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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봄호)신작단편/달그림자/오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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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58회 작성일 11-05-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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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봄호)신작단편/달그림자/오은주




나는 두 팔을 허우적대다가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는 빈공간이란 느낌에 밀려 팔을 내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방 안에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었다. 꿈속에서 무언가 움켜쥐려고 허우적댔지만 여전히 빈손이었다. 어떤 발레리나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아프지 않으면 그 전날 최선을 다한 삶이 아니었다고 말했는데, 그런 기준에서라면 이즈음 나의 하루하루는 완벽한 최선이었다. 온몸이 매 맞은 것처럼 무겁고 관절마다 아우성치듯 자기 위치를 알리며 쑤셨다. 단순노동이 가져온 근육의 피로를 그 고상한 발레의 연습에 비교하다니 쓴웃음이 배어져 나왔다. 창문에 푸른 기운이 돌고 방안은 물체를 식별할 정도로 빛의 시간으로 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불을 팽개치고 일어나 바로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요즘 나의 일상복은 통 넓은 싸구려 청바지에 검정색 추리닝 윗도리다. 몸에 맞거나 좋은 옷을 입는 게 목욕탕의 때밀이 아줌마란 지금의 내 처지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좁은 집의 부엌 한쪽 벽에 붙은 작은 식탁에는 의자가 두 개 뿐이다. 그나마 남편이 시골로 간 뒤 그 한쪽 의자에는 내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티셔츠나 바지가 늘어져 걸쳐 있을 뿐이다. 세수는 생략하고 양치질만 하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시계가 거의 6시를 가르치자 그 시계바늘이 찌르기라도 할 듯 마음이 쫓겼다.
이런 때는 혼자라는 게 무척 편하다. 딸아이와 남편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같이 밥을 먹는 소위 식구 노릇을 해본지가 언제인가 싶게 불과 몇 달 만에 혼자 사는 방식이 익숙해졌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세 사람이 흩어져 살면서도 이젠 애초에 가졌던 그 목적을 되새겨보는 경우조차 아주 드물었다. 세 사람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어디선가 무사히 잘 살고 있다는 소식만 알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식구들을 위해 연민이나 그리움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어떤 목적을 위해 출발지를 떠나왔는지를 잃어버린 지친 순례자처럼 하루하루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현관문을 나설 때 바깥공기의 서늘함이 머리를 일깨우며 혼자라는 사실도 더불어 일깨웠다.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족들은 어떤 모습일까. 남편은 이미 깨어나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을 할 시간이다. 남편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폐교된 초등학교 교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친구 몇 명과 같이 판로와 경제성이 아울러 불확실한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중이다. 딸아이는 지금 무얼 하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있는 그 미국이란 나라의 시간은 아무리 시차를 대입해서 계산해 봐도 현재가 몇 시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언젠가 이맘때 새벽 시간에 통화를 했는데 그쪽 시간으로 저녁이라고 했다. 낮과 밤처럼 시간대가 서로 멀고 다른 것처럼 사실 이젠 몇 년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실체조차 가뭇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그때 속으로 말했었다. “너는 늘 햇살이 비추는 쪽에서, 그 시간 속에 살아라. 여긴 너에게 언제나 밤 시간 밖에 주지 못해.”라고.
4월의 새벽 공기는 온몸에 차갑게 스며들어 아직 잠이 덜 깬 머리를 말끔한 각성 상태로 만들어주었다. 결혼 이후 22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불과 몇 달 전부터 22년 전과 비슷한 삶으로 되돌아갔는데도 흡사 어디 먼 곳을 헤매다가 이제야 제 길로, 혹은 가야만 하는 길로 들어섰다는 기분에 지금의 추락이 오히려 편안했다. 그동안의 분에 넘친 호사보다는 내 몸을 부려먹고 살아야하는 지금이 나의 본성에 더 친숙했다.
제대로 된 사모님도 아니고, 그냥 전업주부로 다른 일을 안 하고 남편의 월급으로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여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는 하나뿐인 딸아이도 유학을 가고 남편도 은행으로 출근을 하던, 지극히 평화로웠던 3년 전에는 무지 심심하고 돈이 쪼들려도 끝까지 돈벌이를 하지 않았다. 다시 돈벌이를 시작한다면 결혼하기 전의 공순이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처럼 버티던 고등학교 동창들도 마흔 살이 넘자 애들 학원비라도 벌어야 한다며 하나둘씩 대형마트의 계산원이나 식품 판매원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해봐야 시골 여상 때 친구나 서울로 올라와 다니게 된 산업체 부설 야간 고등학교 친구라 다들 형편이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산업체부설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돈을 벌자 그토록 먹고 싶었던 은박지에 싼 미제 초콜릿과 머리칼에 황홀한 냄새를 풍기게 해주는 레브론 샴푸를 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게 가장 기뻤다. 행복의 실체를 눈앞에 보여주는 돈의 위력이 감탄스러웠다. 결혼하면서 13평이지만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되자, 편안해 보이는 전업주부가 되고 싶었다. 남편돈, 시댁돈, 친정돈으로 편히 사는 여자들을 보자 이를 악물고 돈을 벌려던 내 모습이 불쌍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안간힘과 허세를 합쳐가며 버텼는데 그래도 공순이의 시간은 예정된 운명처럼 다시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알량한 소유물마저 바닥을 드러내면서 내 처지가 부당하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경리 업무부터 시작한 남편이 50살까지 시중 은행에서 버틴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양지쪽에 서 있어 보았다는 데서 위로를 찾았다. 사무직인 은행원 남편을 둔 덕택에 잠시 사모님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13평 아파트에서 31평 아파트를 갖게 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그리곤 유예되어 있던 세계로 너무 늦지 않게 시간을 맞추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음지로 옮겨갔다. 그동안 어설픈 사모님 노릇을 하면서 나에게 이런 시간이 결국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소유물들은 억지로 손에 그러쥔 한 움큼의 강물보다 더 쉽사리 빠져나갔다.  
다른 아쉬움도 많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같이 어울렸던 아파트 여자들을 놓치기 싫었다. 그녀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 때 느꼈던 묘한 안락감과 고양감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여자들 모두 나처럼 31평짜리 아파트에 살았지만 그 속내는 천양지차가 났다. 31평 아파트가 시발점인 사람도 있고, 종착점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 부모가 결혼할 때 집을 사준 부류들이 가장 풍요로웠고 전문직 남편의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산 여자들이 그 다음이었다. 내가 한때 소유했던 31평 아파트는 남편이 신용도 높은 은행원이란 이유로 집값의 절반 이상을 대출을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편의 월급에서 삼분지 일을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쓰면서도 나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그 무리한 일을 계속해 나갔다. 결정적 파국이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나에게는 대출 덩어리인 그 31평 아파트가 내가 이 사회에서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의 정점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밖에 머물 수 없는 위태로운 정점이었다. 고등학생 딸을 엄청난 무리인줄 뻔히 알면서 미국에 유학을 보낼 때 집은 이미 팔았고, 그 절반을 남은 융자금을 갚는데 쓰고 나자 13평 아파트를 살 돈도 채 남지 않았다. 계약하고 이사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2달로 잡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최후의 만찬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그 아파트의 여자들처럼 지냈다.
오전에는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커피와 수다를 한꺼번에 즐기고, 일부는 헬스클럽으로 떠나고, 일부는 같이 홈쇼핑 채널에서 보석을 구경하고, 누군가의 차를 타고 교외로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3시가 되면 그녀들은 맹모의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겐 그 시간들이 달콤한 추억이 되었다.
목욕탕의 불을 켜자 축축한 공기가 달려들었다. 때 미는 곳인 이른바 세신실 한편으론 이곳에 근무하는 때밀이 아줌마 3명이 쓰는 물건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곳에 쌓인 초록색 때밀이 타올과 각질제거제, 각종 오일과 물바가지, 그리고 퉁퉁한 내 몸뚱이가 내 밥벌이의 도구들이다. 나는 찬물 한 바가지로 얼굴을 씻고 거울을 보았다. 눈 밑에 검은 기미가 무리지어 나타났다. 그 기미는 내 얼굴 피부 저 아래쪽에 자리 잡은 질기디질긴 뿌리와 같았다. 얼굴 표면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만 그 거대한 뿌리를 드러내며 눈 아래 얼굴에 검은 달무리 형태로 자리 잡았다.
31평 아파트에 살 때 나는 이 기미가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화장을 하곤 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기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숨어있던 검은 기미가 다시 보일 때면 내가 가죽봉제 공장을 그만 둔 25살 이후 나의 삶은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인생에서 행운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봉제공장에서 보낸 그 시간 동안 강하고 날카로운 미싱 바늘보다 더 날카롭게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행여 나에게 올지 모를 행운 따위에 모든 것을 걸기도 했다. 결혼동기도 어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상고 졸업생이지만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월급을 타는 은행원이라는 조건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책상 위에서 서류를 보면서 하는 일을 가진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좋았다.
하나뿐인 딸아이는 정말 책상 위에서 일하는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딸아이 영지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돌연히 영지의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적극적인 격리를 시키지 않으면 나의 미천함이 딸에게 그대로 상속될 듯한 위기감이 들었다. 아빠가 은행에 다니는 집의 외동딸로 포장되어 있던 영지지만, 미국유학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나는 어딘가 숨겨둔 돈이나 유산이 있는 집안으로 모든 이들을 속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선 착착 진행을 해나갔다. 나는 융자가 아직 반 정도 남아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제2 금융권에서 추가대출을 받았다. 아파트를 사고 난 뒤 몇 년 동안 갚은 금액만큼 대출금은 또다시 늘어났다. 남편은 은행에서 퇴직을 했고, 나는 목욕관리사 교육원, 즉 때밀이 학원에서 때밀이, 맛사지, 머리지압, 경락, 안마 등을 한 달간 배우고 이 헬스클럽 세신실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덥고 습한 세신실 속에서 땀을 흘리게 되자 온몸에 땀띠가 났고, 팔이 부어오르고 감각이 둔해졌다. 어울리지 않았던 양지쪽의 생활이 언제였나 싶게 잊혀져가고 난 음지 속에 웅크린 곰 한 마리처럼 변해갔다. 그러나 지난 시간은 음지까지도 나를 따라와 더 멀고 어두웠던 지난날로 데리고 갔다. 차라리 기억이 없는 곳에 살고 싶은데 현실은 늘 그 과거에 완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끝끝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신실에 출근한지 한 달 후에 그녀, 진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 김진숙, 그 이름을 되뇌이자 습한 세신실을 떠도는 검은 곰팡이가 일순간에 모두 내 몸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처음 진숙이 휙 지나갈 때는 낯이 익은듯한데 정도였고, 세신실로 들어서려던 그녀가 힐끗 내 쪽을 보는가 싶더니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도로 나갈 때 확실히 알아보았다. 진숙이도 나, 이정희를 의식했음을…… 진숙은 날씬하고 탄력이 넘쳐 얼핏 무척 젊어 보였다. 나는 내 나이가 48살임을 떠올렸고, 그러면 나의 이 항아리처럼 퍼진 몸과 물기 없는 얼굴이 자연스럽다고만 생각했다. 자연스럽기로 말하면 나와 같은 상태가 맞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도무지 내가 때를 밀어주는 사모님들도 나이를 알 수가 없었다. 피부과와 성형외과에 뿌려지는 돈의 위력은 나이까지도 천천히 다가오게 만들었다. 특히 화장을 하고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있으면 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진숙은 이 헬스클럽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그것도 날씬한 몸매와 화려함으로 유명했다. 깡마른 몸매가 득세를 하는 세태가 아줌마들 사이에도 퍼져서 조금이라도 더 마른 사람이 부러움을 샀는데 진숙은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대부분의 중년여인들이 푸대자루처럼 출렁이는 뱃살을 세월이 주는 원치 않는 이자처럼 떠안고 살면서 체념을 하는 터라 진숙의 납작하고 탄력 있는 복부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날씬한 몸매를 가져야한다는 의식이 독재자처럼 여자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헬스클럽에 오는 모든 여자들은 그 유행의 독재에 굴복해서 몇 시간 동안 런닝머신 위를 뛰면서 한숨을 쉬었다. 헬스클럽 내에서는 진숙이 일류여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그곳에서 집안도 번듯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그 얘기 자체가 진숙이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강력하게 나돌았다. 이 헬스클럽 여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녀의 집에 가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유력한 증거라면 증거였다.
게다가 진숙은 재즈나 요가 등 그룹으로 하는 운동반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기구를 이용해서 혼자 운동을 했다. 진숙이 헬스클럽에 나타나는 시간도 문제였다. 보통의 주부라면 집안일을 대충 끝마친 오전 10시 경에 오기 마련인데 그녀는 오후 3시 경에 나타났고 헬스장을 돌아다니며 온갖 기구 운동을 2시간 동안 줄기차게 한 뒤 1시간을 사우나에서 땀을 빼거나 맛사지를 받고 6시가 가까워져서야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채 간다는 것이다. 술집이 영업을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게 또한 여자들의 추론이었다.
그 다음 진숙에 관해서는 전신성형설도 퍼져 있었다. 여자의 신체 부위 중 결코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목을 보면 분명 40대 중후반으로 짐작이 되는데,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과 탱탱한 복부 때문에 말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진숙이 타고 다니는 외제차에 대해서도 견해들이 속출했다. 폐차 직전의 중고차라느니, 빌려서 탄다는 둥의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어 다녔다.
아, 나는 그럴 때마다 진숙의 지난날을 떠벌리고 싶은 충동에 떠밀렸다.
나는 자기 한 몸만 잔뜩 화려하게 꾸미고 초라한 연립주택에서 빠져나오는 진숙을 상상했다. 혹은 목돈은 한 푼도 없이 강남의 조그만 오피스텔에 월세를 살면서 소지품만 화려한 여자를 생각했다. 초라하게 살기는 죽어도 싫은 여자들 그룹에 진숙을 꿰어 맞추고 있었다. 나는 정식으로 진숙을 만나기 전에 누구에겐가 진숙의 지난날을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친하지는 않지만 고향 친구들 중 발이 넓은 것으로 유명한 혜자의 전화번호를 겨우 알아내서 전화를 했다. 내 나이 정도가 되어 소식이 없던 친구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 다정하게 굴면 다단계 판매나 보험 권유인 경우가 많았다. 혜자가 품은 경계와 의심의 태도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 너머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혜자는 서울, 그것도 강남에 살고 있어서 고향 친구들에게는 두 가지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뭣 좀 물어볼게. 보험이나 물건 파는 거 아니고, 순전히 호기심 때문인데, 너 김진숙에 대해서 좀 아는 게 있니?”
“왜? 걔 무지 잘 살고 있잖아. 같이 서울로 갔던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걘 결혼 잘 했잖아.”
혜자는 우리 동창생들 가운데 결혼을 잘해서 부자 대열에 무임승차한 얘기의 주인공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진숙이라고 했다. 나같이 못사는 동창생에게는 알려 주지도 않고, 재경동창회라면서 서울에서 이른바 중산층 비슷하게 사는 친구들끼리만 연락을 하고 지내면서 모임도 갖는다는 것이었다. 지방 도시의 여상 출신들이 서울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살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대개는 그 도시의 고졸 출신 남자와 결혼해서 작은 식당이나 화장품 가게 등을 꾸려가면서 허름한 지방 아파트에서 대부금을 갚으며 허덕대고 살았다.
“그래서 실제로 진숙이네 집에 가본 친구들이 있니?”
나는 그 대답을 기다리는 잠시의 틈이 진실과 허위를 판명하는 절체절명의 순간같이 느껴졌다. 입술과 목이 타들어가고 어느새 꿀떡 하고 목울대를 타고 무언가 넘어가고 있었다.
“응, 나도 가봤어. 3∼4년 전인데 강남의 한 빌라에 살더라. 집이 70평은 족히 돼 보이더라.”
70평, 나는 아득해졌다. 아파트의 평수가 삶의 총체적인 역량을 대변해주는 현실에서 13평과 70평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 아닌가. 나의 예상과는 다른 진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진숙은 남편 잘 만나서 자신의 얼굴과 몸매만 가꾸고 살면 되는 복 많은 여자로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게 48년이란 시간이 내게 심어준 삶의 철학이라면 철학이었다. 진숙이가 무언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돈 걱정 없이 살게 되었으리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그것은 일찍이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박을 때 터득한 삶의 엄정한 원칙이었다. 그곳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우선 하나같이 집안이 가난했다. 그들이 삶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한다면 결혼을 해도 사는 방만 바뀔 뿐이고, 몸에 배어 있는 구질스러움과 궁끼는 결코 떨치기 어려웠다. 그것을 떨치고 일어난 애들에게는 소녀가장으로 여기고 매달리기만 하는 가족을 떠나 일단 서울로 향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학벌이나 재산이 좀 있는 남자에게 계산적으로 접근한 친구들 가운데 몇몇은 그 작전이 성공했다. 진숙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진숙이 남편은 직업이 뭐래니?”
“글쎄다, 무슨 사업인가 한다던데.”
사업? 번듯한 이름을 대지 못하는걸 보면 음지쪽에서 일하기가 쉬웠다.
“애도 있니?”
“어,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는데 다들 미국에 유학을 가서 집에는 없대. 그리고 남편도 거의 중국에 있다나봐. 뭔가 사업을 하는 모양이던데 중국에 그 생산 공장이 있다더라.”
“너 그 집에 갔을 때 걔네 식구들 사진 봤어?”
“글쎄, 사진까지 보지는 못했어. 잠시 커피 마시면서 아 정말 좋은데 사는구나 부럽다 이런 생각만 잔뜩 하고 왔거든. 그 넓은 집 구석구석이 어찌나 세련되게 꾸며져 있는지 꼭 모델하우스 같더라니까. 여자로 태어나서 그렇게 호화롭게 한번 살아봤으면 원이 없겠더라.”
혜자의 말끝마다 절절히 배어나는 부러움에 나는 그 생활이 몽땅 허위일 수 있다는 말을 뱉지 못했다.
“근데 그 남편이 같이 사는 느낌이 들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현지처나 정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휴, 의심하려고 들면 한정 없어. 나머진 네가 알아봐.”
혜자는 친구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 한다며 교양 있는 서울내기 아줌마처럼 말을 끊었다.
나는 혼자서 진실 캐기에 들어갔다. 나는 진숙이가 가끔 세신실에 내려와서 때를 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같이 세신실에 근무하는 두 아줌마도 벤츠아줌마라는 별명으로 진숙을 알고 있었다. 근데 요즘은 통 세신실에 오지 않았다고도 얘기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근무하고 난 뒤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진숙은 세신실과 맛사지실, 심지어 찜질방 숯불가마를 청소하는 아줌마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팁을 잘 주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가마 입구에서 문을 여닫느라 입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염씨 아주머니는 아주 진숙이에 대한 칭찬을 달고 살았다.
“어찌나 경우가 바르고 사람 위아래를 아는지 이 불가마에 올 때 빈손으로 오는 걸 못 봤어. 나 먹으라고 야쿠르트 한 병이래두 꼭 챙겨와. 아무리 잘 사는 여편네라도 우리 같은 사람한테 그리 마음 써주기 쉽지 않거든.”
나는 그게 얼마나 계산된 행동인지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30년이란 시간이 또 확신을 증발시켰다. 그 시간이면 인간성이건 몸매건 그 무엇도 다 바뀌거나 바꿀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나는 헬스클럽 정회원 명부를 들쳐보았다. 주민번호 앞자리가 나와 같음을 확인하고, 현재 주소를 살펴보았다. 주소지는 이 헬스클럽에서 가까운 일원동의 빌라로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가봤다는 그 빌라가 실제 존재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진숙의 실체가 느껴지지 않음은 무슨 이유인지 몰랐다. 진숙의 현재 상태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끝없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진숙이 어떻게 대학은 갔다는 건지, 결혼은 누구랑 그렇게 잘 했는지, 얼굴과 몸은 어떻게 재창조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의심에서 출발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헬스클럽 내에서 그녀를 탐문하고 다닌다고 누군가 알게 되면 안 되었다. 좋은 일이라도 종업원들에겐 손님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로 되어 있었다. 가령 어떤 사모님이라 불리는 손님이 “아휴, 아줌마, 나 요즘 살이 더 찐 것 같지 않아요?”라고 물었을 때 며칠 전보다 분명 더 튀어나온 그 배를 보면서도 진실을 말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진숙이를 만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의 실체를 밝혀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이상스런 의무감까지 들었다. 그런 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때 미는 손님이 없어서 접수 보는 아가씨와 잡담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향수 냄새가 먼저 깔리더니 진숙이 나타났다. 그날따라 운동과 사우나, 화장까지 다 마치고 나가는 진숙의 모습이 유난히 화사했다. 나는 그 화장을 확 베껴서 성형수술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눈과 인조눈썹을 뜯어내고 누워도 쳐지지도 않는 커다란 플라스틱 가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진숙이가 내가 가진 것 중 단 한 가지도 가져가지도 훼손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없지만 무언가 부당하게 얻고 있는 사람에게 비아냥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숙을 향해 뛰었다. 나는 최신 유행 핸드백을 들고 선글라스를 쓴 진숙이를 등 뒤에서 불렀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입구였다.
“진숙아!”
내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몇 발자국 그냥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진숙아!”
라고 불렀다. 그래도 대답하지 않으면 그녀의 목이라도 낚아챌 듯 알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쳤다. 사람은 그 뒷모습이 더 정직하다고들 말 하는데 그 말에 대입해본다면 그때 진숙의 어깨는 적개심으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숙이가 비로소 뒤돌아보았다. 획 돌아선 진숙은 그 완강한 몸짓에 비해서는 아주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서로 모르는 척 하면 안 될까?”
“너도 나를 알고 있긴 했구나.”
“네가 헬스클럽 내에서 나의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나서 너를 유심히 봤더니 그 옛날 한때 알던 친구더구나. 그래 뭐가 궁금해서 그렇게 호구조사를 하고 다녔지?”
“한 때라고……?”
거기까지 달려온 나의 행동을 진숙이가 그렇게 정리해버리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한 때라고 말하기엔 둘이 같이 겪은 경험의 농도가 푸른 멍처럼 짙지 않을까. 내 얼굴 피부 깊이 감추어 있던 검버섯이 세월을 뚫고 다시 돋아난 것처럼 뿌리가 깊지 않은가.
나는 진숙이 과거와 끊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매몰차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도 결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 시간들이니 진숙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냥 네가 하도 잘 산다기에 궁금했던 것뿐이야.”
“내가 좀 잘 살면 안 되니?”
나는 바로 속내를 꿰뚫으며 치받는 그녀의 말에 뜨끔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진숙이가 획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멍해지며 저렇듯 단호한 진숙의 태도를 경험했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진숙과 나는 고향인 옥천에서 같은 여상을 다녔다. 진숙은 삼남매의 장녀로 홀어머니가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동안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당시 서울에는 의류 수출이 잘돼 많은 봉제공장이 생겨났고, 이른바 공순이가 모자라자 숙식을 제공하고 정규고등학교 과정 공부를 시켜준다고 시골 우리 학교 앞에서까지 대대적인 선전을 해댔다. 그래도 나는 서울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좁은 방안에서 낡은 여성 잡지를 들추며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 나와는 멀다는 작은 절망감에 빠져 있기만 했다. 그런 나를 불러낸 진숙은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던 듯 “우리 서울로 가자”라고 말했다. 나는 막연한 열망을 실현시켜줄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럼 어디서 살 건데?”
나에겐 이 사실도 매우 중요했다. 좁은 방안에서 언니와 남동생과 같이 지내는 게 싫어서 누군가 나에게 따로 방 하나를 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사에서 공부도 시켜주고 먹이고 재워준대.”
“너 동생들은 어쩔 거야?”
“막내도 새봄에는 중학교 들어가니까 내가 밥 챙겨주지 않아도 될 꺼야.”
진숙은 서울 가서 자신이 돈을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겠다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설득했다. 우리집은 내 한 몸 밥값 덜어지는 걸 은연중 다행으로 여겼고, 야무진 진숙이와 동행이라니까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진숙과 나는 예정대로 구로동의 가죽과 오리털 의류 수출회사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산업체 부설 학교도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진숙과 낯선 환경에서 서로 의지하며 더 친해지기도 했는데 진숙이는 금방 적응했고, 서울도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더니, 6개월 후에는 자기는 더 좋은 곳으로 간다며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때부터 진숙은 나와 소식을 딱 끊었다.
여자들 중에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때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대부분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겉모습으로 완전한 변신을 꾀하거나 구차한 과거를 영원히 묻어버릴 요량인 여자들이 그랬다. 나는 그때 잠시 고아가 된 것처럼 허둥댔지만, 나 역시 진숙이 과거 속에만 존재하기를 은연중 바랬다.  
진숙이 전혀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가버리자 나는 공장시절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번이 진숙의 실체를 밝혀서 무언가 확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았다. 여탕의 때 밀기는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가 가장 한가롭기 때문에 잠시 외출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탕비실을 빠져 나왔다. 나는 급히 나오면서도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던 듯 침착하기조차 했다. 1층 현관 로비에서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진숙이가 정회원용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렸다. 진숙이의 은색 차가 스포츠센터의 주차장 입구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오고, 내가 탄 택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차를 뒤쫓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달리자 진숙이의 차는 강북의 어느 허름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작은 평수로 이루어진 연립주택 단지였는데 차에서 나오는 진숙의 손에는 과일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택시 안에서 봐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짐작을 믿으며 택시 안에서 진숙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진숙은 2층에서 왼쪽 집으로 들어갔다. 3층짜리 연립주택인데다 계단 중앙에 창이 나 있어 그녀가 202호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동 202호에 누군가 진숙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사는 것이다. 그때까지 내 행동을 보고만 있던 초로의 택시기사가 드디어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저 여자분이 댁의 신랑하고 정분 난 여자랍니까?”
나는 뜻밖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뇨, 그렇지는 않고 다른 일 때문이에요.”
“그럼 저 여자한테 받을 돈이 있나본데 저 차만 팔아도 돈은 꽤 될 텐데…….”
나는 내친김에 찻값을 물어보았다.
“차가 아직 광택이 멀쩡한 상태인 걸로 봐선 3년도 채 안된 것 같고, 저 차종이 원래 칠천 만원 정도 하니까 적어도 사천 만원은 받겠네요. 외제차는 중고차라도 과시용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서 꽤나 가격이 나가요.”
기사는 아예 그렇게 단정을 지었고 나는 정말 진숙에게 무언가 받을 게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숙에게서 그녀의 삶이 거짓이라는 확증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진숙이가 연립주택 현관으로 다시 나타났다. 아까 손에 들었던 과일 봉지는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얼굴은 좀 찌푸려져 보였다. 나에겐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202호 연립주택을 찾아가 보느냐, 진숙이가 탄 차를 뒤쫓느냐의 갈등이었다.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진숙이의 이름을 대면 문을 열어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혼자서 잘 할 수 있겠냐며 잔뜩 걱정하는 택시기사를 보내고 나서 202호 문 앞에 섰다.
나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고 벨을 눌렀다. 곧이어 인터폰으로 꽤나 또랑한 목소리를 내는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왔고, 나는 간단히 ‘진숙이 친구’라고 답했다. 말하면서도 내가 정말 진숙이의 친구인지 헷갈렸지만 지난날 친구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친구라는 이름을 빌려서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건 적절한 대답이었다. 인터폰을 받은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진숙이 친구 어쩌고 하는 말을 하는 게 잘못 녹음된 말처럼 잡음 속에 들려왔다. 잠시 후에 문을 열어준 여자는 내 또래로 보였다. 막상 호기 있게 현관에 들어서자 여기까지 내달아온 동기를 알 수가 없었다. 거실 쪽을 바라보는데 80살쯤 되었을까, 한 늙은 여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댁은 누구유?”
하고 그 노파가 먼저 물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또 망설였다. 발은 여전히 좁은 현관 타일 위에 붙은 채였다.
“우리 진숙이 친구라며?”
우리 진숙이? 그럼 이 노파가 진숙이의 엄마인가. 나는 노파에게서 오래전 보았던 진숙이 엄마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억척스럽기로 유명했던 진숙이 엄마 ‘청성댁’이란 말인가. 이제 그 억척스러움은 억척스럽게 삶을 연장하려는 의지로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덧붙여진 30년의 시간을 그 얼굴에서 벗겨낸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나는 그대로 왈칵 어떤 감정에 휩싸였는데, 그건 유쾌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밀려온 파도 탓이었다. 진숙의 어머니는 옥천 옆의 청성면에서 살다가 시집을 와서 ‘청성댁’이라고 하다가 자식 셋을 낳고 26살에 남편이 죽어 청상이 되고 말아서 ‘청성댁’ 또는 ‘청상댁’ 두 가지 택호로 불렸다.
“아, 네. 진숙이 친구 정희예요. 정희, 왜 옥천에서 옆집에 살았잖아요.”
옥천이라는 말이 나오자 노파의 얼굴에 무언가 인식을 하고 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진숙이 엄마보다 또래 여자의 허락이 있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청성댁이 나를 인정하고 나자, 혹시 자신이 위험한 사람을 집에 들이는 실수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자신이 간병인이라고 말하면서 곱상하게 생긴 만큼 제법 곰살맞은 성품을 곧 드러냈다.
“어휴, 잘 됐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할머니하고 말벗 좀 되어 드리세요. 할머니가 치매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옛날이야기 나누면 통할 거예요. 할머니가 지난달에 큰 뇌수술을 하고 나서 가끔 섬망증이 나타나서 그런 거래요. 고령에 대수술을 받으면 신체 리듬이 깨지기 때문에 얼마간은 의식장애와 혼동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녀는 제법 전문 간병인다웠다.
“이 댁 따님 고향 친구 분인가 봐요. 따님이 어찌나 할머니를 정성껏 모시는지 자녀들이 그러면 우리들도 자연히 더 열심히 돌보게 된답니다.”
내가 아는 과거의 진숙은 장녀인 자신을 부엌대기로 부려먹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소녀였다. 간병인은 미망의 늪으로 흘러 내려가 버리려는 청성댁의 의식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는 듯 “할머니, 이 아줌마가 옥천에 같이 살았더래요.”하고 크게 외쳤다. 진숙이 엄마는 나를 완전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일단 고향사람으로는 인정을 한 듯 했다.  
“근데 한 가지 주의할 게 있어요. 할머니 손은 잡지 마세요. 누구 손이든지 잡기만 하면 꽉 잡고 놓아주질 않으세요. 손을 놓치면 저 세상으로 떠나갈 것처럼 생각하세요.”
나는 청성댁의 손을 바라보았다. 불완전한 주인의 의식과는 다르게 손은 무릎 위에 강건하게 놓여 있었다. 물에 불어 지문이 없어졌을 것 같은 손가락이었다. 늘 손가락 끝이 허옇게 물에 불어 이티의 손가락 끝처럼 뭉툭 했었는데 지금은 손마디가 몇 년 묵은 대추처럼 쪼그라들어 버렸다. 청성댁은 체머리를 흔들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근데 우리 진숙이 첩 아냐, 첩 아냐.” 노파는 계속 중얼거렸다.
“진숙이 걔 그리고 대학도 나왔어.”
지금 상태의 청성댁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진숙이의 친구라는 말에 가슴속에 늘 응어리져 있던 말이 터져 나온 것이리라. 저 말이 다 사실이라면 진숙은 내가 추측한 삶과는 다르게 살아왔다는 얘기였다. 하도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어서 내력을 다 알고 있는 간병인이 진숙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청성댁의 말은 거의 사실이었다. 진숙이가 나와 같이 일하고 공부했던 산업체 학교를 나온 후, 경리로 취직한 회사의 사장이 그녀의 남편이 된 것이다.
진숙은 처녀의 몸으로 아이가 둘인 홀아비 사장과 결혼했다. 진숙은 아이를 낳지 않고 대학을 다니면서 그 애들을 키우고, 대신 옥천에 있던 동생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를 시켰다. 청성댁도 그때까지 계속하던 장사를 그만두고 동생들과 같이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나이가 많았던 진숙의 남편은 3년 전에 죽고, 진숙은 강남에 커다란 일식집을 차렸다. 남편의 자식 둘은 모두 유학까지 마친 상태로, 번듯한 직업을 가졌고 재산상속도 싸움 없이 끝난 상태라 진숙은 일식집 여사장으로 불리며 경영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간병인은 진숙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식당 여사장이 교양 있고 세련됐다고 그 주변에서는 유명하대요. 제가 봐도 참 열심히 살아요. 이 댁 따님.”  
“거기 식당이 어디예요?”
하고 묻자 간병인은 거실 서랍에서 명함을 꺼내 주었다. 명함 속 일식집의 주소지는 서초동 법원 근처였다. 나는 그 명함이 진숙의 실체라도 되는 듯이 뚫어지게 읽어보았다. 나는 청성댁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그 집을 나섰다.
그 명함을 들고 교대역에서 내려서 걷는 동안 진숙의 존재가 점점 크게 느껴졌다. 검은 나무와 흰 벽으로 지어진 식당의 외관은 일본의 이미지를 듬뿍 풍겼다. 간판과 명함 속의 전화번호가 일치했다. 나는 근처의 은행나무 뒤에 숨어서 일식집 안을 관찰했다.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진숙의 모습은 세련된 젊은 모델처럼 보였다. 들어서는 손님들은 단골인 듯 진숙과 무언가 인사말을 제법 길게 주고받았다. 진숙의 표정은 안온했고 깍듯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일식집 입구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오은주∙1957년 서울 출생.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추천완료 등단. 작품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현재 ≪아름다운 인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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