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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특집/ 김구용 시인, 시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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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간 리토피아는 2011년 2월에 첫 번째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를 냅니다. 이를 위해 리토피아는 김구용문학제를 시작하기로 했으며, 이 행사 중 김구용시문학상 시상식과 김구용 문학 세미나를 열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리토피아 겨울호에 이미 김구용 시인 특집이 마련되었으며, 봄호에도 특집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봄호 특집을 위한 정담회입니다. 자유롭고 편안한 자리라고 생각하시고, 김구용 선생님에 관하여 독자들에게 유익한 말씀들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김여정:그 동안 김구용 선생님의 시론이나 시인론을 쓴 논문들이 좀 있지 않나요? 그것들을 조사해서 리토피아에 소개를 하고, 또 김구용 선생님의 인간과 문학이라든가, 이런 걸 몇몇 잘 아는 사람들이 좀 집필하도록 해서 잡지에 내보내는 방법도 좋을 듯한데요.
고명철:김구용 시인의 시세계를 한국시사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선결 과제라 생각하고, 기존 관련 논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평가와 작품 해석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강우식:준비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이 자리는 김구용 선생님의 시가 무엇이고, 우리 시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을 그냥 가볍게 이야기해보자 하는 자리라는 말이군요.
고명철:예, 김구용문학제 중의 세미나에서는 아무래도 딱딱한 이야기만 나올 것이므로 선생님들께서 이 자리를 통해 김구용 선생님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의미 있는 일화 등을 말씀해 주시면 김구용문학 연구가 좀 입체감이 있게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제천:구용 선생이 평소에 자기 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안 했어요.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시에 대해서 천상병 시인이 원색의 광석, 다시 말하면 원광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구용 선생께서 그 말을 괜찮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또 개인적으로도 저 역시 그 말에 거의 동의를 합니다. 시 자체가 우리 시인들이 지향점으로 삼는 것이 깨우침인데, 구용 선생은 비교적 깨우침 쪽이 더 지배적이어서 읽기가 좀 힘이 든다 하는 것뿐이지, 시인으로서 지향점에 도달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우식:우리가 보편적으로 김구용 시인의 시를 쉬르 쪽에 많이 놓고 있는데, 나는 김구용 시인의 시는 서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박제천 시인께서 원광이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김구용 시인의 시는 상당히 동양적인 쉬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와 가까이 접했던 것들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시세계를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동란 전후의 황폐한 상황 속에서 쉬르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구용 선생의 쉬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김동호 시인
싶은데, 가령 구용 선생의 시 제목에 곡曲이라든지, 송訟이라든지, 아리랑이 있어요.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쉬르는 그냥 단순히 난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구용 선생의 시는 어려우면서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그냥 읽어서는 어렵지만, 가령 술좌석에서 구용 선생께서 자신의 시를 직접 외울 때가 있어 가만히 들어보면 그때는 쉽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대부분 알아들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글로 읽을 때에는 이게 잘 안 온다는 것이지요. 구용 시의 전반적인 것이 쉬르라고는 하지만 거의 기본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가락도 시 제목의 송이라든지, 곡이라든지, 구곡九曲이라든지, 아리랑이라든지처럼, 시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고,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난해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난해시를 아주 드라이한 시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점들을 구용 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너무 앞질러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리듬이 곡이나 송으로 되어있기는 하지만, 구용의 ‘백화시실白華詩室’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백화시실白華詩室’은 추사가 습작을 했던 글씨 중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선생 서실의 현판으로 달았거든요. ‘백화白華’의 의미는 ‘흰 꽃’으로, ‘흰 꽃’이란 어떤 면에서는 ‘중앙’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것들이 또 다른 의미를 준다고 한다면 왜 그걸 현판으로 달았을까 하는 쪽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미당이 자신의 시실詩室을 ‘쑥과 마늘의 산방’, ‘봉산산방’이라고 달았잖아요. 구용 선생도 현판에 그런 어떤 의지를 담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민족, 백의민족의 ‘흰 꽃’의 의미나 또는 ‘정갈성’의 방향으로 파악해 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구용 선생께서 가지고 있는 문학의 ‘정결성’을 그 ‘백화시실白華詩室’이라는 현판에서 유추해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우식 시인
김여정:구용 선생의 시 바탕에는 불교적인 면도 강합니다. 구용 선생은 어릴 적부터 절간에 들어가서 불경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불경에 대한 강론도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시에는 불교적인 것이 바탕으로 깔리면서 쉬르적인 기법, 그리고 또 은유적인 요소도 많이 있습니다. 옛날 김상옥 시조시인이 나더러 그러는 거에요. 도대체 나는 구용의 시는 뭔지를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선생님, 왜 몰라요? 구용 선생의 시 중에 ‘장미가 장사를 한다’ 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그 구절을 예로 들어주었어요. 일반적으로 ‘장미가 장사를 한다’고 하면 굉장히 난해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장미는 굉장히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니까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향기에 취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장미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향기와 미를 파는 일종의 장사라고 보는 발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장미의 특성을 다른 방향으로 조명해보는 것과 같은 수법들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난해할 수밖에 없지요. 또 산부인과에서 여성들이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있어요.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내 무수한 자식들이여’ 이것은 유산된 아기들이 한강물에 버려져 떠내려가는데, 그게 전부 내 자식이 죽어서 떠내려가는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요. 이처럼 우리가 이해하려고만 노력한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시 감상의 시각이나 통념으로 본다면 물론 어렵습니다. 나는 김구용 선생님으로부터 평소 자주 들었던 말씀이 있어요. 그 하나가 ‘시인은 자기 시를 스스로 해석하거나 스스로 평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뒤에 오는 후배들이 석사논문이든 박사논문이든 시를 연구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자신의 시를 다 말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시는 훗날의 연구하는
박제천 시인
사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겁니다. 그들이 각자 여러 방향으로 감상의 폭을 넓히면서 연구하다보면 평가가 여러 각도에서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아, 김구용 선생님의 문학적 욕심이 참 대단하시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구용 선생의 시는 난해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지극히 은유적인 것입니다. 불교에도 그런 게 많잖아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것을 들어서 이야기하는 형식이지요.
김동호: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구용 선생의 시가 난해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나는 그 원인이 이런 점에도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구용 선생은 시에 물질명사를 안 쓰잖아요? 추상명사만 씁니다. 왜 추상명사를 좋아하는가를 생각해보니까 물질명사에는 함축된 의미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추상명사에는 많거든요. 중국의 고전에 관한 내용도 다 집어넣을 수 있지요. 물질명사라는 게 아무래도 흡족하지 않아요. 그래서 추상명사로 갈수록 동양의 고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려운 거지요. 난해한 겁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구용 선생이 추상명사를 많이 쓰는 이유가 그 속에는 동양의 고전적인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 데에서 기인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박제천:김여정 시인께서 말씀하셨듯이 구용 시의 은유적인 표현은 그분의 사상적, 정신적 배경이 유교, 불교, 노장의 중심에 그 맥이 닿아 있어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구용 선생의 장시들을 쭉 읽다보면 빼어난 이미지의 시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 보거나 처음 접하게 되면 절대적인 대세가 은유적으로 되어있어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꼼꼼하게 읽다보면 구석구석에 많은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거지요.
김여정:난해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니까 난해한 겁니다. 구용 시 한 구절 한 구절의 시적 상상력이나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심볼리성으로 보면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지요.
강우식:우리는 먼저 구용 선생이 왜 쉬르를 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용 선생의 초기 시는 6·25라고 하는 전후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쉬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점점 진행이 된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쉬르를 한 사람으로는 대표적인 사람이 나 개인적으로는 이상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상 역시 그랬지만 쉬르라는것은 시의 생명이 길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구용 선생은 쉬르를 하면서도 일생을 한 사람이란 겁니다. 그게 참 드문 거잖아요. 서구에서도 오늘날까지 세계문학을 이야기하면 거의 쉬르가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어쨌든 쉬르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실패를 하거나 실험시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말지요. 아니면 하다가 중단하거나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데, 구용 선생의 쉬르는 전후의 황폐한 상황에서 시작해서 예를 들면 불교라든지 노장이라든지의 사상이 바탕이 된 쉬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길게 가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늘 본인 자신은 자신의 문학을 성공하는 문학에 두고자 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실패하는 것도 문학이라고 늘 말씀하셨지요. 나도 그 분의 제자이고 여기 있는 분들도 대부분 그 분의 제자들이지만 그런 방향에서 우리들에게 시를 얘기하셨으니 우리가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시문학사에서 일생 동안 쉬르를 했던 분은 아마도 구용 한 분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박제천:내가 좀 다른 관점에서 얘기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에 대해 어떤 편견이 좀 있는 거 같아요. 가령 시에 있어서도 단편적인 개별 작품의 성취도에만 연연할 뿐이지, 한 시인의 정신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 갖고 있어요. 정서적으로 좋아하는 시의 성취도에만 너무 연연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구용은 그런 편견을 깨트리고 시가 시로써 설 수 있는 그런 입지를 마련한 겁니다. 그러면서 구용
김여정 시인
자신뿐만이 아니라 한국시문학의 한 계기가 제대로 잡힐 수 있는 기틀을 제공했어요.
강우식:우리시에는 장시가 별로 많지가 않은데 어쨌든 장시 쪽은 구용 선생이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문학개론을 배웠는데 처음으로 그 양반에게서 다다를 배웠어요. 구용 선생은 다다에 대해 아주 깊게 말씀하셨습니다.
김여정:구용 선생의 문학적 욕심이라는 것은 일종의 야망이고, 욕심이기도 하고, 아니면 실험정신이랄 수도 있겠는데요. 당신은 남들이 쓰는 기법을 절대로 안 쓰겠다는 분이셨습니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하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내 원수를 갚아다오’ 하셨어요. 자기는 늘 실패하는 실험만 하니까, 너희들이 그것을 좀 완성해다오, 하는 후배들에 대한 욕심이고 당부이지요. 자기는 끊임없이 실패하게 되어 있고, 현실적인 성공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반대로 거기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강우식:나도 학교 다닐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구용 선생과 대화를 하다보면 도무지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지요.
박제천:김범부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구용 시는 일체가 암호화되어 있는 비사체이다.
강우식:구용 선생이 범부 선생을 아주 좋아했고 존경했어요. 우리에게 참 많이 얘기했습니다.
김여정:맞아요. 범부 선생은 김동리 선생의 형님이신데 참 많이 이야기하셨지요.
김동호:어찌 보면 쉬르가 선시하고도 닮은 점이 있어요.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고명철 문학평론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6.25 전쟁 마당에 무슨 자연이니 무어니 할 수가 있겠어요. 이게 안 되잖아요?
김여정:구용 선생은 인간적으로 미당 선생하고 참 가까웠어요. 그 분의 시도 좋아해서 항상 얘기하시기를 미당을 따라갈 시인은 이 땅에 없다 했지요. ‘미당은 인간이 아니라 시신’이라고.
강우식:예, 우리들과 술 드시면서 미당은 대단하다고 꽤 하셨지요.
김동호:사람이 살면서 제일 어려운 게 남을 칭찬하는 겁니다. 구용 선생의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데 늘 칭찬하셨어요. 대단하신 거지요.
고명철:말씀을 듣다보니까 중요한 문제 하나가 돌출되었습니다. 요즘 평단이나 연구계의 관심거리 중 하나가 한국문학은 유럽중심주의의 미학과 유럽중심주의의 계보 안에서 학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판도가 점차 아시아 미학 질서의 흐름으로 오고 있는 시점인데 한국문학이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안 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반성적인 물음들이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일어나고 있고 그 가장 큰 핵심은 이겁니다. 아시아적인 거, 즉 비서구적인 거하고 서구의 유럽문학의 자질들을 화학반응 시켜서 제3의 미학적 자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느냐. 말씀을 들어보니까 구용선생님의 쉬르에 노장사상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서구문학적인 것도 아니고 아시아적인 것도 아닌 특별한 미학이 생성된 거 같은데, 이런 것들이 하나씩 주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여정:구용 선생은 기법 면에서나 정신 면에서나 그런 화학반응을 하면서 동시에 토양과 공기가 다른 공간과 삶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겠다고 하는 강한 욕심이 있었어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 현실에 타협하거나 각광을 받아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겠다기보다는 긴 안목으로 내 시가 오랜 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아까 얘기한 자긍심이나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강우식:화학반응이라기보다는 문학용어로 이야기하자면 혼용적이라고 하는 거지요. 혼용이라는 것이 우리가 단순히 말하는 문학용어로서의 혼용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현실 자체가 혼용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라는 단일화 의식이 없어지고 이제 세계화가 되어가는 혼용과 마찬가지지요. 굳이 얘기하자면 문학도 세계적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세계적으로 간다는 것은 비빔밥 같이 혼용되어진 하나의 문학이나 미학,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를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로 번역하여 알리는 작업도 필요할 때입니다.
김여정:지금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소통이 안 되면 우리문학은 우물 안 개구리거든요.
강우식:사실 엄밀한 얘기로 말하면 소위 이즘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진 겁니다. 그나마 있는 게 세계적으로 쉬르적인 경향이지요.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탄 요사도 어떤 면에선 쉬르적인 적인 것을 좀 가지고 있는 거지요.
박제천:그런 면에서는 구용의 아이덴티가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사 이야기가 나왔지만 남미의 문학들이 서구에 소개될 때 지금 우리가 구용 시를 보는 것처럼 굉장히 낯설고 소통이 안 되는 거지요. 허지만 그것이 점점 이해가 되어가면서 매직리얼리즘이 세계문학의 추세로 떠오르듯이 지금 우리 문학이 서구적인 표현에 일관되어 있다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한 지표로서 구용문학의 의미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김동호:나는 화학반응을 문학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물리적이라면 문학은 화학성이 있어서 섞지 말라고 해도 섞어지게 되지요. 이런 점에서 구용 선생은 참 앞서가셨던 분 같아요.
김여정:나는 현재의 평단이나 문단에서 조명을 받거나 평가를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내 시는 내 뿌리를 내가 투자하고 경영하면서 내가 죽고 난 먼 훗날 내 시가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를 확신한다. 나는 나 대로 내 길을 간다. 뭐 이런 것이 구용 선생의 자부심이셨어요.
김동호:나는 구용 선생이 특별한 욕심이 있을 분으로는 보지 않아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욕심 부릴 게 뭐 있겠어요. 쓰다가 가는 거지요.
김여정:몇 십 년을 곁에서 숱한 언어로 접하다 보니까 그분이 말씀하시면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은 이해가 가더군요.
박제천:나도 동의해요. 구용 선생이 이제까지 보여지는 대로 거의 독자의 접근을 불허하는데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 마냥 혼자서 독야청청하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가끔 구용 선생과 사석에서 대화를 하다보면 선생께서는 최근 젊은 시인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내가 70년대 작품을 발표하면서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 무렵에 작고한 김현과 술을 먹다가 구용 선생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눈이 내리는 미끄러운 길을 밟으면서 댁으로 찾아갔더니 선생께서 얼마나 반가워하시던지. 그때 김현이나 나는 막 나온 신인이었는데 우리 작품을 거의 다 구석구석 외울 정도였어요.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젊은 시인들 얘기를 할 정도로 문단의 흐름을 정확히 알고 계시더라구요.
김동호:시인만이 아닙니다. 당시 작가 이문열이 막 뜰 때인데 이문열의 작품도 다 외웠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면 화장실에 가서 그 소설을 다 외울 정도로 읽으셨다니 굉장히 무서운 분입니다.
강우식:나름대로 쉬르를 하면서도 앞서가려고 했던 욕심이 있었던 양반입니다. 구용 선생의 취미는 유일하게 영화를 보시는 겁니다. 아마도 말년에 몸이 불편하셨을 때에도 영화를 즐기셨을 겁니다. 비디오를 빌려보시든, 사모님하고 함께 영화관을 찾아가시든, 좋은 영화라면 거의 다 봤을 거예요. 일생을 그랬거든요. 그 점도 선생의 시세계에 큰 작용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김여정:몸이 불편하시거나 심지어 외출을 안 하실 때에도 방바닥에 놓인 텔레비전 있잖아요. 그거 틀어놓고 외화를 계속 보시는 거예요.
강우식:영화 매니아지요.
고명철:김구용 선생님의 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더라도 재미있었던 이야기 등을 자연스럽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제천:선생께서 제자들과 만나 제일 좋아하셨던 게 아마 글씨 써 주시는 거와 호 지어 주는 거 아닌가 싶어요. 글씨를 써 주실 때에도 글귀를 본인이 집어내서 써주세요 이미 알고 계신 거에요. 내가 뭘 써 주십쇼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골라서 써 주는 거지요. 그만큼 남의 작품을 정독했다는 증거이기도 한 거지요. 아까 백화시실 이야기도 나왔지만 바로 그 자리가 그런 현장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추사의 글씨 연습체본을 구했다고 좋아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추사가 워낙 자호가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선생께서도 호를 상당히 많이 가지시려고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호를 지어주시는 것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너무 빨리 지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난처할 때가 있었어요. 전에 강우식 시인하고 셋이 같이 있을 때 그때 살던 곳이 면목동인데 면목재로 하자는 겁니다. 어느 동네가 좋으냐 하시기에 방산동이라 했더니 아 그거 참 좋다 하시면서. 여기 강형은 고향이 주문진이니까 동국문헌비고인지 무엇인지를 한 번 들춰보시더니 물의 끝 수국재라고 하자는 거예요. 너무 어려워서 결국 수영으로 했지요. 수국재, 주문진이 동해의 끝이다 뭐 이런 뜻이었을 겁니다.
강우식:구용 선생은 나름대로 일화가 참 많은 양반입니다. 내가 쓴 시중에 ‘와불선사’라고 하는 시가 있어요. 이 양반이 6·25 이후에 동학사에서 기거한 적이 있어요. 그냥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학승들에게 불경을 가르쳐 준 거예요. 동학사에 함께 가시면서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화창한 어느 봄날 복사꽃이 만발하였는데 젊은 나이에 미치겠는 거예요. 무료하니까 학승들에게 경을 읽으라 하고 툇마루 베고 누워 경을 쳐다보며 맞나 틀리나 보고 있는데 그 때 주지스님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일갈한 거지요. 경을 건방지게 누워서 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니까, 구용이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래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경은 높은 거니까 우러러 봐야 한다. 그런데 그 양반 여기 박 시인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술을 마시면 선생께서 박 시인은 아주 대접을 해주어요. 호형호제를 해줍니다. 나는 뭐 제자니까 함부로 하시는 거지요. 내 참.
박제천:구용 선생께서는 나를 추천해 주신 신석정 선생을 선생으로 모셨어요. 그러니까 나는 선생과 동렬이 되는 거지요.
강우식:그러니까 나는 조카가 되는 거지요. 구용 선생께서 술에 취하시면 이 양반 붓글씨를 쓰셔서 그런지 손아귀 힘이 세잖아요. 손을 늘 잡아요. 나는 아파 죽겠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박 시인은 약아빠져서 호형호재 한답시고 손바닥을 펴질 않는 거예요. 선생께서 잡으려고 하면 주먹을 쥐고 반갑습니다 하면서.
김여정:구용 선생 손 때문에 고생한 사람은 나예요. 나는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잖아요. 반 죽는 거지요. 고문이에요. 남자들 손은 대부분 꼬집어대십니다. 여자는 손을 주면 잡고서 사촌 누이야, 사촌 누이야, 하고 노래를 부르셨어요.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조남익 시인이 있는데 이 분도 신적정 선생의 추천을 받았지요. 신석정 선생님 회갑연을 한다고 해서 몇 사람 모였어요. 박목월 선생, 김후란 선생, 아마 박 시인도 그 날 왔을 거예요. 조남익 시인이 왔거든요. 그 때 돈암동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구용 선생이 내 손을 잡고 누이야, 하면서 손을 주무르는데 나는 습관적인 것을 아니까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거든. 그런데 조남익 시인이 보기에는 이상했던 거예요. 저렇게 손을 주무르는 데도 김여정이라는 여자는 손도 안 빼고 계속 맡겨놓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요. 구용 선생님 제씨께서 청주대학에 계셨는데 그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나 봐요. 아, 당신 형님이 김여정 시인하고 굉장히 가까운 모양이더라. 제씨께서 구용 선생님한테 이 얘길 했네요, 그래 구용 선생께서 나만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런 촌놈이, 남녀관계가 아닌 관계를 이해를 못하고 스캔들처럼 소문을 퍼뜨린단 말야. 조남익이 그 놈 촌놈이야, 촌놈. 그만큼 구용 선생은 고고한 정신을 갖고 있었어요. 사람을 대할 때에도 가장 강조하는 게 연조였어요. 적어도 20년 정도 되지 않고는 마음이 안 편하다 이겁니다. 아무에게나 얘기를 하고, 아무하고나 접촉하고, 아무나 꼬집고, 아무나 뽀뽀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할 때에는 한 20년 정도의 년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박제천:예전에 돈암동 맥주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보니까 선생님이 사람을 무지 가려요 왜 그러냐 하면 송욱 선생이 그 집 단골이에요. 그런데 이 양반들 두 분이 서로 아는 척을 안 해요. 그냥 지나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혹시나 해서 저 쪽에 송욱 선생님이 앉아계시는데요 했더니 알아, 하고 다시는 이야기 안 하시는 거예요. 언젠가는 젊은 평론가가 김구용론을 꼭 쓰고 싶다고 언제 한 번 꼭 뵙게 해 달래서 데리고 갔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조금 기다렸어야 하는데, 먼저 선생님 시집을 한 권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책방에 가서 사시게, 하시고는 끝내 안주고 마시더란 말이에요.
김동호:송욱 선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송욱 선생은 영문학자에요. 그런데 이 분이야말을 혼자 술을 즐기는 분이에요. 구용 선생은 술에 취하시면 자존심이 없어요. 그래 반가워서 인시하고 그러는데 송 선생은 이것이 귀찮은 거라. 그 다음부터는 봐도 모르는 척한 거지요. 서로 모르는 게 아니라 잘 아는 사이에요. 아마 그 무렵일 겁니다.
김여정:구용 선생은 정이 참 많은 분입니다..
김동호:생각하면 참 가슴 아픈 일도 있었어요. 한 번은 댁에를 갔더니 이런 말씀을 하세요. 마당에 대추나무가 있잖아요. 하루는 까치가 까까 짖드래요. 그래 오늘 참 좋은 손님 올라나보다 생각하셨대요. 그랬는데 그 날 저녁 밤손님이 왔더라잖아요. 그 때 난 별 일은 아닌 줄 알았어요. 돌아가신 뒤에 알았지요. 혼이 많이 나셨더라구요.
김여정:구용 선생은 좋은 물건 많이 갖고 계셨어요.
강우식:좋은 거 많이 갖고 계셨지요. 나도 구용 선생의 콜렉션을 많이 보고 싶었지요. 그 양반 하다못해 요만한 엽서도 안 버린 분이거든. 오면 다 읽은 후에 모두 간직했어요. 한 번 보고 싶어서 보여주십시오, 했지만 영 안 보여주시더라고.
박제천:선생님 방이 조그만하잖아요 그 옆문만 열면 바로 마루로 된 서고거든요. 서고가 꽤 컸어요. 주욱 대문간까지 이어진 방이니까.
강우식:인사동 쪽에서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구용 선생이 추사 감정은 최고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작 구용 선생은 스스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어쨌거나 내가 알기로는 구용 선생만큼 추사를 아는 사람은 없어요. 구용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더러 물건을 가지고 가지만, 이 양반은 절대 진품이다 가짜다 이런 얘기를 안 하세요. 그냥 잘 구경했다, 하고는 돌려보내는 거지요.
김동호:나는 구용 선생을 따르면서 횡재를 한 사람들을 알아요. 이 사람들은 일찍부터 구용 선생의 능력을 알아보고 따라다녔거든. 붙어다니면서 구용 선생의 눈빛만 이상하면 다 샀거든요.
고명철:김구용 선생님이 추사를 특별히 좋아한 이유 같은 것이 있을까요?
김여정:추사가 특별하거든. 나도 추사 글씨를 복사해 주셔가지고 안방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강우식:구용 선생이 옛날 수술하셔서 입웠했을 때 문안을 가니까 병실에도 그걸 복사해서 걸어놓으셨더라고. 그런데 추사 좋아하는 이유야 특별하게 있겠어. 본인이 서예를 하시니까 그런 거지요. 남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구용 선생은 서체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우리들이 얘기하고 있잖아요.
김여정:구용 선생 서체를 본뜨는 사람들도 있어요.
강우식:자신의 서체를 가진다는 것도 힘든 거지요. 추사는 나름 중국의 대단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붓글씨를 했던 것이고, 이것을 구용 선생은 잘 알고 계셨어요. 추사가 독창적이잖아요. 그런 뜻에서 존경했던 거 같아요. 본인 스스로는 얘기를 안 하지만 추사 감정은 그 양반 따라갈 사람이 없지 않은가요.
김동호:진짜 사랑해야 감정이 되죠. 구용 선생이 추사를 제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죠. 통하는 게 있잖아요. 구용 선생은 추사하고 통하는 게 있어요.
강우식:이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구용 선생 돌아가시고 문학과 창작에서 구용 특집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내가 구용의 ‘맑은 문학을 위하여’ 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것은 쉬르 자체가 맑은 문학이라는 것이 아니거든. 내가 얘기한 것은 구용 선생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정신이라든지가 한국문단에서 본받아야 될 삶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죠. 누구하고도 무리를 짓지 않으셨어요. 한국문단 실정에서 무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특히 인연으로 끈으로 묶여 사는 사회에서 홀로 독야청청하면서도 자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박제천:선비정신이지요. 예술원 회원도 사양하셨어요.
강우식:그렇습니다. 본인이 안 한다고 극구 사양하셨어요. 그거는 내가 직접 들은 겁니다. 정한목 선생이 구용 그러지 말고 같이하세, 했지만 끝내 거절했어요. 그건 내가 두 번이나 들었어요. 구용 선생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자신은 자격이 없다 하셨대요. 그건 대단히 힘든 거 아닌가요.
박제천:나도 중간에서 한 번 말을 넣었더니 굉장히 화를 내셨어요. 그런 말은 다시 듣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선비정신이 아주 굳은 분이셨어요.
강우식:나는 그 분이 쉬르를 하면서도 맑은 문학을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변을 안 쳐다보고 자기 길만 가신 분이지요. 구용 선생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자신은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다 가는 사람이 제대로 없단 얘기지요. 시를 쓰고 싶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른 일에 매달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구용 선생은 일생 동안 시를 쓰고 붓글씨를 하고 싶었는데, 일생동안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다가 떠날 수 있으니 자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가만히 들어보니 그 말씀이 맞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일생 동안 한 사람이 제일 행복하고 부자 아니겠어요.
김여정:결혼도 그렇잖아요. 결혼도 자기 방식으로 하신 거예요. 월탄 선생이 주례 서시고, 조연현 선생이 진행을 해서 절에서 그냥 했잖아요. 장인어른이 부원여고 교장을 하셨거든. 그 분 회갑연에 열 폭 병풍을 드리셨어요. 장인어른이 그제야 마음을 푸셨대요. 옛날 우리 수요회 멤버들 처갓집에 병풍을 쳐놓고 초대를 받아서 대접을 잘 받았다니까.
김동호:구용 선생이 독한 데도 있어요. 왜냐하면 사모님이나 아이들이 모두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 가자 해도 안 가셨잖아요. 이 집 문간방만 주고 가라 하니 이사를 갈 수가 있겠어요. 화장실도 옛날식이고 한데.
김여정:이미 사모님은 다른 데다 아파트를 사놨어요. 그런데도 끝내 이사를 안 간 거예요.
강우식:안 갔지요. 참 독하신 양반이에요.
김동호: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다니면 가축처럼 길들여지게 되는데 이 분은 가축처럼 길들여지지가 않았어요.
김여정: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셨는데, 반면 아버지에 대해선 거부반응이 있었어요. 평소 말씀 하시기를 아버지는 어쩌다가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할 일만 하셨대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항상 있었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사모님이 조금 애를 먹었을 거예요.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경상도 시래기 된장에다 무치는 거, 이런 것을 좋아하셨는데 사모님은 수원사람이고 공부하느라 그런 거 어디서 해봤겠어요.
강우식:구용 선생은 보청기를 항상 끼고 계셨어요. 점점 쎈 걸로 몇 번씩 갈아 끼시면서 사셨지요.
김여정:그래도 듣고 싶은 건 다 들으셨어요.
강우식:기분 좋은 사람의 말은 조그맣게 얘기해도 다 알아 들으시고, 기분 나쁜 사람은 뭐라 말해도 뭐라구요? 뭐라구요? 안 들려 안 들려, 하시는 거야. 이 양반 참 희한한 거예요.
김동호:그런데 지내놓고 보면 말이죠. 주변에 식물인간처럼 된 사람들이 있거든. 거기에 비하면 구용 선생은 참 행복하게 돌아가신 거야. 돌아가시기 2주 전엔가 뵈었거든요. 강문석 시인과 둘이 갔었는데 한참 바라보시다가 떠오르는가 봐요.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더라고요. 간병사가 배를 깎아왔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과가 큼직큼직한데 선생은 이가 없어 잘게 잘라드렸잖아요. 갑자기 왜 자기는 적은 거 주느냐는 거예요.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거지요.
강우식:구용 선생은 위가 작아서 일생을 막걸리만 드셨어요. 매일 두 병 정도 드셨을 겁니다. 그거 장복하시고. 식사 대신 하시고 그런 양반이에요.
김동호:많이 드셔야 두 병이에요.
김여정:내가 살던 동네가 삼선동이었잖아요. 선생님 동네에서 걸어 돈암시장만 건너면 되었어요. 같은 방향이니까 항상 버스 타고 같이 갔어요. 그러면 이 양반 술에 취해서 창문에 불빛이 반짝반짝 하는 걸 보시고는 맨날 ‘엄마야, 저 강변에 금모래빛’ 하시는 거예요.’ 승객들이 있는데 신경도 안 쓰고. 그래서 나는 짓궂게 쏘아부치곤 했어요. ‘금모래빛은 무슨 금모래빛. 뭐 죄다 전깃불이구만’ 내가 그거 현대문학에 썼지요.
강우식:구용 선생 정년 때 이야기 좀 하지요. 내가 출판사에 있을 때입니다. 조건상 교수하고 찾아뵈니까 뭐 아무 것도 안 하신대요. 그래서 조건상 교수가 주도가 되어서 구용문집을 하나 만들었어요.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어요. 구용 선생 붓글씨가 많으니까 그것을 모아보자. 조 교수하고 나하고 쉬쉬하면서 그거를 만든 거예요. 다 만든 후에 선생께 말씀 드리니까 은근히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실수를 했네. 그 붓글씨 몇 개 중에 구용 선생 글씨가 아닌 것이 들어간 거야. 임 모 시인의 시집에 써있던 건데 내가 착각을 하고 집어넣었던 거지. 선생님 보시고 이거 어떻게 된 거냐 하시는데 책은 이미 나와버린 것이고. 그랬던 적이 있어요.
김여정:문단 삼대 추남이 김구용 선생과 소설 쓰는 박영준, 천상병 시인이잖아요. 구용 선생님 늙으셔서는 인물이 괜찮았지 우리가 처음에 뵜을때에는 아니었어요. 내 결혼식 때 구용 선생이 두루마리 쓰고 축사했잖아요. 자기는 총각인데요.
김동호 :나는 사실 구용 선생께 배운 일은 없어요. 구용 선생 때문에 시인이 됐을 뿐인데 구용 선생은 어쨌든 멋쟁이란 생각이 들어요. 요즘 물질사상이 팽배한 이 마당에 진짜 잘 사는 게 어떤 것이냐 할 경우에 구용 선생처럼 살면 잘 살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에요.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된 게 후회가 없어요.
강우식:동호사백은 구용처럼 살고 있어요. 많은 부분에서. 한마디만 더 하지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내가 성대에서 시 쓰는 것으로는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성균문학상에 나를 안 뽑아주고 다른 사람을 뽑아준 거예요. 내가 무척 열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구용 선생은 학생들한테 술을 잘 안 쏴요. 구용 선생 얼마나 짠돌인지 몰라요. 그런데 함께 술을 마실 자리가 있었어요. 나야 뭐 그때는 겁나는 사람이 없던 사람이니까. 요즘에야 겁나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구용 선생께 선생님, 관상 잘 보신다면서 제 관상 좀 봐주세요, 했더니, 이 양반이 죽어도 안 봐줘요. 관상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내 관상은 죽어도 안 봐주는 거예요. 나중에 하도 조르니까 자네 이마는 금강석 다이아몬드 같네, 그러셨어요. 관상 얘기를 하면 월탄 얘기를 먼저 하시는 거야. 월탄 상은 금구망해다. 금거북이가 바다를 바라보는 상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마 덕에 사는 것 같아요.
고명철: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도 독자들이 김구용 선생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더 많은 이야기를 청해 들을 기회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동호 강우식 김여정 박제천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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