유도를 바라보며'(1997), '남내리 엽서'(2001)를 상재한다. 2004년에는 두 권의 시선집 '동백꽃 속으로 보이네'와 '백제시집'을 내놓고 불과 2년 전에 '계백의 칼'(2008)을 출간하여 변함없는 현역시인임을 증명했다.
시인이 첫 시집 '연기 속에 서서'에서부터 '계백의 칼'에 이르기까지 10여 권의 시집을 통해 끊임없이 그 흔적을 찾아 헤매던 백제라는 화두를 2010년 '왕인의 수염'은 제 1장의 “백제시” 연작으로 이어나간다. 시집은 2장 ‘남내리’, 3장 ‘그곳, 그 사람’, 4장 ‘손톱에 대하여’, 5장 ‘끈’ 총 5장으로 그 전모를 드러낸다.
'왕인의 수염'에서 ‘백제’란 시인이 평생에 걸쳐 기도로서 행한 연금술이 산출한 화금석이라고 말해도 좋다. 백제는 민족적 기억의 장소로서 일정한 존재태를 갖지만 물질적 장소는 아닌바 그곳이 시 속에서 과연 어떤 장소인지 묻는 일은 문효치 시인의 실존적 삶을 묻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문효치 시인은 한국전쟁이 남긴 비극적인 가계사로 인해 고통 받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죽음의 공포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을 시 쓰기의 힘으로 살아낸바 그때 시인이 만난 화두가 백제였다. 이미 사라진, 역사적 의미마저도 희미해진 민족적 기억의 애달픈 장소를 표상하는 백제가 시인의 시적 의식 속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 자신의 실존적 삶도 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극소수의 승자와 나머지 대다수를 희생자로 만든 분단, 그 분단 세대인 시인의 역사적 상상력이 지난한 세월 대한민국 정통성의 변방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를 정신적 가치로 건져 올린 것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문효치 시인은 그러한 표상을 시 속에서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삶을 정당화하는 상징 투쟁에서 삶을 건져냈다고 해도 좋다.
붓끝에서 노을 풀려나온다
성덕의 수염을 그리고 흘러내려
옷자락 적신다
먼 우주의 변방에서 방황하다 화석으로 굳어진 그리움
그리움이 참다가 참다가
몸을 뒤튼다
태자의 칼이 화답하듯 신음한다
천오백 년 전 멈추어진 바람이
치마 끝에 다시 일렁인다
―「백제시-아좌태자의 붓」
천오백 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화가 아좌태자가 그린 성덕왕자의 초상화를 대상으로 하는 위 시는 ‘백제’의 예술혼과 그 문화를 일본에 전수했던 수많은 백제인의 숨결을 포착한다. 시인의 마음은 아좌태자의 붓 끝에 맺힌다. 시인의 마음-아좌 태자의 붓은 “천오백 년 전 멈추어진 바람이” “다시 일렁”이게 한다. 시인이 있는 그곳은 어디든 시인이 갈망하던 시적 공간, 백제로 되살아난다. 아래의 시를 보라.
현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떨고 있다
떨림 위에 황혼이 얹히고
몸부림이 올 때마다 섬광이 보였다
섬광 사이로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이 잠시 펄럭였다
울안에 서 있는 감나무에
붉은 감도 익고 있었다
장광의 장항아리
메주가 삭아 구린내를 풍기고
저녁연기도 잠시 보였다
음계의 허름한 계단으로
현해탄의 물결이 올라왔다
후딱 지나가는 섬광 사이로
*구다라고도: 일본에 전해진 백제의 현악기 공후箜篌의 일본이름.
―「백제시-구다라고도百濟琴*」
시인은 구다라고도의 현 위에서 떨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본다. 그 새는 마음의 손길로 애잔하게 구다라고도를 연주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시인의 연주에 의해 한 섬광이 일자 그 섬광 속에서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울 안에” “붉은 감”이 익어가는 공간이 현현한다. “장광의 장항아리/메주가 삭아 구린내를 풍기고/저녁 연기도 잠시보”이는 그곳을 시인은 “음계”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백제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순간적인 결합을 통해 현현한다. ‘구다라’가 본래 ‘큰 나라’라는 의미의 백제어를 내장하고 있어 섬광처럼 ‘큰 나라 백제’를 산출하는 연금술적 촉매가 되듯이 그러한 기억의 장소를 풍부하게 포착하고 펼쳐내는 일을 기도하듯이 구현해온 문효치 시인의 시집은 연금술사의 실험실일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대상을 백제라는 기억의 장소로 포착하고 발현해내는 시적 발상법은 백제시 연작에 국한되지 않는 문효치 시 전반을 설명하는 특성일 것이다. 문효치 시인은 백제를 좇아간다기보다 자신의 시적 지향점의 표상으로 백제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범상한 사물이 번쩍하는 섬광 속에서 백제의 치맛자락으로 펄럭이는, 이러한 이미지의 현현은 백제시에서만이 아니라 문효치 시 전반에 두루 노정되고 있다. 일관된 시작 방법을 드러내는 「농악」 연작을 보라.
고무신 코 끝에/한 사내의 유년이/앉아 있다
―「농악1」 일부
고무신 코끝에서/뻐꾸기 울음소리 흘러내린다
―「농악2」 일부
고무신 코끝이/눈물로 반짝인다
―「농악3」 일부
고무신 코끝에서/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농악4 일부
이처럼 고무신 코끝에서 숱하게 현현하는 ‘유년’, ‘뻐꾸기 울음소리’, ‘눈물’, ‘나비’ 등은 시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현현하는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래는 「남내리 엽서」 연작의 한 편이다.
우리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증조할아버지 내외분이 계셔서
우리는 늘 거기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위엄어린 기침소리로
우리의 혼몽한 나태를 질타하시고
밤이면 그림자 길게 늘여
추위를 덮어주었습니다.
지도에도 없는 이름 없는 산이지만
볼 때마다
높아지는 산이었습니다.
―「남내리 엽서-대봉산②」 전문
시인이 「젊은 날의 초상」에서 자술하는바 가계사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피부로 느끼던 시절 “죽음의 공포를 덜”게 해준 백제는 위의 시에서 시인을 지켜주고 규율하던 “높아지는 산”으로서의 “증조할아버지 내외분”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시인이 일상적 대상에서 정신적인 존재를 산출해내는 시적 방법론은 백제라는 표상에 갇히지 않고 두루 펼쳐져 시인의 유년과 가족사, 남내리라는 공간, 윤동주나 목월 같은 시인 그리고 자신의 손톱 위에까지 막힘없이 스며든다. 이러한 일관된 방법론은 오랜 세월 동안 시인의 시정신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섬광처럼 현현하는 ‘정신적인 것’의 표상은 이제 세월과 함께 시인의 “살 속에 들어와” 있다. 이마에 새겨지는 주름처럼 시인의 고유한 육체성을 얻게 되는 ‘백제’의 새로운 면모를 ‘춘향’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시인의 “육신을 적셔 오시는” 춘향의 향기는 신생의 아픔이자 사랑의 기쁨이며 “그 밝음으로 욱신거리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세계를 열어낸다. 영화 '일포스티노'에서 사랑에 빠진 순박한 청년의 “아파요, 몹시 아파요. 그렇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 하는 순결한 외침에 다름 아닌 「나의 춘향」의 전문을 읽어보자.
내 살에 내려
향기로운 육신을 적셔 오시는
외로운 살 속에 들어와
불꽃으로 날개를 단 나비가 되어
그 밝음으로 욱신거리는
아픔인 듯 새큼한 간지러움인 듯
들쑤셔 부대끼는 쾌감인 듯
그대 나의 춘향이 되어
내 살 속에 잠든 하늘
어디쯤에 그네를 매달아
구을러 굴러 나르고 있나니
살의 끝에
그리움으로 반짝이며 서 있는 영혼에 이르러
흔들고 있나니
그동안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던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의 펄럭임은 이제 시인의 살 속으로 파고드는 춘향의 육체성에 도달하고 있다. 새로운 시적 세계를 발견해 나가는 영원한 신인 문효치 시인의 “괴롭지만 또한 즐거운” “이 작업”(「自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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