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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서영인/ 책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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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한수영 소설집, '플루토의 지붕'(문학동네, 2010)
■임철우 소설집,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지성사, 2010)
사라지는 것들은 이야기를 남긴다
서영인|문학평론가
1.
‘플루토’는 ‘명왕성’,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다. 행성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고 있는 명왕성처럼 ‘천왕시 해왕구 명왕 3동’은 “환태평양 시대의 비전을 담은 공원” 건설계획에 의거, 곧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란 ‘별어곡別於谷’, 경제성이 낮은 철도 노선이 우선적으로 폐지되면서 곧 사라지게 될 정선의 작은 역 이름이다. 크고 화려하고 빠르고 강한 것들에 밀려 사라져 가는, 작고 소박하고 느리고 약한 것들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약하고 힘없는 것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가진 당연한 권리이고 자격이라고 힘껏 외치고 주장하는 일, 힘없고 외로운 자들이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다. 그러나 또한 오랫동안 이 작은 목소리들은 군홧발이거나 포크레인의 삽날이거나, 크고 강하고 무지막지한 것들에게 짓밟히거나 떠밀리며 사라져 갔다. 하여 울고 외치고 싸우는 일 말고, 조용조용 다른 말들이 들려온다. 작고 약한 것들이, 그들만이 가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고통과 부끄러움과 바람을 때로 들뜬 목소리로 때로 비통하고 힘겹게 내어 놓는다. 그것은 밀리고 지워지고 사라질 그들의 마을, 그들의 추억에 바치는 그들만의 존재증명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이야기가 남았다. 그런데 이 외롭고 가난한 마을에서 이야기는 힘인가 독인가.
2.
'플루토의 지붕'의 화자는 필리핀에서 온 엄마를 둔 ‘민수’이며, 그가 지붕 위에서 혹은 골목길에서 청진기로 주워 온 이야기가 이 소설을 꾸려 나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육체를 이루는 것은 ‘명왕 3동’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문이며 이야기다. 그러나 실상은 신성설비의 ‘녹두장군’이 술에 취하면 들려주는 그의 전생, 혹은 과거의 경험담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신성설비의 녹두장군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하다. 봉두난발의 외모 때문에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해마다 첫눈이 올 무렵부터 이듬해 봄까지 집에 틀어박혀 긴긴 잠을 잔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란 3백년 동안 이야기에 취해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을 찾아 헤맨 내력이다. 자칭 3백살로, 겨울잠을 자는 인물의 이야기이니 그것이 실제의 일인지, 전생의 일인지, 아니면 정신분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찾아 헤맨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가. 지상에는 없을 것 같은 걱정도 고통도 없는 행복한 꿈과 같은 세상이다.
색색의 꽃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주먹만한 수정이 돌멩이처럼 구르고, 세상 온갖 진귀한 음식에, 귀한 보석에, 아름다운 사람들, 함께 일하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마을. 1년 내내 꽃 지지 않고 새 날고, 노루 뛰고, 맑은 샘물 솟아오르고, 해 달 별 거르지 않고 뜨는……그런 마을.(54쪽)
나귀몰이꾼이었던 녹두장군은 장터의 이야기꾼에게서 들은 이 마을을 찾기 위해 아직도 헤매는 중이다. 그 마을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주인 아가씨를 사랑한 코끼리 이야기, 사원에서 방귀를 뀐 것이 창피하여 일생을 도망다니는 아랍인 이야기, 큰물에 쓸려가 용궁에 갔다 왔더니 50년이 지나 버렸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녹두장군 이야기는 그가 찾아 헤맸던 세상이 결국 나귀 똥구멍 속에 있더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그 마을인데 환장하겠더라고. 그렇게 찾아다닌 마을이 바로 저 안에 있는데. 눈을 부릅뜨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지. 그 때, 누군가 내 뒤통수를 여지없이 후려치는 거야.
따악!
죽비 쪼개지는 소리가 났어. 눈에서 번갯불이 튀었지. 얼른 뒤통수를 싸쥐며 뒤돌아봤어. 한 노인이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러더라고.
“떼끼 이 놈아. 왜 멀쩡한 나귀 똥구멍 속은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260쪽)
‘명왕 3동’의 일상사 사이사이, 민수와 그의 청진기가 짚어낸 소문들 사이사이에 녹두장군의 이야기는 배치되어 이 소설 전체의 맥락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아이의 눈으로 고단하고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낸 소설들은 드물지 않다. 근대화와 도시개발의 박차에 밀려 지상 끝으로 사라져간 마을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꽤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난장이가 살았던 ‘서울 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은 ‘천왕시 해왕구 명왕 3동’의 선배격이며, ‘명왕 3동’의 골목길은 우리들의 시인이 살고 있던 ‘원미동’의 어느 어름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 보태진 것이 있다면 바로 푸른 드레스를 입은 필리핀인 엄마 ‘데릴라’와 취학통지서를 무서워하는 아들 민수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녹두장군이 괜히 압둘 두바이와 코끼리 콩콩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지상에 없는 세상을 찾아 헤매던 길에서 만난 것이 아랍인 압둘 두바이와 인도 어디쯤에 있었을 코끼리 콩콩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가난한 땅에 코코넛 같은 눈을 가진 데릴라와 그의 아들 민수가 살고 있다 한들 그것이 별나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민수와 데릴라는 ‘명왕 3동’에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민수는 녹두장군의 이야기를 듣는 가장 알뜰한 청자이고 태평양약국의 삼촌과 둘도 없는 친구이다. 데릴라는 양말공장의 사장부인과 한국말로 농담을 하고 연애상담도 하며, 그리고 마침내 태평양약국의 삼촌과 사랑을 한다. 이 우정과 친밀과 사랑이 녹두장군이 찾아 헤매던 꽃이 피고 새가 나는 다른 세상의 풍경을 이루지 않는가.
녹두장군은 그가 찾던 다른 세상이 자기가 기르던 나귀 뱃속에 있었다고 했다. 도시 개발에 밀려 곧 철거될 운명에 처한 ‘명왕 3동’의 좁은 골목 속에, 남루한 지붕 아래에 그 다른 세상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하여 ‘명왕 3동’의 이웃들, 샌드백 아줌마와 깔다구, 김약사와 삼촌, 또는 용만 아저씨와 팽할머니와 비보이가 우리가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의 주인공이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귀의 뱃속에 있던 그 세상이 나귀의 똥구멍 밖에 있는 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 나귀의 뱃가죽을 뒤집으면 그 세상이 곧 여기이고 이 세상이 곧 거기이다. 그 아름다운 세상이 황금빛 유리창으로 빛나는 ‘글라스 팰리스’의 미관을 헤치지 않기 위해 쫓겨나야 하는 현실은 더욱 슬프다.
그러나 나귀뱃가죽의 안과 밖, 그 경계를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 소설은 거기가 여기이고 여기가 거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혹은 데릴라와 민수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나귀의 똥구멍 밖에 있기 때문이다. 녹두장군의 이야기는 ‘명왕 3동’이 바로 꽃이 만발하고 새가 날고 맑은 샘물 솟는 그곳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데릴라와 민수의 반지하방을 찾아가는 삼촌의 발걸음은 색색의 우산과 빗방울이 튕겨 반짝반짝 빛나는 ‘싱잉 인더 레인’의 노랫소리가 되지만, 그것은 또한 나귀 똥구멍 밖의 세계를 잊어야만 가능한 아름다움이다. “2010년 8월 31일까지 모두 사라져 주시기” 바란다는 정부의 통보를 받고 “며칠 밤샘 회의 끝에 명왕 3동은 집단적으로 일구사오를 잊기로 했다. 잊는 게 이기는 거라는 걸 명왕 3동 주민들은 알고 있었”(17쪽)다. 그리고 그 망각에 의해 명왕 3동은 녹두장군이 3백년이 넘는 세월을 찾아 헤맨 지상에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외국인 노동자와 혼혈아가 이질감없이 섞여 들고, 매일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는 샌드백 아줌마가 한방의 주먹으로 깔다구를 포용할 수 있고, 곧 사라질 마을에서 삼촌과 데릴라가 결혼을 하는 ‘명왕 3동’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이 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귀의 뱃가죽을 뒤집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망각과 상상은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이 전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 한수영은 몇 년 전 “사람들은 앞날을 알 수 없어 막막해 하지만 나는 그 반대여서 더 막막했다”('공허의 1/4', 민음사, 2004)라고 썼다. 힘들고 막막한 이 삶을 견디면 다른 삶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없어져 버린 곳에서 세상은 더욱 삭막하고 피폐하다. 그 절망의 끝이 다른 상상을 불러와 겨우 현재를 견디게 한다.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이주자의 모습을 생활에서 발견하는 일이 더 이상 어색해지지 않게 되어 버린 지금, 이른바 다민족, 다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채로 이미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은 이미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족과 인종이라는 분할이 의미를 잃을 만큼 우리 사회의 계급구조는 공고해지고 있다. 일용직, 비정규직, 도시빈민, 재건축과 철거, 이 참담한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외국인 이주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최저임금이 낮아지고 인간다움이 무시될수록 우리 사회의 인간다움과 존엄은 점점 더 파괴된다. 더 낮은 비용으로 더 손쉽게 부릴 수 있는 노동이기만 하다면 자본은 내국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데릴라와 민수가 자연스럽게 ‘명왕 3동’의 이웃이 되고, 더이상 그들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데에는 이러한 내막이 숨겨져 있다. 분노와 슬픔 대신 망각과 상상을 선택한 그들의 전략이 사실은 기대도 희망도 없으며 윤리도 정의도 없는 우리들의 막막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명왕 3동’의 행복한 결혼식은 아직 나귀의 뱃속에 갇힌 가난한 꿈이다.
3.
어느 잡지의 구석진 지면을 장식하고 있을 법한 작은 간이역. 햇살이 잠시 머물다 가고 바람이 잠시 일렁이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없는 고요하고 한적한 공간. 사람들은 흔히 그 작은 간이역에서 번잡한 일상을 잠시 잊는 짧은 일탈이나 정처없는 탈출을, 고요한 휴식과 먹먹한 성찰의 시간을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역이란 사람이 머물고 떠나고 모이는 곳, 그러므로 사람이 깃들 것 같지 않은 그 작은 간이역에도 머물고 떠나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하루 두 번 열차가 정차하는 산간 마을의 간이역에서 한적과 고요 대신 격렬하고 뜨거운 누군가의 사연을 엿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역에 쌓인 이야기의 덕분이다. '이별하는 골짜기'는 간이역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시를 쓰는 역무원 ‘정동수’에게 시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자신이 감각한 세상의 아름다움이었다. 공들여 마련한 노트에 매일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다가 그는 문득 깨닫는다. “세상에,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아름다움만으로 시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니.” 청년은 창유리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삶은 아름다움만도 슬픔만도 아니”다. “아무리 두렵고 끔찍해도, 결코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39쪽)이다.
그리하여 이 별어곡 역을 거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렵고 끔찍한, 그럼에도 결코 도망치거나 외면할 수 없었던 오랜 상처와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열여섯에 정신대에 끌려가 모진 삶을 겪은 것으로도 모자라,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고향에서 가족의 몰살을 확인해야 했던 「귀로」의 할머니, 자신의 실수로 죽은 남자의 아내와 딸을 거두어 그들과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신주사의 기막힌 몇 년, 또는 어릴 때 목격한 탈영병의 위치를 군인들에게 알려준 기억 때문에 평생을 악몽에 시달려야 했던 베이커리의 그 여자. ‘별어곡 역’을 사이에 두고 그려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기구하고 기막힌 사연들을 품고 있다. 정신대로 끌려간 것도 모자라 고향의 부모형제가 여순 사건의 와중에 몰살당한 사연이나, 실수로 일어난 철도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여자를 우연히 만나 부부가 된 사연, 혹은 탈영병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며 그 탈영병의 얼굴을 닮은 사장과 불륜관계에 빠진 사연, 모두 세상에서 흔히 만나기 힘든 극적이고 운명적인 사연들이며 그래서 선뜻 공감하기 힘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연들을 그저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 넘겨버릴 수 없는 까닭은 이 이야기들이 우리들 삶에 미만한 폭력과 그 폭력이 남긴 상처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은 국가와 이념, 군대, 그리고 가정폭력이 걸쳐진, 그야말로 우리 삶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은 집단과 개인, 이념과 젠더를 아우른다. 그리하여 소설은 국가나 이념, 혹은 집단의 차원 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까지 이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우리 삶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제물이 될 수 있는 폭력들은 개인에게 결코 망각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는 단지 누군가를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물리적 폭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 폭력에 상처입은 자들, 그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삶이란 언제나 지옥이며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이기 때문에 그 폭력은 더욱 가혹하고 잔인하다. 「여름-이별의 골짜기」에서의 신주사는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철도사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아내를 폭행하는 가장이 되어 버렸다. 철도사고로 죽은 청년의 젊은 아내는 기댈 데 없는 삶에 지쳐 떠돌다가 신주사에게 발견되었다. 죄책감 때문에 유가족을 거두고,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그들과 또다른 가족이 되었지만 신주사는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아내가 아름답고 귀할수록, 기구한 사연으로 만나 이룬 가족이 애틋하고 소중할수록 과거의 기억은 더욱 신주사를 압박한다. 아내가 자신을 떠날까 두렵고 소중하고 안타까운 행복이 깨어질까 두려워 신주사는 자신을 괴롭히고 아내를 괴롭힌다. 그의 의심과 폭력과 자학은 아내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갉아 먹었다. 「겨울-귀로」의 노파는 정신을 놓은 이후에도 가족에게 전할 보잘것없는 선물꾸러미들을 가득 채운 여행가방을 끌고 마을을 헤맨다. 「봄-손가락」의 여자는 어릴 때 목격한 탈영병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그 죽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강박과 망상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그러니 국가나 이념, 혹은 군대가, 여자를 소유하려는 집착이 불러일으키는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 그 상처와 고통은 그들의 관계에 감염되고, 또 그들 자신을 파괴하며 그리하여 다시 반복된다.
아마도 이 상처와 고통을 잊거나 극복하는 일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화해할 수도 쉽게 용서할 수도 없는 폭력과 그 상처에 대해 더 오래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것은 무조건 선이고, 느리고 오래된 건 모조리 악이 되는”, 그래서 작고 외로운 “간이역들은 이 땅에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308쪽)는 현실이 비정한 까닭은 이 작고 외로운 마을에 남은 이야기들, 아직 망각도 화해도 할 수 없는 사연들이 지닌 무게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남달리 기구하고 고단한 사연들이지만, 평탄한 인생에서는 한번도 겪어 볼 수 없는 고통과 상처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연들로 인해 우리는 평탄하고 일상적인 행복이 감춘 폭력과 그것이 남긴 불안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그 폭력과 공포와 불안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속도와 경제성보다도 더 강하고 귀한 것이라고, 사라져가는 ‘별어곡 역’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선형의 날렵한 초고속열차가 꿈길 같은 들판과 강과 다리를 지나 섬광처럼 현란한 속도로 질주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노인들의 눈에 그것은 마치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우주선처럼 낯설기만 했다. 속도의 혁명도, 꿈의 철도도 오직 도시 사람들의 몫일뿐이었다. 저쪽에선 우주선이 씽씽 나는데, 우린 고작 이 코딱지만 한 간이역조차도 빼앗기고 마는구나. 노인들의 흐린 눈빛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305쪽)
그들이 과거의 기억과 그 상처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한편으로 과거의 기억과 고통이 그만큼 크고 아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삶이 그 과거의 기억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과거는 영원한 강박과 망상을 낳을 뿐이다. 사라져 가는 ‘별어곡 역’은 그들의 과거, 그들의 사연이 속도와 규모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별어곡 역’에는 이미 그들이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감사하는 현재의 삶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만이 깃들어 머물고 있는 ‘별어곡 역’에,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마주할 현실이 그려지지 못하므로, ‘별어곡 역’이 말하는 사연들은 차라리 한 자락 아련한 ‘애수’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과거의 폭력과 그 상처의 기억에 묻혀 어쩌면 현재의 더 크고 강하고 부당한 폭력들과 마주하는 시간은 감상적으로 유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이 남긴 아프고 깊은 상처의 사연들은, 그저 말없이 사라져서는 안 될 우리들 삶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일깨우지만, 그렇기 때문에 작고 외로운 간이역에서 여전히 살아가야 할 이들의 현재는 더욱 소중하다. 오래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그들의 과거가 현재의 삶과 뜨겁고 격렬하게 마주칠 때, 그 긴장감이 이 작은 간이역의 쓸쓸한 소멸에 저항하는 더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서영인∙2000년 ≪창비≫ 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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