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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최광임/ 책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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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8회 작성일 11-05-25 14:02

본문

|책冊․크리틱|


■하두자 시집 <불안에게 들키다>(리토피아, 2010)
■이해리 시집, <감잎에 쓰다>(시와사람, 2010)


불안과 안개 사이의 삶
최광임|시인

길을 걷던 중 몇 잎의 낙엽이 후두둑 내 앞으로 떨어지듯 늦가을 그녀들이 내게로 왔다. 나는 많은 시집들 중 나와 인연이 된 하두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불안에게 들키다>와 이해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감잎에 쓰다>와 며칠을 함께 산다.
나는 지금 가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낙엽 몇 잎이 하필 내 발부리에 떨어지듯 내가 다가가지 않았음에도 가을이 내게로 와 깊어졌기 때문이다. 하여 막무가내의 가을 앞에 속수무책인 나는 그녀들의 시 또한 물끄러미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다. 되도록 느낌 중심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왜, 깊은 가을이므로. 그래서 내가 시 읽기를 다 마치고 독자에게 갈 때에는 이미 겨울이 와 있을 것이므로. 조곤이 둘러앉아 그녀들에게서 들은 불안과 안개에 대한 겨울밤의 이야기꽃을 위하여.


불안, 그 경쾌한 사랑! 하두자의 <불안에게 들키다>
하두자의 시집 <불안에게 들키다>를 읽으면서 나는 마치 스카이콩콩을 타거나 덤블링을 하고 있는 것처럼 경쾌한 언어에 중독된다. 그녀의 문장은 시종일관 경쾌하고 화려하다. 그녀의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화려한 꽃들이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나 온 느낌이다. 정원사가 지정해 놓은 일정한 곳에 무리지어 생의 터를 이룬 꽃무더기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쓸쓸하다. 가을이 내게 깊숙이 들어와 있는 탓만은 아닐 터이다.
문장의 성찬으로 가득 차려놓은 꽃밭이어서 더욱 쓸쓸하다는 것이 맞는 느낌이겠다. 처음 시선이 꽃밭에 머물다 꽃무더기로 옮겨가고 꽃송이로 그 다음은 꽃잎 하나하나에게로 그렇게 꽃의 생식기관인 중심에 시선을 옮겨가 보자. 세상의 햇빛과 바람과 비가 야생의 들판에만 다녀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정원사의 정원에도 세상의 햇빛과 바람과 비는 다녀갔을 것이며 그것들이 다녀가는 사이 꽃잎이 짓무르거나 바싹 야위거나 뿌리 채 동티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삶이 아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하두자의 삶에 관한 문장은 화려하면서도 난해하다. 쉽사리 속내를 알 수 없다. 마치 꽃잎이 켜켜이 꽃술을 감싸고 있어 그 꽃이 자웅동체인지 암술인지 수술인지 분간키 어려운 정황과 흡사하다.

오후가 되면 그림자는 나를 끌고 어둠의 빗장을 닫는다 그림자는 비명처럼 또렷한 등 햇살을 즐긴다 몇 개의 풍경이 인화된다 나는 어둠속을 걸어 나온다 빛들이 덜컹거린다 뒤따라오던 하루는 몸을 삼키고 젖은 발을 말리던 계단 밑으로 그림자가 달라붙는다 언제나 마주하는 그림자는 보도블록을 밟고 또박또박 건너간다 태양을 등진 미라가 될 때까지 끝내 나를 놓지 않는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방을 열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생, 한 번쯤 순서를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피라미드의 방 · 1」 후반부

위의 시에서도 여타의 정황만 있을 따름이다.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 그녀의 문장들은 자신의 외피 혹은 내면을 가만히 응시한다. ‘나’와 그림자의 관계는 어둠과 태양을 매개로 하여 하나가 되기도 하고 분리가 되기도 한다. 정황상으로 보아 ‘나’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미라가 될 때까지 나를 놓지 않는다” 나는 급기야 “한 번쯤 순서를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주문인지 자문인지 모를 의문을 만들지만 ‘나’가 바꾸고 싶은 것 또한 “닥지닥지 붙어 있는 방”인지 생의 그 무엇인지 가늠키 어렵다. 다만 “한 때는 건반 위를 뛰어다녔어 간질거리는 봄날처럼”이란 전반부 시의 첫 행으로 보아 ‘생의 어느 한 때’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다시 “높은음자리표가 튀어올랐다 미끄러졌어 긴 겨울이 음계를 끌고 아우성쳤어”라는 시의 전반부를 통해, 그 생의 한 때가 바로 햇빛과 바람과 비 중 어느 것 하나에 사단이 난 꽃밭의 어느 한 때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하두자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데 하나 같이 꽃잎의 위장술 같은 문장에 가려 꽃의 중심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하두자가 즐겨 사용하는 환유換喩적 문장이 장점으로 작용하나 반대로 지나친 수사적 문장으로 인해 자칫 시적 의미가 환유歡游적으로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 예를 보자 “불꽃들은 별꽃으로 번뜩이고 몰살한 햇살 잔광이 끌려가고 어지러운 발자국들 경찰과 전경들을 에워싸고 인파 사이로 한낮 파문이지고 나이테가 그냥 무너져 내리고 우루루 몰려가는 붉은 깃발.”(「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나, “늑대 혓바닥같이 늘어진 섬을 떠올렸네 툭툭 끊어지는 수평선에 밑줄을 긋고 연필로 덧칠했던 기억을 생각하네”(「욕지도」)와 같은 이러한 예들은 시 「다시 13월, 그가 있었네」, 「거울놀이」, 「내 입 속의 꼬리지느러미」 등 외에도 다수가 포함된다.
이는 달리 말해 하두자 시집의 말미에 있는 시들을 통해 감지할 수 있듯 앞서 말한 햇빛과 바람과 비에 잎이 야위거나 짓무르고 혹은 동티가 나는 과정이나 결과에 천착한 직관적 사유를 환유적으로 환기하기보다 시적 수사에 더 치중함으로써 애써 생의 한 기록으로부터 가벼워지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아닌가, 라고 읽힐 정도로 수사적 문장에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필 비단보를 위해
실타래를 날줄과 씨줄에 걸었던 것처럼
말 아니, 기호를
단단한 문장이라고 걸어 놓았네
새롭다는 것이 언어의 유희라고 느꼈는지
거미는 혓바닥으로
한 입씩 바닥으로 뱉아버리네

날렵한 말들과 함께 거미줄에서
뛰어내리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벽으로 기어오르는
엉겨 붙은 문장들이/대체 무슨 뜻인지

자주 공포를 느끼네 그러나 나는
그 빛나는 눈망울을 길게 바라보고 싶네“
―「기호, 흘러보내기」 부분

내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힘들고 아프다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발버둥이다
연초록 형용사로 피어날 수가 없다고
격렬하게 출렁인다
내 목을 짓누르는 감성의 풀뿌리들은
내 가슴의 지도 위에서
목마름에 길을 잃어버렸다
언저리를 돌면서, 말이 향기가 되질 않는
말과 말의 토씨들 사이, 눌려
뼈와 살이 아프다
횡성수설 늘어놓는 헛소리를 향해
천천히 천천히 방아쇠를 당긴다
탕!
탕!
탕!
―「나를 겨낭한다」 전문

위의 시들은 하두자의 전반에 걸친 시들과 달리 쉽사리 의미가 감지된다. 위의 「나를 겨낭한다」는 시집 맨 마지막에 편집된 시이다. 이로보아 하두자의 시적 의도와 시삶의 알리바이가 포착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왜, 앞서도 말했듯이 햇빛과 바람과 비에 휘둘리지 않은 꽃밭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 장황한 삶의 편린들은 너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그저 수많은 꽃밭 중의 한 꽃밭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쏟아지는 그 붉은 모래가/캄캄한 벽을 타고 내리는 밤”(「불안에게 들키다」)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 모두는 ‘불안’과 가까워지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꿈꾸면서도 사랑을 기만하고, 「중독」을 경계하며 사는 존재들이므로.

안개, 그 구체적 사유! 이해리의 <감잎에 쓰다>
비가시적인 정신이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삶이 관념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도되어 가치를 상실할 것인가 아니면 그로써 또 다른 가치를 양산할 것인가. 생각만이라도 참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원칙적으로 이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모반하고 터부시하는 것들과만 함께 하려는 시대 적응의 부진아 같은 존재들인지 모른다. 아니 몽상가란 말이 더 적절하다. 시인이 시인다운 것은 바로 스스로를 부진아 혹은 몽상가라 자칭하는 어눌함과 때로는 그 어눌함 때문에 고뇌하는 일일 것이다.

시 쓰는 내가 좋았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했다
재벌가의 딸인 친구가
호화저택과 희귀보석을 자랑할 때
나는 속으로 내 가냘픈 시심을 자랑하였다
꿀리지 않았다
화려한 물질의 취득보다
소박한 정신활동의 소산인 시작이
더 우위일 거란 내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물신의 위용 앞에
어쩔 수 없이 내 시작의
초라함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
―「시인의 말」 부분

이해리 시인의 자서에 눈이 멈춘다. 읽으며 시삶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껄끄럽기도 하다. ‘자랑’, ‘우위’ 등과 같은 자위성 만족 때문일까. 때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뱉어냄으로써 초라해지는 결과를 빚을 때가 있다. 금세 “어쩔 수 없이 내 시작의/ 초라함을 발견”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 않은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지 않은가.
그렇게 뻔한 그러나 결코 뻔하지 않은 이해리의 시삶을 따라가 보자.
  
진부하지만 벌나비와 꽃의 유희는 섹스의 은유가 틀림없네 수북히 떨어진 제 꽃잎 딛고 선 벚나무 가지 끝 새로 핀 꽃에 드는 벌 봐라 꽃 속에 머리 디밀고 여섯 발 오그려 향기 궁글리다 뒤엉켜 입술 애무하는 뒤엉벌 함 봐라 연분홍 꽃송이 파르르 몸을 떨 때 꽃가루 흐뭇하게 덮어쓴 뒤엉벌 단물 빨아먹고 어느새 닝닝닝 다른 꽃으로 날아간다 벌의 뒷발질에 한들거리는 꽃 뒤도 안보고 날아가는 뒤엉벌 봐라 사랑은 움직이는 게 맞을까 이 꽃 저 꽃 이리저리 바람 타는 벌의 날개 좀 봐라 무슨 기중기가 저 발목 들어앉힐까 무슨 접착제가 저 바람기 붙여 놓을까.
―「사랑은 움직이는 게 맞을까」 전문

이해리 시인은 세상살이의 소소한 대상들에게서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들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자칫 시적 표현의 진부함을 면치 못할 위험요소를 안고 있기도 하지만 사물에 대한 직관의 깊이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여 대상과 사유가 만나 소소한 그녀의 시삶을 꾸린다. 멀리 보지도 않는다. 하늘, 구름, 바람, 자유, 희망 등 지금, 여기 있지 않은 먼 것들은 이해리의 시선 밖에 있다.
위의 시 또한 ‘사랑’을 생각하고 ‘벌 나비와 꽃’을 생각한 것이 아닐 터이다. ‘벌 나비와 꽃’ 그것들의 행위를 바라보다 ‘움직이는 사랑’을 생각했을 터이다. 이는 별것 아닌 듯하지만 큰 의미를 지닌다. 즉 간단한 사유의 전복으로 시적 의미 부여가 달라질 수 있겠기 때문이다. 바로 대상의 구체화를 통해 안정적이고 구체적인 문장을 이룸으로써 시적 의미에 천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쓰여진 시에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사랑이 어떻게 움직이니?”라고 묻는 이들에게 이 시 한 편을 읽게 한다면 넉넉한 유대감이 형성될 것이라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직관의 깊이는 다음 시에도 잘 나타난다. “퍼들퍼들 벌어지는 잎들,/부둥켜안고 묶으면서 알았다/배추 한 포기도 안아야 묶여준다는 걸, 묶여야/속을 채워 오롯한 배추가 된다는 걸/안는다는 건 마음을 준다는 것/마음도 건성 말고 진정을 줘야한다는 걸”(「배추를 안으면서」)이나 “두부 썰다보면 칼이/제 무력함을 손끝에 전해준다/단단한 금강석도 마음껏 내려칠 수 있던 서슬이/물렁 두부의 흰 침묵에 맥을 못 추겠다 힘을 뺀다”(「두부의 힘」) 등 삶의 일상을 통해서 세상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는 이해리의 시작 과정이 담보하고 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의 첫 문장을 일상적으로 진술함으로써 각성이나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매개로 삼고 있는 탓이다. “밥공기에 반찬종지가 들어가 빠지지 않는다”(「그릇」), “한밤중 조심스레 나와 영화모임 간다”(「게이샤의 추억」), “쉬즈 쉬는 무선전기 주전자/스위치 넣으면 금방 쉬쉬 끓는다”(「쉬즈 쉬」), “원추리꽃을 꺾어 유리병에 꽂았다”(「기다림」), “배추 한 트럭 실려간다”(「비밀」) 등 직관적 사유를 담고 있는 시들은 모두 구체적인 일상의 시적 대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해리의 시는 진정성이 미덕이다. 시에서 진정성의 역할이 뭐 그리 대단한가, 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으나, 진정성을 담보로 하는 시는 그만큼 울림을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쉬즈 쉬는 무선전기 주전자
스위치 넣으면 금방 쉬쉬 끓는다
검지손가락 입에 대고 숨죽이며 쉬쉬,
뚜껑이 덜 닫혀도 전원이 안 들어오지만
한 번 열 받으면 전원이 끊겨도 쉬쉬 끓는다
끓으려면 화끈하게 끓어야
구름 위로 올라가든지
폭죽 터지듯 속 시원한 절정에 가보지
아랫도리 설설 끓는데 쉬쉬,
입은 다물어야 하는 여자
시시하게 끓는 그 굴욕적인 이름을
쉬즈 쉬라고 지은 자가 누굴까
아직도 그렇게 사는 여자가 있나
섭씨 100도쯤 권태를 끓이는 시간
향긋한 커피 한 잔의 욕망도 자동장치 아래
마음대로 끓을 수 없게 제조된 여자
줄도 없는 게 열정만 많아
이미 맞춰진 생의 초점을 불안해 한다
그 여자의 생 너무 오래 안전에만 맞춰지는 동안
꿈도 욕망도 다 식어
미적지근한 맹물이 되어가고 있다.
―「쉬즈 쉬she's she」 전문

뭐니뭐니 해도 시의 맛은 공감에서 오는 감동일 것이다. 그 감동이 지극히 흔한 생의 찬미이든 슬픔의 미학이든 또는 아이러니를 통한 역설이든, 언어유희든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데 있다. 이해리의 시선에 닿는 모든 것들은 시적 대상이 되고 곧이어 의미를 부여받은 시는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위의 시 또한 그렇다. 자칫 무심하게 넘기고 말 세간 하나에서 여성 혹은 시적 자아의 삶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쉬쉬’가 갖는 어감과 동음이의어의 의미작용이 “그 여자의 생 너무 오래 안전에만 맞춰지는 동안/꿈도 욕망도 다 식어/미적지근한 맹물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시적 자아의 반추내지는 각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호화저택’과 견주던 시인의 ‘가냘픈 시심’과 ‘자랑’거리를 떠올려 봐야 한다. 바로 일상에 안주하지 않는 이해리 시인의 각성의지를 엿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인은 끊임없이 안정된 현실을 전복시킬 모반을 꿈꾸어야 하는 것이다. 애시당초 호화저택과 희귀보석 따위와 이해리 시인의 시삶을 비교하지 않았어야 한다. 내가 껄끄럽게 여겼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냥 시인으로서 충분하다.
왜? 시인은 현실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몽상가이므로. 도무지 삶이란 안개 속 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탓이기에. 그렇기에 안정된 현실 따윈 권태의 근원이며 “안아도 안아도 실감이 없는 사람”(「안개를 안아 보다」) 같은, 형체가 있으나 마음이 닿지 않는, 그래서 생래적 외로움을 앓게 한다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자위도 필요없이 시인은 그저 시인으로 족하다. 귀하다.

최광입∙전북 부안 변산 출생.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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